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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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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나무는 아픈데 인간은 ‘약수’라며 벌컥벌컥

봄 무렵 인간이 생채기 내 수액 빼던 고로쇠나무… 수액은 파브르가 말한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의 양분’
등록 2024-03-01 16:49 수정 2024-03-04 20:31
고로쇠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고로쇠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1)


캐나다 갔다가 들어올 때 너나없이 메이플시럽 참 많이 사 온다. 그 먼 곳에 직접 가지 않아도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메이플시럽을 지금 당장 골라 쇼핑 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나도 메이플시럽을 종종 택배로 시켜 먹는다. 갓 구운 핫케이크나 와플에 조르륵 달콤한 그 시럽이 흐르면 전보다 더 다정하고 포근한 맛이 난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붉은 단풍나무잎이 그려진 자그마한 유리병에 담긴 연갈색의 걸쭉한 액체, 그건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설탕단풍나무의 수액이다. 정확하게는 그 나무의 물을 받아서 끓이고 졸여 만든 시럽이다. 설탕단풍나무는 우리가 이 무렵 수액으로 즐겨 마시는 고로쇠나무와 같은 혈통의 자매 식물이다.

아야 아야 나무가 토해내는 통증 소리

식물에는 생물학적 혈통이라는 게 있다. 종-속-과-목-강-문-계. 사람이라는 한 종은 과거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여러 종의 유인원과 사람속을 이루고 침팬지속, 오랑우탄속 등의 무리를 만나 ‘사람과’를 이루고 더 많은 동물과 합쳐져 ‘포유류강’을, 나아가 동물계를 이룬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종이 모여 속을, 속과 속이 모여 과를 이루고 마침내 식물계를 만든다. 식물계와 동물계가 모여 지구상 생명체의 한 부분이 된다.

‘단풍나무속’은 서로 다른 150여 종의 나무가 모여 꾸린 가계다. 그 단풍나무속 가족의 유전자가 대체로 좀 부지런한 편이다. 겨우내 잠자다가 봄이 채 오기 전에 서둘러 체내에 물을 푼다. 밤중에 기온이 내려가면 나무 몸 안쪽에 수축이 일어나 물리적인 마이너스 압력이 생긴다. 그와 동시에 나무뿌리는 땅속에 있는 수분을 흡수해서 줄기 안으로 보내려는 힘을 받게 된다. 밤에 물을 빨아 줄기 속을 채우고 낮이 되면 햇볕을 받아 나무는 체온을 올린다. 그러면 체내에서는 수분과 이산화탄소가 팽창해서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압력을 만들게 된다. 이때 나무의 피부와도 같은 수피에 상처가 나면 수액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다.

내가 자란 경북 성주 시골 마을의 뒷산에는 고로쇠나무가 많이 산다. 어릴 때 나는 그 나무들의 생채기를 보며 자랐다. 살아 있는 나무껍질에 브이(V)자 모양이 아로새겨진 게 기이했다. 저게 뭐냐고 나를 그 뒷산으로 데려간 아빠에게 물었다. 나무 몸에 상처를 내 수액을 얻은 흔적이라는 답을 들었다. 아야 아야, 나무가 토해내는 통증의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나무의 피와도 같은 그 물을 우리는 귀한 약수라 부르며 벌컥벌컥 마신다.

4월 중순 고로쇠나무 새순 돋는 모습. 허태임

4월 중순 고로쇠나무 새순 돋는 모습. 허태임


뼈에 좋다고 ‘골리수’라는 별명 붙었지만…

고로쇠나무 수액을 채취하는 적기가 이 무렵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절기상 경칩 전후 일주일 사이에 얻은 것이 약효가 가장 뛰어나다. 언젠가부터 고로쇠나무는 골리수라는 별명도 생겼다. 뼈에 좋다고 선전을 하도 해서 ‘뼈에 이로운’(骨利) ‘물’(水) 또는 ‘나무’(樹)라는 것.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희뿌옇다. 맛은 밍밍한 편이다. 대략 당도는 2.5브릭스(brix) 정도. 브릭스는 과일이나 와인 같은 어떤 액체에 있는 당의 농도를 정하는 단위로, 독일 과학자 아돌프 브릭스가 제안했다. 제주 감귤 중 당도가 아주 높은 것은 13~15브릭스 정도 된다.

