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총 10차례 벌어졌다. 이 중 여덟 번째는 다른 사건과 달리 모방범의 소행으로 지목됐는데 나름 합리적인 설명이 있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는 범인의 시그니처라고 할 만한 수법이 있었다.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리고 두 손을 결박한 것이다. 피해자 목을 조른 것은 나머지 사건들과 동일했지만 8차 사건에는 이런 특징이 없었다. 또한 실외에서 벌어진 다른 사건과 달리, 8차 사건 피해자는 자신의 집 방 안에서 잠자다 살해됐다.
경찰은 ‘최첨단’ 분석법 홍보‘모방범’의 정체는 일찍 드러났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를 발견하고 일본에 분석을 맡겼는데, 이 음모에는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 원소가 들어 있었다.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경찰은 인근 공단 지역 노동자를 범인으로 추론했다. 결국 피해자 오빠의 친구인 용접공 윤아무개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당시 경찰은 최첨단 ‘방사성동위원소 분석법’을 썼다고 홍보했다).
윤씨는 ‘피해자 오빠와 친구인 것은 맞지만 피해자는 본 적조차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지만, 경찰은 윤씨 혐의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좁혀갔다. 거짓말탐지기는 윤씨의 결백 주장이 거짓이라 판정했다. 경찰은 음모 검사와 거짓말탐지 결과로 압박한 끝에 윤씨의 자백을 얻어낼 수 있 었다.
이후 윤씨는 입장을 번복해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법원은 윤씨의 살인 혐의를 인정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고, 윤씨는 그로부터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에야 가석방됐다. 윤씨가 출소 뒤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아마 윤씨는 출소 뒤 3년이 지난 2012년 무렵 전자발찌를 착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해에 성범죄·강력범죄 전력자에게도 소급해 전자발찌를 채우는 법안에 대한 합헌 결정이 있었는데, 세기의 사건인 화성 연쇄살인 장본인에게 전자발찌가 피해갔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살인범이던 윤씨도 10년을 선고받았을 테니 글을 쓰는 지금(2019년 10월)도 전자발찌를 차고 있을 것이다.
과연 윤씨에 대한 일련의 사법 판단은 옳았을까. 2019년 9월, 공소시효를 넘기도록 범인을 찾지 못했던 나머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발견되면서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찰은 5차(1987년), 7차(1988년), 9차(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디엔에이(DNA)를 재소자 DNA와 대조했다. 그 결과는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이춘재의 DNA와 동일했다. 이춘재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모두를 자백했는데, 이 과정에서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역시 자신이 저질렀다고 했다. 이춘재의 자백일 뿐 아직 아무것도 없는 단계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지 걱정스럽다. 이미 30년 전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6살 소녀 캐슬린 크로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찢긴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주변을 돌던 경찰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차 한 대가 갑자기 와서 멈추더니, 젊은 남자 세 명이 앞을 가로막았어요. 그중 두 명이 저를 차 뒷자리로 밀어넣고 한 사람은 앞자리에 앉았고, 다른 사람은 제 옷을 찢고는 저를 강간했어요. 그리고 깨진 맥주병으로 제 배에 글자를 그어대기까지 했어요.”
8년 뒤 대반전경찰은 인근 병원으로 크로웰을 이송했다. 그녀의 몸에서 범인 것으로 보이는 정액이 검출됐으나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경찰은 꾸덕꾸덕 말라버린 소량의 정액을 채취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건 냉동 보관이 전부였다. 사건 당시(1977년)에는 DNA 지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정액 상태가 좋았던들 범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게리 돗슨은 범행을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피해자 크로웰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의 범행을 입증하는 과학 증거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크로웰 속옷에서는 범인 것으로 보이는 체모가 발견됐다. 모발비교분석법(Hair Analysis)으로 분석해보니, 게리 돗슨과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돗슨은 단기 25년, 장기 5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됐다.
8년이 지난 1985년 대반전이 일어났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양심선언이 터져나왔는데 다름 아닌 피해자인 크로웰에게서 나왔다. 남자친구와 성관계 뒤 임신이 걱정됐던 크로웰이 양부모의 꾸중을 피하려 성폭행 사건을 꾸몄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래도 돗슨은 감옥에서 나올 수 없었다. 재판부가 크로웰의 양심고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크로웰이 했던 진술은 사건을 실제 겪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깨진 맥주병으로 배에 글씨를 썼다는 얘기를 과연 지어낼 수 있을까. 정신적 충격이 심했던 크로웰이 사건 자체를 잊고 싶어 기억을 왜곡했다고 보는 게 차라리 상식적이었다. 게다가 모발비교분석법이라는 과학 증거까지 있는 상황 아닌가.
1988년 법조 역사는 바뀌고 말았다. 3년 전 세상에 탄생한 DNA 분석 기법으로 말라버린 정액을 검사했고 해당 정액이 사건 당시 크로웰의 남자친구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꽤 컸다. 이를 기점으로 재소자들의 DNA 검사 요구가 빗발쳤다. 이후 DNA 검사로 362건 넘는 오판이 발견됐다. ‘362’라는 숫자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 기준으로 연간 26만 건(2017년 기준) 넘는 형사재판이 이루어진다. 몇 년에 걸친 형사재판 가운데 고작 362건이면 꽤 봐줄 만한 오류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DNA 검사가 가능했던 사건은 극히 일부였다. 일단 형사사건 중 DNA 증거가 있는 것은 체액이 등장하는 성폭행이나 살인 같은 중대 폭력 사건뿐이다. 게다가 재판 이후에도 DNA 시료가 무사히 보관돼야 하는데 이런 좁은 문을 통과한 사건 중 362건이 오판이었다면 그 수치는 결코 작지 않다. 숨겨진 오판은 더 많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살인범 중 전갈자리가 많다?오판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미국에선 이것을 분석했는데, 충격적인 사실은 오판으로 밝혀진 사건 중 74%(250건이 밝혀진 시점에서 185건)에 과학수사 기법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사람은 거짓말할 수 있다지만 과학이 거짓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랬다. 별자리 운세(살인범 가운데 탄생 별자리가 전갈자리인 경우가 많으니, 전갈자리 탄생자가 살인사건 용의자일 확률이 높다) 수준의 기법이 검증도 없이 수사에 쓰여 억울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진범은 활개 치고 돌아다니게 했던 것이다.
윤씨를 화성 연쇄살인 사건 8차의 범인으로 몰았던 거짓말탐지기, (나름의) 프로파일링은 여전히 현실 수사에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근거가 의심스러운 방사성동위원소 분석법 같은 점성술 수준의 기법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윤씨 사건에 쓰였던 수사법의 문제는 무엇이고, 지금도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과학수사 기법은 뭘까? 앞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다.
*필자는 저자이자, 예현 법무법인 변호사다. 남들이 포기한 사건, 패색이 짙은 사건을 되살리는 데 힘쓰고 있으며, 형사 사법 절차 개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확신의 오류’ 기획연재를 통해, 필자는 과학수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고전적인 과학수사 방법인 거짓말탐지기, 필적감정, 목소리 성분분석, 진술 분석 등부터 CCTV, 사이코패스 테스트, 시신 부검, 프로파일링까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진실과 얼마나 부합할까. 과학이란 이름 속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건들을 분석하며 과학수사의 현주소와 맹점 등을 파헤칠 예정이다.신민영 변호사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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