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실제로 했거나 봤던 사람들은 말한다. 야구가 인생 같다고. 12살 때 강속구를 앞세워 고교 팀과 세미프로 팀을 상대로 7경기에서 노히트노런(선발투수가 한 경기에 등판해 단 1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는 것)을 5차례 작성했던 밥 펠러(2010년 사망)도 말했다. “매일이 새로운 기회다. 어제의 성공을 토대로 기회를 만들 수도 있고, 어제의 실패를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경기가 펼쳐지는 것이 인생이고, 야구도 마찬가지다.”
야구가 삶에 종종 빗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일상성 때문일 것이다. 프로야구는 연간 144경기(메이저리그는 162경기)가 열린다. 1년의 39.5% 기간이 야구로 채워진다는 얘기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현 시스템상 최대 19경기까지 더 치러야 한다. 여기에 시범경기까지 포함한다면? 야구는 연속성을 갖고 일상의 경기가 된다. 야구만큼 시즌이 긴 프로 스포츠는 없다.
야구 전문가와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김성근 전 에스케이(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감독은 당신의 야구를 물에 빗대기도 했다. 험난한 계곡길도, 잔잔한 시내도 있었지만 결국 앞으로 향해 나아가 바다가 됐다고 했다. 하긴 인생도 물같이 흘러간다. 흙탕물도 됐다가 일급수도 됐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 끝이 광활한 바다일지 혹은 작은 연못이나 메마른 황무지일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계속 흘려보내야만 한다.
야구도, 인생도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 어제의 야구로 오늘의 야구를 이길 수는 없다. 예전에는 속구, 커브, 슬라이더만으로 타자를 상대해도 됐지만 지금은 체인지업, 스위퍼 등도 갖춰야 한다. 시속 150㎞가 아주 빠르다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속 160㎞ 이상을 심심찮게 던진다. 미래의 야구는 더 빨라질 것이다. 공의 속도에 맞춰 방망이 반응 속도 또한 빨라질 것이고.
늘 이기는 팀도, 늘 지는 팀도 없다. 아주 잘하는 팀도 10번 중 2~3번은 지고, 정말 못하는 팀도 10번 중 3번 이상은 이긴다. 늘 영웅인 선수도, 늘 역적인 선수도 없다. 아웃과 세이프, 볼과 스트라이크의 균형 속에서 그저 더 잘하는 팀이, 덜 실수하는 팀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기술 발달로 판정의 오차가 점점 줄어드는 게 다행이라고 할까.
현역 시절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냈던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인생은 ‘한 방’일까요?” 이 감독은 답했다. “인생은 한 방이 맞다.” 홈런타자다운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말을 이어서 했다. “그런데 한 방을 터뜨리기 위해 누구보다도 큰 노력을 해야 한다. 급하게 타오른 불은 급하게 꺼지기 때문이다. 직진으로 갈 수도, 둘러서 갈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목표한 바를 향해 끈기 있게 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승엽 감독은 선수 때 국내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다가 일본 프로야구로 건너가 생애 첫 실패를 맛봤다. 한국에만 있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밑바닥이었다. 그는 일본 진출 첫해 좌절을 맛본 이후 하루 450~500번의 스윙을 했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도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의 상징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가 됐다. 이 감독은 “실패 속에서 야구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됐다”고 돌아본다. 그의 인생은 분명 ‘한 방’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 ‘한 방’을 완성한 것은 근성과 끈기였다. 이 감독의 좌우명은 ‘진실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다. 물론 배신당한 땀이 진실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패를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일 것이다. 글씨를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연필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번, 두 번, 여러 번의 실수와 실패로 하얀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더라도 지우고, 다시 지우고, 채우고, 다시 채워야만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지우고 다시 쓸 용기이리라.
우리는 매일의 타석에 선다. 야구에서는 안타든, 볼넷이든 합해서 10번 중 4번만 출루하면 괜찮은 타자라고 하는데 현실은 다르다. 어떤 때는 첫 타석에서 빈타로 물러나면 바로 교체된다. 안타를 치고 출루했어도 다음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믿을 수밖에 없다. 내일은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누군가는 내가 하는 하루 200~300개의 스윙 연습을 봐줄 거라고. 그렇게 매일의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스포츠 기자로 20년 넘게 현장을 누비며 홈런(특종)도 날려봤고, 삼진(낙종)도 당해봤다. 다부지게 마음먹고 던진 공이 폭투가 되기도 했고, 몸에 맞는 공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어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공을 던져왔던 것 같다. 정말 힘든 게임도 많았지만, 9이닝 내내 그라운드 위에 서 있고자 필사적으로 버텼던 것도 같다. 때로는 1회초 선두 타자로, 때로는 9회말 2아웃 마지막 타자의 심정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며 최선의 답을 도출해내려고 했다.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평균자책점을 낮추기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본 프로야구,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을 눈앞에 둔 ‘야구 철학자’ 스즈키 이치로도 말했다. “나는 늘 한 베이스 더 가는 것을 갈구하면서 야구를 해왔고, 그저 특별한 하루 없이 매일을 똑같이 살아가면서 연습처럼 경기하고 연습처럼 경기를 끝냈다. 그렇게 하려고 피나는 훈련을 하고 준비를 했다”고. 준비의 준비. 과거는 어쩌면 오늘의 준비를 위한 시험 무대였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홈런왕 행크 에런 또한 이런 말을 했다. “공놀이할 때나 인생에서나 사람은 가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기회를 얻는다. 그때가 오면 중요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순간을 포착할 준비가 돼 있고, 최선의 스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1980년대생 감독으로 기아(KIA) 타이거즈의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이범호 감독만 봐도 그렇다. 그는 2023시즌이 끝나고 팀 이적을 고려했다. 스스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아에 남았고 전임 김종국 감독이 급작스럽게 경질되면서 타이거즈 사령탑이 됐다. 이 감독은 기회를 잡았고, 시즌 내내 최선의 스윙을 하면서 버텼다. 만약 그가 팀을 옮겼다면? 야구도 타이밍, 인생도 타이밍이다. 때가 왔을 때 준비가 됐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처음 같은 마음으로 오늘의 공을 던지기를, 끝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의 공을 쳐내기를 바라본다. 야구처럼, 인생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도 없으니까. 단단하게 오늘을 버텨내기를. 인생 뭐, 야구. 끝.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인생 뭐, 야구 시즌2’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김양희 팀장과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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