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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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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만에 양성되는 진술분석전문가

진술의 참과 거짓 판별 능력 의심스러워
등록 2020-01-01 13:50 수정 2020-05-03 04:29
2019년 11월23일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 참석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

2019년 11월23일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 참석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

한 여성이 출산했다. 자신도 가족도 모르는 사이에 산모가 되었다. 가족은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추궁했고 여성은 울면서 자신의 휴대전화 연락처 속 한 남자를 지목했다. 길을 걷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졸졸 쫓아오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조르더니 거절하는 자신을 빌라 주차장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피해 여성의 휴대전화에 그 남자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이유는 뭘까? 범행 뒤 휴대전화를 빼앗더니 남자가 전화번호를 입력해주고 떠났다는 게 여성의 설명이었다. 가족은 남자를 강간 혐의로 신고했다.

수사 당국은 피고인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남성은 혐의를 부인했다. ‘모바일 채팅 앱에서 만나 몇 주간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다 합의하에 자신의 집에서 단 한 번 성관계했을 뿐이고, 피임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여성이 임신했을 리도 없다’는 것이 남성의 주장이었다.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하는 이상 강간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여성의 진술뿐이었다.

성폭행 증거는 피해자 진술뿐

성폭력 사건은 목격자나 폐회로티브이(CCTV)가 없는 은밀한 상황에서 벌어지곤 한다. 피해자가 신고를 망설이면 신고 시점에는 가해자의 정액, 침 같은 디엔에이(DNA) 증거가 모두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범행을 입증할 증거는 피해자 진술밖에 남지 않는다. 피해자 진술 이외의 증거를 까다롭게 요구하면 성폭력 범죄 처벌이 힘들어지는 구조적인 이유다.

이 사건에서 성폭행을 주장한 여성은 지적장애인이었다. 피해자가 지적·정신적 장애인이거나 어린이인 성폭력 범죄의 경우 우연한 기회에 이를 감지한 가족의 신고로 수사가 개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범행으로부터 길게는 십수년이 지나 수사하다보니 제대로 된 증거가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오래전 일을 피해자가 정확히 진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성폭행범이 범행 뒤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자리를 떴다’는 주장 정도면 구체적인 진술이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는 점이 뭔가 찜찜하지만, 어쨌든 성폭력 사실은 분명히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입장도 살펴봐야 한다. 수개월 전 혹은 십수년 전 일을 떠올리는 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 역시 사라져 있기 일쑤라, 방어 방법이라고는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없다. 피해자 진술에서 이치에 닿지 않는 부분을 찾아냈는데도 피해자의 장애(나이)를 고려하면 그 정도 오류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면, 재판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딜레마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과학수사였다. 경찰은 2010년 진술분석전문가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전문가가 장애인의 진술을 듣고 과학적인 기법을 사용해 그 진위를 판별한다는 이 수사기법은 이제는 피해자가 지적장애가 있거나 어린이인 경우 필수적으로 등장하다시피 한다. 이 사건 역시 그랬다. 수사기관은 여성의 진술을 진술분석전문가에게 맡겼고, 여성의 진술을 분석한 전문가는 ‘진술에 신빙성이 인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사는 결국 장애인을 성폭행한 혐의를 적용해 남성을 기소했다.

진술분석전문가 교육 내용 안내 문서.

진술분석전문가 교육 내용 안내 문서.

진술분석전문가 자격요건 허술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여러 근거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DNA 검사 결과였다. 애초 이 사건의 발단은 여성의 출산에서 비롯됐는데, 태어난 아이와 남성의 DNA는 불일치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와 별개로 여성의 진술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사실로 놓고 되짚어보면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채는 능력이 현실에 존재하긴 한 걸까.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면 당장 전국의 판사들을 이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기득권층인 법조인들이 과학기술에 저항하는 걸까?

진술분석전문가가 양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경찰은 진술분석전문가 인력풀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 인력풀에 들어가려면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 경찰청에서 배포한 2017년도 진술분석전문가 선발공고에서 요구한 자격요건은 ‘정신건강의학, 심리학(범죄, 임상, 발달, 상담 등), 사회복지학, 교육학, 아동학, 특수교육학, 아동·장애인 관련 전공’과 적어도 1년 이상 ‘성폭력 상담소 등 전문기관 종사자, 아동 또는 장애인 심리상담 또는 심리평가 등’의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다. 정신건강의학·심리학·특수교육학 등은 그렇다 쳐도, 사회복지학·교육학·아동학과와 피해자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능력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1년 이상 성폭력 상담소 등에 근무하면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능력이 생기는지도 의문스럽다.

진술분석전문가가 선발된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서류전형 합격자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이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애초 선발 단계에서 진술분석 능력이 있는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선발한 뒤 4박5일간 강의해 SVA, CBCA 같은 진술분석기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1종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시간보다 결코 많다 할 수 없는 시간을 거쳐 진술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양성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진술분석에 근거해 유죄판결이 선고된 건은 몇 건인가. 이 글을 준비하며 통계를 구해보려 했으나 과문한 탓인지 구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장애인이나 어린이가 피해자인 성범죄 사건의 가해자를 변호하면서 진술분석전문가들이 피해자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화성 수사’ 과거완료형 문제일까

이춘재가 화성 8차 사건의 진범을 자처하고 나선 이후, 애초 윤아무개씨를 범인으로 지목해 무기징역형을 받게 한 수사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와중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감정 결과를 조작했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서 과연 이것이 ‘과거완료형’ 문제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과학적이지만 이를 사용하는 사람은 꽤나 자주 비과학적인 것이 아닐까?(사족: SVA, CBCA 기법 자체의 신빙성에 대한 비판도 많다.)

*이번호를 끝으로 ‘신민영의 확신의 오류’ 연재를 마칩니다. 사랑해주신 독자들께 감사합니다.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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