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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어와 화천군민 사이, 산천어 축제에 필요한 철학은?

‘동물-지역-수도권’의 고통과 윤리가 충돌하는 곳, ‘사물의 의회’를 떠올리다
등록 2026-01-01 21:23 수정 2026-01-05 15:17
‘2025 산천어축제' 폐막일인 2025년 2월2일 강원도 화천군 화천천에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있다. 연합뉴스

‘2025 산천어축제' 폐막일인 2025년 2월2일 강원도 화천군 화천천에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있다. 연합뉴스


 

“선생님, 이 책이 동료 동물에게 말 거는 데도 도움이 될까요?”

2025년 10월, ‘동료에게 말 걸기’(민음사 펴냄, 2025년)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고 나서 들었던 첫 질문이다. 나에게는 가장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쓴 책 속에는 동료 시민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동료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연재 지면에서 따로 이야기해보겠다고 답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됐다.

2026년 1월10일부터 2월1일까지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산천어축제가 열린다. 산천어 얼음낚시와 맨손잡기 같은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하는,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축제다. 지역을 살린 관광산업의 대명사처럼 칭송받기도 하지만, 단순한 재미를 위해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죽음의 축제’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천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결국 괴롭히고 죽이는 행사인 탓이다. 이 논란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동료에게 말 걸기’, 박동수 지음, 민음사 펴냄, 2025년

‘동료에게 말 걸기’, 박동수 지음, 민음사 펴냄, 2025년


수도권과 지역의 대립, 그리고 산천어의 고통

홍승은 작가는 ‘산천어축제에 대한 복잡한 분노’(한겨레, 2025년 12월26일)라는 글에서 산천어축제를 둘러싼 복잡한 감정을 이야기한다. 1년에 한두 번 통화하는 둘째 삼촌이 “올해는 산천어축제 올 거지?”라고 물을 때, 그 질문에는 지역 주민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서른까지 춘천에서 살았던 홍승은의 마음은 편치 않다. 어릴 때는 산천어 잡기를 즐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되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춘다고 고백한다. ‘삼촌, 산천어축제는 인간에게 축제일 수 있어도, 산천어에겐 대량 학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홍승은은 지역을 ‘떠나온 사람’으로서 복잡하게 분노한다. 산천어축제를 낙후한 시골의 악습처럼 단순화하고, 축제에 동원된 지역 주민을 생각 없는 존재로 취급할 때는 화가 난다. 그러나 산천어 수만 마리가 열악한 환경에서 길러지고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또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이런 질문이 남는다. “비수도권 시골 주민에게 활기를 불어넣은 노동을 매도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학살하지 말자는 구호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떠나지 않은 사람’인 박서화 강원일보 기자는 다른 방향에서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산천어축제의 윤리를 묻는 당신에게’(시사인(IN), 2025년 3월9일)라는 글에서 그는 산천어축제의 비윤리성을 빌미로 지역 주민을 무시하는 태도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가 보기에 주로 수도권에 있는 동물단체에서 제기하는 비판에는 “지방이 마주한 가혹함을 함께 염려하는 대신 지식을 동원해 꾸짖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윤리적 우월감이 전제된 비판은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공존을 지향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섣부른 비판에 앞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성찰과 연대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대항 비판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산천어의 고통이다. 수도권과 지역의 대립이 전면에 떠오를 때, 그 누구에게도 산천어를 희생시킬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뒤로 밀려난다. 박서화의 주장 속에서 산천어는 논란의 소재가 되지만, 정작 논란의 당사자이자 고통의 주체로는 여겨지지 못한다.

떠나온 사람의 마음과 떠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모두 복잡하다. 그러나 이 복잡함이 산천어의 희생 위에 놓였다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주목하고 있을까?

동물윤리와 지역경제가 충돌할 때

1990년 미국 연방정부는 지나친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어가는 점박이올빼미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멸종위기종 보호법은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점박이올빼미가 살아가는 오리건주 원시림을 보호하는 환경규제가 생기면 벌목 노동자의 일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 법을 반대하는 벌목 노동자의 픽업트럭에는 ‘벌목 노동자를 구하고, 점박이올빼미를 죽여라’라는 범퍼 스티커가 붙었다.