실제로 참 잔인하게 고로쇠나무 수액을 뽑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 부작용을 염려해서 정부는 어떤 지침을 만들고 단속까지 하게 됐다. 산림청이 고시한 ‘수액의 채취 및 관리 지침’에 따라 허락된 땅에서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물을 뽑아내야 한다. 적어도 사람 가슴높이직경이 10㎝가 넘는 제법 큰 나무에서 채취해야 한다. 그건 어부가 치어를 낚지 않는 것과 같은 뜻이리라. 성목의 고로쇠나무에 표피층만 살짝 닿을 정도 깊이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너비 0.8㎝ 이하 구멍을 뚫을 것, 그 가느다란 구멍에 호스를 연결하고 채집 봉투를 달아 하루 이틀 많게는 사흘 정도만 똑똑 수액을 모을 것, 그 물은 반드시 살균하고 소독한 뒤에야 시중에 유통할 것 등등. 그러한 조처에도 고로쇠나무 수액이 고가로 팔리자 불법 채취꾼들이 극성을 부린다. 그 대가로 1500만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 수도 있으니 고로쇠나무 수액은 정식으로 재배하는 농가의 제품을 제값 주고 사서 드시기를.

고로쇠나무보다 수액이 콸콸 더 많이 나오는 단풍나무류가 있다. 신나무다. 고로쇠나무 한 그루에서 하루 평균 약 2ℓ의 수액을 얻을 수 있다면, 신나무에서는 그 두 배에 이르는 수액이 나온다. 심어 기르지 않아도 신나무는 고로쇠나무보다 더 넓게 더 많이 국내에 산다. 수액을 먹을 수 있는 나무가 꼭 단풍나무 혈통만 있는 건 아니다. 가래나무,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삼나무, 자작나무, 층층나무, 헛개나무, 다래와 머루와 으름덩굴까지 색깔도 맛도 향도 더 다양하다.

1872년 제작된 채색 석판화 ‘메이플시럽 제조’(Maple Sugaring). 뉴욕에서 활동한 판화 회사 커리어 앤드 이브스(Currier & Ives)의 작품으로, 부제는 ‘북쪽 숲의 이른 봄( Early Spring in the Northern Woods)’이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1872년 제작된 채색 석판화 ‘메이플시럽 제조’(Maple Sugaring). 뉴욕에서 활동한 판화 회사 커리어 앤드 이브스(Currier & Ives)의 작품으로, 부제는 ‘북쪽 숲의 이른 봄( Early Spring in the Northern Woods)’이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1950년부터 성장이 줄어든 설탕단풍나무

수액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방법이 시럽을 만드는 거다. 그걸 굳혀서 고체 설탕을 만들기도 한다. 설탕단풍나무가 자라는 지역인 아메리카의 원주민은 아주 먼 과거부터 설탕단풍나무 수액으로 시럽과 설탕을 만들었다.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에게 메이플시럽은 엄청난 혁신이었다. 그 당시 영국이 통제하는 서인도제도에서 생산한 값비싼 사탕수수를 대체할 애국적이고 도덕적인 상품으로 여겨졌으니까. 사탕수수가 그 시럽보다 저렴해지기 시작한 1880년대까지 설탕단풍나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수액을 수집해 시럽으로 가공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정교해졌다.

설탕단풍나무도 고로쇠나무처럼 이맘때 비슷한 조건에서 수액을 만든다. 밤 기온은 영하, 낮 기온은 영상으로, 일교차가 10℃ 이상 날 때 액체의 생성이 가장 활발하다. 그런데 근 몇 년 사이 설탕단풍나무와 고로쇠나무 모두 수액을 덜 만든다. 그 두 나무를 재배하는 국내외 농가와 식물학계의 말은 서로 일치한다. 그건 기후변화 탓이라고. 겨우내 쌓인 눈이 봄이 와도 잔설로 남아 아주 서서히 녹을 때 나무는 땅속 수분을 계속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때가 이르게 토양 온도가 올라가면 적설은 서둘러 사라진다. 눈도 비도 오지 않는 가문 봄날이 연속되면 메마른 땅을 딛고 선 나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양분을 만들 에너지는 일찍 소모되고 만다. 건조한 기간이 더 장기간 이어지면 나무의 성장은 눈에 띄게 감소한다.

