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의 주요 장면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소도시 무천.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에서 바르게 자라 서울의대 합격이 확정된 고정우(변요한)가 친구인 심보영(장하은)과 박다은(한소은)을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마을 창고와 정우가 운전하던 차에서 사망자들의 혈흔, 정우 집에서 피와 흙이 묻은 신발이 발견된 게 범행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하지만 주검은 발견되지 않는다. 범행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Black out) 정우는 경찰의 압박 취조 끝에 술에 취해 범행한 뒤 주검을 유기했다고 자백하지만, 유기한 곳이 어딘지 끝내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사건은 빠르게 종결되고 10년형을 선고받는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MBC)은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각색한 작품으로 드라마는 정우가 출소해 무천으로 돌아온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사실 정우는 보영과 다은을 죽인 범인이 아니다. 드라마는 친구들의 주검을 찾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하는 정우를 중심으로, 범인 검거 중 물의를 일으켜 무천으로 발령받은 형사 노상철(고준), 정우의 부모가 운영하던 ‘무천가든’에 장기 투숙하며 식당 일을 돕는 하설(김보라)과 함께 11년 전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접근하는 과정을 담았다.
지난 11년 동안의 일에 관해 드라마는 자세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모두에게 지옥 같은 시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11년 사이 정우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만 홀로 무천가든에서 ‘식당 이모’로 일하며 속죄하듯 살고 있다. 그리고 정우의 친구들은 원하던 직업을 갖고 각자의 삶을 산다. 그런 마을에 ‘살인자’ 정우가 나타나자 마을은 다시 ‘11년 전’으로 돌아간 듯 분노와 긴장감이 맴돈다.
보영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사체를 유기한 이들은 친구 양병무(이태구)·신민수(이우제)와 그의 아버지들, 그리고 자기 아들 현건오(이가섭)도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생각한 경찰 현구탁(권해효)이다. 다은은 국회의원 예영실(배종옥)의 남편이자 정신과 의사이며 다은과 ‘원조교제’ 중이던 박형식(공정환)이 죽였다.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정우를 짝사랑하던 최나겸(고보결)도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아들의 인생을 지키려고, 비틀린 사랑 때문에 정우를 범인으로 만든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사건 은폐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에 무지한 상태로 침묵하며 방관하다가 정우의 귀환에 정우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며 정우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겉보기엔 “네 아이, 내 아이 없이 같이 키우며 살았다”고 말할 정도로 서로를 가족처럼 친밀하게 여겨온 마을이지만, 그런 가족 중심의 폐쇄성이 공모 공동체로 변질된 것이다. “모두가 용의자야. 이 마을 사람 모두가….” 형사 노상철의 이 말은 정우 어머니를 육교에서 밀어버린 범인을 찾다가 나온 말이지만 이 드라마의 구조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한마을에 사는 이들이 그 순진하고 선량한 얼굴 뒤에 서로를 향한 질투와 열등감, 그리고 욕망을 숨긴 채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제작진이 밝혔듯 “세계 공통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러면서도 몇몇 설정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여성혐오 범죄를 비롯한 가부장 가족 체계의 부정적 단면을 레퍼런스 삼아 ‘한국적 이야기’로 각색됐다.
우선 병무와 형식의 범행 동기가 그렇다. 병무는 짝사랑하던 보영이 자신을 “너네 고정우 따까리잖아”라고 말한 것에 격분해 보영을 강간한다. 보영의 말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정우를 향한 열등감을 갖고 있던 병무를 자극한 것이다. 형식 또한 다은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하자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는 여성혐오 범죄에서 빈번하게 나오는 범행 동기다. 2016년 강남역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을 살해한 범인이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진술한 것을 상기해보면, 여성을 향한 남성 범죄의 이유는 허망할 정도로 하찮은 경우가 많다.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아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나 없이) 행복한 것 같아서 남성은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한다. 누굴 강간하거나 살해한 것은 아니지만 보영의 아버지 심동민(조재윤)은 일상적으로 아내와 딸을 폭행한 인물이다. 직업도 없이 아내에게 얹혀사는 자신의 무능함을 술과 폭력으로 대체해온 것이다. 딸이 사망한 이후에는 주변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아내를 때리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가정 폭력과 교제 폭력을 비롯한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에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이 ‘힘’에는 상대를 성적으로 정복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병무는 자신을 무시한 보영을 때리는 대신 힘으로 제압해 강간한다. 그리고 곁에 있던 민수도 말리기는커녕 보영을 강간한다.
