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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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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인성과 원빈을 닮았다

비교할 수 없는 모호한 말 ‘유사하다’…

모발비교법이 억울한 사람 잡아넣은 사연
등록 2019-10-23 11:39 수정 2020-05-03 04:29
ㅠ

이 글 근처 어딘가에 내 얼굴 캐리커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조인성을 더 닮았나? 아니면 원빈을 더 닮았나? 참으로 고약하지만 분명 답은 있는 질문이다. 둘 중 한 명은 나랑 더 닮기는 했다. 요절복통할 만한 이 상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독자들의 답변을 바탕으로 ‘조인성(혹은 원빈) 닮은 변호사’라고 떠들고 다니면 어떻겠는가.

화성 8차, 체모가 ‘형태학적으로 유사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살인범으로 지목됐던 윤아무개씨 역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농담이래도 참 받아치기 어려운 농담일 텐데 윤씨는 일생일대 가장 슬픈 순간- 살인범으로 몰린 순간- 에 가슴 답답해지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체모가 형태학적으로 윤씨의 체모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윤씨를 몰아붙였다. ‘사건 현장에서 꼬불꼬불한 털이 발견됐는데 너의 것이랑 아주 유사하다’라는 말에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유사하다’는 말만큼 모호한 게 없다. ‘유사하다’는 말은 함께 주어진 대조군의 크기와 디자인에 따라 그 의미가 요동친다.

나와 원빈 사진에 한 장의 사진- 피부색이 다르거나 성별이 다른 그 누군가. 예를 들어 비욘세- 을 더 추가한다면 나와 원빈이 유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반대로 비욘세 사진 대신 내 아버지의 젊을 때 사진을 추가한다면 나와 원빈이 유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전무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사하다’는 유의 판정이 신뢰성을 얻으려면 전체 인구집단의 충분한 통계 분석이 있어야 하고, ‘유사하다’는 분명하지 않은 표현 대신 ‘인구 전체 중 단면이 별 모양인 체모를 가진 사람은 0.01%인데 사건에서 발견된 체모와 용의자 체모의 단면 모두 별 모양이었다’는 표현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연구가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글 서두에서 ‘내가 원빈을 닮았다’는 결론에 이른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통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 8차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가 윤씨와 ‘형태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모발비교법(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형태를 용의자의 것과 비교하는 기법)은 DNA 분석 기법이 도입되기 전까지 미국에서도 빈번하게 쓰였다. 지난 연재에서 성폭행범으로 억울하게 몰렸던 게리 돗슨 사례를 소개했다. 돗슨의 재판에서도 법‘과학자’가 증인으로 나서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돗슨의 머리카락과 “일치한다”고 증언했다. 결국 돗슨은 최소 25년형, 최대 50년형을 받았다. 그는 DNA 검사로 결백이 밝혀질 때까지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DNA 검사가 도입된 뒤 미국 재소자들의 재심 청구가 이어졌다. 이 중 362건이 오판으로 밝혀졌는데, 이 중 29건은 모발비교법에 기초해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통계적 뒷받침도, 통일된 표준도 없이

모발비교법의 문제점은 과연 열심히 통계 수집을 안 한 수준의 문제일까?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과학기술한림원쯤에 해당하는,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서 2009년 기념비적인 연구보고서를 펴냈다. ‘과학수사 개혁’(Strengthening Forensic Science in the United States)쯤으로 번역되는 이 연구보고서는 모발비교법도 분석했는데 그 결과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모발비교법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과학’이라는 말에 지레 얼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모발비교법의 발상 자체가 좀 이상하다. 당장 내 머리카락만 해도 점점 가늘어지는 정수리의 머리털과 여전히 뻣뻣한 뒷머리털이 전혀 딴판으로 생겼다. 하지만 형태가 다르니 둘은 다른 사람의 머리털인가? ‘체모 형태가 다르면 다른 사람이고 같으면 같은 사람이다’. 기본 전제부터 의심이 든다.

보고서에 따르면 모발비교법의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앞에서 지적했듯 통계적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인구 중 혈액형이 A형이나 O형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어느 정도 통계가 수집돼 있다. 하지만 체모가 매끈한지 거친지, 어떤 색깔인지 같은 특징의 빈도는 어디에서도 연구된 바 없다. “체모의 어떤 특징이 인구 중에 얼마나 분포하는지 과학적으로 타당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보고서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치’를 선언하기 전에 체모의 몇 가지 특징이 일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일된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모발비교법의 문제점으로 이 사항을 지적했는데, 완곡하게 표현한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동안 분석관들 각자가 주관적으로 일치 여부를 판단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과학수사 기법이 사용된 것일까. 과학수사 기법이 엄정한 검증 과정을 거쳐 일선에서 사용될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형사소송법 어디를 찾아봐도 어떤 기법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 어떤 검증 절차를 거쳐야 사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규정은 없다.

형사소송법 제169조(감정) 법원은 학식 경험 있는 자에게 감정을 명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자유심증주의)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
나는 졸리니까 졸립다?

도대체 ‘학식 경험 있는 자’란 무슨 뜻일까. 그 의미가 궁금해 대법원 판결을 찾아봤다. “형사소송법상 감정은 특정한 분야에 특별한 학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학식과 경험에 의하여 알고 있거나 또는 그 전문적 학식과 경험에 의하여 얻은 일정한 원리 또는 판단을 법원에 진술 보고케 하는 증거 방법이므로 감정인은 그 감정에 필요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되고”(대법원 83도2266)가 전부였다. ‘학식 경험 있는 자’란 ‘그 감정에 필요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이란 건데 ‘나는 졸리니까 졸립다’란 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허점을 틈타, 과학적으로 의심스러운 수사기법이 일선에서 사용됐고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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