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010년 이후 연쇄살인범이 없는 이유?

연쇄살인범들 모두 2009년 이전 검거,

연쇄살인범이 되기 전에 범인을 검거한 훌륭한 과학기법은
등록 2019-12-12 02:07 수정 2020-05-02 19:29
길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 연합뉴스

길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 연합뉴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연쇄살인범들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이들은 하나같이 2010년 이전에 검거되었다. 총 9명을 무참히 살해한 정두영은 2000년에,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 마사지사 여성 등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2004년에,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정남규는 2006년에, 자신의 처와 장모를 비롯한 총 9명의 여성을 살해한 강호순은 2009년에 검거되었다. 2010년대 이후에도 사람들을 분노케 한 살인사건은 많았지만 적어도 연쇄살인범이라 할 만한 자는 없었다. 잘 기억해보면 2009년에 검거된 강호순 뒤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없었다.

8만6400시간 녹화 화면에서 범인을 찾아라

2010년대 들어 한국에서 연쇄살인범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그 이유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적은 없어 조심스럽지만, 감히 주장하자면 살인범이 연쇄살인범이 되기 전에 붙잡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있다. 2014년 서울 강서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 검거 과정은 강력범죄 수사에 CCTV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2014년 봄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건물에서 모 건설사 대표가 칼에 수차례 찔려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범행 현장에는 범인을 특정할 만한 증거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범행에 쓰인 칼에서는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어 범인의 정체를 도무지 알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자와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당일 행적도 살펴보았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이 상황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겠는가?

라는 책이 있다. 비슷비슷한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가득 찬 그림에서 주인공 월리를 찾아내야 하는 이 숨은그림찾기 책은 세계적으로 650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경찰이 범인을 찾기 위해 택한 방식은 이 ‘월리를 찾아서’와 유사했다.

경찰은 사건 현장 근처에 있는 120개의 CCTV 녹화 화면을 확보했다. 그리고 인력을 총동원해서 녹화 화면을 분석했다. 녹화 화면을 돌려 보는 일은 시간이 엄청나게 투여된다. 120개 CCTV에서 촬영된 한 달 분량의 화면은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총 8만6400시간이 소요된다. 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본다 치면 대략 29년이 걸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하는 장면이 있는 경우 이 장면을 찾기 위해 화면을 앞뒤로 돌려 봐야 해서 보통 한 시간짜리 영상이면 적어도 두 배의 시간이 든다. (여담이지만, 내게 사건을 의뢰한 의뢰인이 녹화된 파일을 그저 던져주면서 ‘여기에 증거가 다 들어 있으니 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외치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경찰은 결국 자전거를 타고 사건 현장 일대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남자를 찾아냈고, 이 남자가 사건 발생 며칠 전부터 꾸준히 현장 근처에 나타난 것을 근거로 용의자로 지목했다. 얼마나 많은 노고와 시간이 투입되었을지는 를 즐겨 본 독자라면 능히 짐작할 것이다.

조이트로프 영화처럼

하지만 그뿐. 경찰은 찾아낸 ‘월리’의 정체가 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의 얼굴로 그가 누군지를 밝혀주는 안면인식기술은 이 글을 쓰는 2019년 현재에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 경찰이 택한 방법은 또 한 번의 ‘월리를 찾아라’였다. 경찰은 120개 CCTV를 다시 돌려 본 끝에 ‘월리’가 근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사용하는 장면을 포착했고, ATM 사용 내역을 다시 샅샅이 뒤진 끝에 범인을 찾아냈다. 사건 발생에서 6개월여가 지난 뒤였다.

이 사건이 2010년 이전에 발생했다면 사건 현장과 피해자 주변에서 단서를 찾지 못한 그 지점에서 수사가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 강서구는 2010년부터 방범용 CCTV 구축 사업을 시작했고, 경찰은 사건 인근에 설치된 CCTV 전부를 뒤진 끝에 범인을 잡아낼 수 있었다.

2019년 현재 시점에 다른 강력범죄 수사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새는 관공서가 설치한 방범용 CCTV뿐만 아니라 개인이 설치한 CCTV, 차 안에 있는 블랙박스, 심지어 사건 현장 인근을 돌아다니는 노선버스 실내에 설치된 CCTV까지 활용해 범인을 잡아낸다. 내가 변호를 맡았던 한 편의점 강도 사건에서 경찰은 범인이 도망가는 경로에 있는 CCTV, 블랙박스를 모두 확보해 화면 속 범인의 사진을 이어붙이다시피 했다. 흡사 조이트로프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에 사용된, 착시 원리를 활용한 많은 애니메이션 장난감 같았다. 책에 그림 여러 장을 그리고 책장을 빨리 넘기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인데, 이 장치는 이러한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강력사건이 벌어질 때면 새로운 과학수사 기법이 범인 검거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이들 과학수사 기법이 얼마나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되는지는 늘 회의적이다. 요새 각광받는 프로파일링만 해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검거 전에 했던 범인 예측과 실제 검거된 범인이 얼마나 들어맞았는지를 분석해봤는데 그 결과는 자못 실망스러웠다(언젠가 이 지면을 빌려 분석 결과를 소개하고, 프로파일링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해볼 계획이다).

전국 곳곳에 카메라가 가득 찬 지금, 오직 범인 검거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CCTV만큼 큰 역할을 한 과학수사 기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일선 경찰의 열정과 수고는 시대가 바뀐 지금에도 범죄 억제에 가장 중요한 일등 공신이다.

CCTV만큼 훌륭한 과학수사 기법은 없다

누군가 내게 가장 재미있게 본 법정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라 답할 것이다. 영화 내내 법정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를 최고의 법정물로 꼽는 이유는, 형사 절차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편향과 논쟁을 두루 녹여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수사는 발로 뛰는 것이라는 시골 형사(송강호)와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서울 형사(김상경)가 논쟁을 벌이는데, 영화를 볼 때는 웃고 넘겼던 시골 형사의 대사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미국엔 말이야 에프비아이(FBI·연방수사국)라고 있어, FBI. 그 새끼들 수사하는 거 보면 어떻게 하는지 알어? 대가리를 존나게 굴려. 왜 그런 줄 알어? 씨발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하거든…. 근데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말이야, 이 두 발로 몇 발짝 뛰다보면 다 밟혀. 다 밟히게 돼 있다고.”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