병무와 민수가 보영을 강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의 반응도 익숙하다.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 인생이 망가질까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보영을 삽자루로 내리쳐 살해하고 유기한다. 그리고 범행 사실이 밝혀지자 자기 아들을 구하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애들이 사귀었다나봐. 병무랑 민수 다 보영이랑 사귀었대. 혈기 왕성한 나이잖아. 열아홉 살이잖아, 열아홉 살. 그때는 뭐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그럴 나이 아니냐.” 그들이 선임한 변호사 역시 “저희 의뢰인은 어린 시절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망자와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친밀했고…”를 오류난 음성 파일처럼 반복한다. 즉, 사귀는 사이였고 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는 것이다. ‘망자’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으므로 이런 진술은 가해자들이 풀려날 이유가 된다. 피해자가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위와 같은 변명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정황이 밝혀졌지만 가해자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꿈에 그리던 경찰이 된 병무는 체포되자 “저 진짜 형사가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라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때 병무를 취조하던 상철은 이렇게 일갈한다. “성폭력 범죄자들 레퍼토리는 하나같이 똑같네, 똑같아. 네 사연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네 파란만장한 인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강간범 자식이.” 가해자와 그 주변인들의 뻔뻔한 변호와 변명도, 그런 말들을 막아서는 상식적 일갈도 현실 세계에서 자주 만나는 익숙한 레퍼토리 아닌가!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사건 ‘이후’에 있다. 남편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영실은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을 사용해 구탁의 승진을 약속하며 사건을 빨리 마무리할 것을 제안한다. 누구보다 합당하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할 경찰 구탁은 아들을 지키고 승진하기 위해 불의한 제안을 수락해 영실이 원하는 대로 부당하게 사건을 처리하고 경찰서장이 된다. 그리고 그릇된 충성심과 잘못된 확신으로 가득한 형사 김희도(장원영)는 진실을 밝힐 기회를 번번이 ‘공적’으로 가로막는다. 그렇게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종결된다. 시작은 당혹감과 이기심에 의한 단순한 은폐였을지 모르나 공권력이 부당하게 개입해 불의한 집단적 공모로 판이 커졌다. 그리고 이들은 말한다. “다 지난 일인데 왜 자꾸 들춰. 이제 그만 잊어.”
이 집단적 공모 체제를 뚫고 진실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결국 다른 드라마처럼 ‘사적복수’가 답일까?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블랙아웃’은 공(동체)적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우는 사라진 친구들의 주검이라도 찾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애쓴다. 그런 정우 곁에는 11년 전 사건에 관해 합리적 의심을 하며 재수사하는 형사 상철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굿 파트너’가 되어 공권력을 정당하게 활용하며 진실에 접근해간다. 사건의 목격자인 구탁의 쌍둥이 아들 건오·수오 형제 또한 정우를 돕는다. 건오는 목격자로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 걸 괴로워하다가 결정적 증거를 정우에게 건네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수오는 자신이 목격한 현장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 둘은 ‘마을’ 구성원이지만 그곳에 속하지 못한 외부자에 가깝다. 그리고 진짜 외부자인 하설이 있다. 하설은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가증스러운” 마을 사람들에 맞서 정우를 돕는다.
이들에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마을에 있되 그 공모 공동체에 포섭되지 않았다는 면에서 ‘외부자적 내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은폐된 진실을 밝히고, 망가져버린 세계를 구하는 것은 피해자이거나, 피해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들이거나, 가해자들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은 외부자적 내부자의 감각을 가진 존재들의 연대다. 마치 마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백설공주를 돕는 난쟁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4회에서 11년 동안 못(안) 찾았던 보영의 시신이 발견된다. 하설이 우연히 발견한 뼛조각을 갖고 인근 폐교에서 드디어 친구의 주검신을 찾은 뒤 오열하는 정우에게 보영의 환영이 말한다. “정우야. 혼자 어른 되니까 좋아? 우리 잊어버린 건 아니지? 우리 잊어버리지 마. 찾아줘야지.” 그런 보영의 방 한편에는 “끝까지 잊지 않을게”라고 적힌 노란 손팻말이 놓여 있었다. 이 말들은 “다 지난 일인데 왜 자꾸 들춰. 이제 그만 잊”으라는 세상의 논리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 세월호를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억울한 죽음들이 쌓여만 가는 사회에서 이 말들의 의미는 그저 드라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와 공명한다.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 사건과 그 사건 해결의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마을’의 불의한 공모 체계는 단지 ‘무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백설공주’는 아직도 우리 ‘마을들’ 저 아래에 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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