설탕단풍나무는 200년 넘게 산다. 자기 생애를 나이테에 촘촘히 새기면서 말이다. 나이테, 그러니까 연륜을 분석하면 나무 저마다의 성장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캐나다 식물학자들은 수십 년부터 수 세기에 걸쳐 설탕단풍나무가 만든 나이테를 보고 그 나무들의 성장이 1950년부터 두드러지게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2023년 발표했다. 산업화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를 기점으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이 나무의 나이테에 드러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나무가 예전처럼 자랄 수 있도록 잘 좀 살피고 돌보자는 제언도 한다. 당장 우리만이 아니라 다음과 그다음 세대,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자며.

캐나다에서는 이 무렵 여러 고장에서 메이플시럽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름드리 고목에서 직접 수액을 받아 솥을 걸고 끓여 시럽을 만든다. 그 체험을 통해 설탕단풍나무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될 것이다. 국내 각 지방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우후죽순 ‘고로쇠나무약수축제’라는 걸 연다. 약수에 대한 기대보다 나무 입장에서 생각해볼 기회를 그와 같은 축제에서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로쇠나무 꽃. 4월 초순 겨울눈을 뚫고 잎보다 먼저 나온다. 꽃 한 송이는 투명한 섬유질의 꽃잎 다섯 장이 붙은 별 모양이다. 여러 송이가 모여 은은한 향기를 낸다. 고로쇠나무는 벌이 꿀을 빨아 오는 원천이 되는 밀원수다. 허태임

고로쇠나무 꽃. 4월 초순 겨울눈을 뚫고 잎보다 먼저 나온다. 꽃 한 송이는 투명한 섬유질의 꽃잎 다섯 장이 붙은 별 모양이다. 여러 송이가 모여 은은한 향기를 낸다. 고로쇠나무는 벌이 꿀을 빨아 오는 원천이 되는 밀원수다. 허태임


설탕단풍나무는 영어로 슈거메이플이다. 고로쇠나무는 ‘빛깔메이플’(painted maple). 단맛보다도 단풍이 너무 예뻐서 그런 이름이 붙었으리라. 가을이 깊어질수록 고로쇠나무는 연노랑부터 짙은 주황까지 고혹할 만한 단풍을 내뿜는다. 붉은 단풍나무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최근 들어 중국은 단풍으로서 고로쇠나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와 관련한 연구에 집중한다. 단풍의 색을 결정하는 유전인자를 더 치밀하게 분석하는 이유는 조경수나 정원수로 이용될 가치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파브르가 말한 ‘식물에 생명을 주는 피’

고로쇠나무에서 실로 돋보이는 건 꽃이다. 겨울눈을 뚫고 나온 새 가지 끝에 4월 초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황록색 꽃 여러 송이가 모여 마치 소인국의 꽃다발처럼 핀다. 들여다보면 꽃 한 송이는 투명한 막질의 꽃잎 다섯 장이 붙은 별 모양이다. 은은한 향기가 난다. 그 꽃을 방문하는 이른 봄 벌들의 반응이 엄청나다. 꽃을 만들기 위해 나무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던가. 그러니 사람이 취하는 수액은 자연에 좀 양보해도 되지 않나 싶다. 이런 생각은 나보다 프랑스의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가 훨씬 먼저 했다.

파브르는 곤충 연구에 앞서 식물을 먼저 팠다. <파브르 식물기>가 나온 건 <파브르 곤충기> 집필을 시작하기 몇 해 전인 1876년의 일이다. 그 책에서 파브르는 수액을 두고 이렇게 썼다. “수액은 열매와 나뭇가지와 잎과 꽃, 수피와 눈의 재료다. 저 자양액은 식물에 생명을 주는 피다. 수액은 눈으로 보기에 전혀 특별한 점이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은 전부다. 대자연의 젖줄이다. 식물은 직접, 동물은 식물을 통해서 사실상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가 이 풍성한 개울에서 양분을 빨아들인다.”

고로쇠나무가 사는 깊은 산 협곡의 물줄기는 아직 꽝꽝 얼어 있다. 물이 먼저 풀린 곳은 나무의 속이다. 생명이 움트는 봄이 나는 이들 나무의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정확하게는 체관과 물관을 타고 지금 이 순간 온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는 저기 저 나무의 수액으로부터.

글·사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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