오리건주의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장애인이자 퀴어 작가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펴냄, 2020년)에서 벌목 노동자의 분노를 이해하면서 ‘떠나온 사람’과 ‘떠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잇고자 시도한다. 그 자신이 그 지역 출신으로서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환경운동가들이 벌목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참기 어려워서다. 그는 환경운동가들이 목재회사와 벌목회사 중역에게로 주의를 돌려야 하며, 자연 보존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종류의 폭력과 파괴 사이의 연결”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물윤리와 지역경제가 충돌하는 상황은 어쩌면 거의 보편적인 문제다. 동물윤리의 관점에서 동물을 괴롭히고 죽이는 축제에 반대하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어렵지 않다. 동물에게 가하는 잔인함을 줄여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는 점점 더 상식이 되고 있다. 포유류만이 아니라 어류가 고통을 느낀다는 과학적 논거도 쌓여왔다.

하지만 보편적 윤리의 언어로는 지역의 맥락과 상황을 섬세하게 다루지 못할 때가 많다. 산천어축제는 하나의 경제적 배치를 이루고 그 안에는 지역의 생계, 노동, 자부심, 관광 소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잔인하니 멈춰라”라는 말은 도덕적으로는 옳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쉽게 무력해진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과 자부심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과제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 윤리에 충실할 것인가, 지역 경제에 충실할 것인가. ‘떠나온 사람’은 불안해진다. 잔혹함이 벌어지는 현실 앞에서 지역의 깊은 사연이 있다고 말하는 일은 어쩌면 폭력에 공모하기가 아닐까? ‘떠나지 않은 사람’도 마음이 복잡하다. 지역 주민의 복지를 내세워 동물을 희생시키는 일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갈수록 더 많은 윤리적 비난이 쌓이는 축제를 미래 세대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물려줄 수 있을까?

동료 동물에게 말걸기, 동료 인간과 마주하기

동료 동물에게 말을 거는 일은 그와 얽혀 있는 동료 인간과 마주하기를 회피할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꼭 대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립은 필연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온 정치적 형식이 낳은 불행한 결과일 수 있다. 동료 인간을 존중하면서 그와 동시에 동료 동물을 존중하는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필요한 정치의 새로운 과제일지 모른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2009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2009년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2009년)에서 제시한 ‘사물들의 의회’ 같은 제안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물들의 의회란 사물과 비인간 동물만을 대변하는 장이 아니다. 수도권 주민, 지역 주민, 외국인 관광객, 산천어 등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열망과 고통을 한자리에 모아서 더 커다란 의회를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표자 중 한 사람이 산천어의 고통을 대변해 말한다면 다른 대표자는 지역 주민의 입장을 대표하고 셋째 대표자는 수도권 주민을 대표하고, 넷째 대표자는 외국인 관광객을, 그리고 마지막 대표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자리가 자동으로 합의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더 불편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생계를 말하고, 누군가는 학살을 말하고, 누군가는 멸시를 멈추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정치적 대화의 자리에서 침묵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입장을 감출 필요도 없고 산천어의 고통을 논의에서 제거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입장과 이해관계, 고통이 동등한 자리에서 말해지면 다른 방식의 협상과 타협도 가능해진다.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펴냄, 2020년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펴냄, 2020년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우리 삶과 이 세상의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를 구축하는 일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오리건주 개벌지에서 프릭쇼(기인쇼)의 역사까지, 퀴어 시골 노동계급 조직화의 복잡함부터 성적 대상화에 대한 장애 정치학까지 망라하는 자신의 책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집입니다.”

집, 장소, 몸, 정체성, 공동체, 가족 그리고 영토. 그것은 “우리를 품어주고 지탱해준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그 모든 세계의 애착과 문제, 상처와 복잡함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계속해서 다시 마주하며 이곳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수도권의 일이 수도권의 일로 끝나지 않듯, 지역의 일도 지역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당사자가 겪는 일은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다. 동물의 고통은 더는 인간과 무관한 자연의 소관이 아니다. “동물을 무조건 보호하자”거나 “지역경제가 우선이다”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면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복잡함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문제의 복잡함을 개인의 곤란함으로 방치하지 않고, 복잡함이 복잡한 채로 마주할 새로운 정치적 형식(사물들의 의회)을 만들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서로가 극한으로 대립하고 싸우는 것은 함께 마주할 정치적 자리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의 책임 방기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복잡한 진실이 마주 앉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등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서로에게 애써 다시 말을 걸어야 한다. 떠나온 사람의 마음과 떠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 그리고 산천어의 고통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필요한 이유다. ‘누가 옳은가’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 전에 ‘왜 우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가’를 먼저 물어보면 어떨까.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가 ‘지금 한국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철학 이야기’를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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