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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야구 우상님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레전드, 정점의 순간 한국 최초로 ‘은퇴 선언’한 김재현 선수
등록 2022-09-20 11:08 수정 2022-09-20 23:41
2010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에스케이(SK) 김재현이 1루타를 때린 뒤 관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에스케이(SK) 김재현이 1루타를 때린 뒤 관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케이비오(KBO)리그 40주년 기념 ‘40인 레전드’ 발표가 2022년 9월19일 마무리된다. 안타깝게도 나의 야구 우상은 40인에 들지 못했다. ‘아차상’쯤 되는 41~50위에는 들었을까. 하긴 순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레전드니까.

1994년 KBO리그에는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엘지(LG) 트윈스가 몰고 온 ‘신바람’이었다. 엘지는 투타 조화 속에 정규리그 1위를 비롯해 한국시리즈도 우승했다. 팀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이들은 신인 3인방이었다.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이 그들이었다. 야구장에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넘쳐났다. 관중석에는 펼침막도 등장했다. 야구단에는 팬레터가 쏟아졌다. 김재현에 따르면 당시 구단 직원이 한 자루만큼의 팬레터를 갖다주고는 했다고 한다. 단언컨대 이들 3인방의 활약은 리그 인기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대수술 상황에서도 날린 적시타

당시 나의 우상은 김재현이었다. 역대 고졸 신인 최고 계약금(9100만원)을 받고 엘지에 입단한 그는 ‘꽃미남’ 같은 외모뿐만 아니라 야구 스타일도 시원시원했다. 빠른 배트 스피드에 따른 쭉 뻗는 타구 궤적으로 ‘캐넌 히터’라는 별명이 생겼다. 신인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에도 들었다. 데뷔 첫해 성적은 타율 0.289, 21홈런 80타점 21도루. 하지만 신인왕은 차지하지 못했다. 대기록을 작성한 터라 수상이 유력해 보였는데 한 지붕 아래의 유지현(타율 0.305, 15홈런 51타점 109득점)에게 밀렸다. 유지현의 포지션이 궂은일을 많이 하는 유격수라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것도 같다. 그래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차지했다.

19살에 강한 임팩트로 박수받으며 KBO리그에 이름을 알린 김재현은 여러 차례 시련을 맞았다. 신장염으로 1997시즌을 걸렀고, 고질적인 고관절 통증도 내내 그를 괴롭혔다. 2002년에는 희비가 교차했다. 98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0.334(296타수 99안타), 16홈런 61타점의 빼어난 성적을 냈지만 고관절 부상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희소병인 고관절 무혈괴사증(골반에 피가 통하지 않아 관절이 파괴되는 병)으로 대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는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6회초 2사 1, 2루에서 대타로 나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성 타구를 날렸다. 몸 상태 때문에 제대로 뛸 수 없던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1루 베이스를 밟은 뒤 환하게 웃었다.

‘경기 중 쓰러져도 구단 책임 없다’는 각서를 쓰고

시즌 뒤 양쪽 고관절 수술을 받고서 김재현은 재활의 시간을 보냈다. 야구단 안팎으로 부정적 의견이 많았다. “야구선수로 계속 뛰면 걷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는 전문가도 있었다. 그 또한 반신반의했다. 선수 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김재현은 결국 “경기 중 쓰러져도 구단 책임은 없다”라는 각서를 요구하는 엘지에 맞서 자유계약(FA)으로 에스케이(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로 팀을 옮겼다. 스트라이프(줄무늬) 유니폼과의 작별이었다.

이적 첫해 김재현은 타율 0.315, 19홈런 77타점으로 건재함을 알렸다. 리그 타율 4위, 출루율 1위(0.445)의 성적으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따냈다. 2006년 말 김성근 감독이 에스케이 사령탑으로 취임한 뒤에는 더그아웃 리더가 됐다. 2007시즌 정규리그 때는 데뷔 처음 1할대 타격(0.196)에 머물렀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 0.348, 2홈런 4타점의 활약으로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상대팀 두산 베어스에 1, 2차전을 내주고 반격을 가하는 데 그는 선봉장으로 나섰다. 2007 한국시리즈는 신인 투수 김광현과 함께 김재현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2008시즌 우승 뒤 2009시즌의 준우승. 한국시리즈 7차전 6회초까지 5-1로 앞서다가 동점을 허용하고 나지완(KIA 타이거즈)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을 내준 2009시즌은 아쉬움이 특히 컸다. 준우승과 함께 계속 회자된 것은 미디어데이 때 김재현이 한 발언이다. 그는 “2010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은퇴 예고였다. 그즈음이었을까. 김재현은 방망이도 짧게 잡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출루해서 팀에 보탬이 되려 했다.

2010년 에스케이는 전년도 준우승의 눈물을 달래며 4전 전승으로 최정상에 다시 섰다. 김재현의 시즌 성적은 타율 0.288, 10홈런 48타점. 그의 나이(당시 35살)를 고려하면 충분히 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다. 은퇴 번복은 없었다. 정점의 순간에 야구라는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온 김재현이 은퇴 당시 했던 말은 이랬다. “만약 팀과 재계약하고 2~3년 더 뛰었다면 10억원 정도는 더 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이 아니다. 일단 힘이 있을 때, 잘나갈 때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후배들에게 길도 터줘야 한다.”

예민한 성격에 불면의 밤을 자주 보내고, 은퇴까지 생각했던 대수술 뒤에는 양쪽 고관절에 남몰래 실리콘 재질의 패치를 붙이고 타석에 섰던 그였다. 초라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한 타석, 한 타석에 최선을 다했던 그이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 그의 커리어는 우승으로 시작해서 우승으로 끝났다. 박수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박수받으며 당당하게 퇴장했다. 통산 성적(타율 0.294, 201홈런 939타점)과 별개로 그는 진짜 야구를 했다. 희로애락을 품은 그런 야구. 김재현은 현재 케이블 스포츠 채널 스포티브이(SPOTV) 해설위원으로 있다. 2020 도쿄올림픽 야구 대표팀 타격코치로도 뛰었다.

그 시절 좋아했던 선수들이 잘 풀렸으면

내가 한때 좋아했던 야구선수들은 지금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그들의 인생이 삐걱대면 그들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삐걱대는 것 같다. 그들이 은퇴하면 나의 한 시대도 저무는 듯하다. 그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달까.

야구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야구팬이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그들의 야구 우상도 탄생할 것이다. 우상답게, 우상다운 행동으로 차후 레전드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한때 ○○○ 좋아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내가 지금도 당당하게 “김재현이 내 우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40인 레전드’에 선정되고도 당당할 수 없는 이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야구가 뭐라고> 저자

*‘인생 뭐, 야구’ 시즌2를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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