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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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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뱅이 먹고 살아난 캐리

몸이 아파 팔지 못해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개
등록 2019-05-09 11:28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나는 스물두 살 겨울 장티푸스에 걸려 몇 달을 앓아누운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보니 창호지 문살 위 세 칸에 해가 비치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오후 3시인데, 내일 오후 3시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작은 문살 세 칸에 해가 비추는 것이 보입니다. 다행입니다. 하고 싶던 공부도 할 수 없었고, 여태껏 살면서 한 일도 없고 살아야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지금 죽는 것이 아주 다행스럽고 행복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아주 넓은 비포장도로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꽃가마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나만 파란 한복을 입고 구경했는데 눈 한번 깜빡하고 떴더니 그 많은 사람이 하얀 꽃가마를 타고 하늘 저 멀리 떠가고 있었습니다. 나만 못 간 것이 억울해서 내 복에 꽃가마도 못 타고 갔다고 통곡했습니다.

아주 높이 뛰는 ‘높이’와 기어다니는 ‘캐리’

혼수상태에서 열흘 만에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꽃가마가 아니라 행상이었습니다.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살아나서 보니 열심히 잘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머리가 홀라당 다 빠진 괴상한 몰골로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시작한 봄이었습니다. 친척집이 시내로 이사하면서 강아지 두 마리를 우리 집에 주었습니다. 누런색 다리가 길고 눈이 유난히도 동그란 수놈과 예쁘기는 한데 비실비실한 암놈을 주고 갔습니다. 수놈은 다리가 엇청한 것이 높게 생겨서 ‘높이’고 암놈의 이름은 ‘캐리’라고 합니다. 이미 워리라는 개도 키우고 있지만 거저 주고 간다니까 한여름 키워서 팔면 되지 하고 받아놓았습니다.

밥을 주자 높이가 캐리한테 슬금슬금 다가가더니 캐리를 쓰윽 밀어제치고 캐리의 밥을 먹어치웁니다. “높이 너 아주 못된 버릇을 하는구나. 둘이 같이 왔으면 잘 지내야지 무슨 짓이나.” 밥을 주고 지키지 않으면 캐리는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습니다. 캐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뒷발이 뒤틀려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할머니는 “그러다가 낫겠지, 개 병신은 없단다” 하십니다.

높이는 밥을 많이 먹어서인지 눈에 보이게 잘 자랍니다. 이제 캐리는 자기 혼자서는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밥도 수저로 떠넣어줘야 겨우 먹을 수 있습니다. 밤이면 캐리를 부엌에 자리 깔고 들여다 재웁니다. 그저 놓아두면 그 자리에서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꼼짝도 못해, 사람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똥오줌을 그 자리에 그대로 싸고 뭉갭니다. 캐리는 무슨 벌레처럼 기어다닙니다. 주둥이가 새처럼 뾰족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아주 청명한 날, 캐리에게 밥을 숟가락으로 떠먹여 마당에 내다놓고 밭에 온 가족이 일하러 갔습니다.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집니다. 집으로 뛰어오는 동안 소낙비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쏟아집니다. 캐리는 대추나무 밑에서 비에 쫄딱 젖어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좁쌀죽, 참깨죽, 애기 똥까지 먹였지만

수건으로 털을 닦고 부엌에 불을 때며 털을 말려주었습니다. 그날부터는 아주 식음을 전폐하고 숟가락으로 떠넣어주는 것도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짐승을 잘 키워야 살림이 인다(살림이 불어난다는 뜻)고 합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해 나를 살려내셨습니다. 나도 캐리를 꼭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정성을 다해봅니다. 좁쌀죽을 쑤어 먹여봅니다. 참깨도 갈아 아주 멀겋게 죽을 끓여 캐리 입을 벌려 억지로 먹여봅니다.

애기 똥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할머니가 이웃집 애기 똥을 비료포대 종이에 싸가지고 와서 ‘예지랑이 수저’(솥바닥, 감자 등을 긁는 데 써서 반쯤 닳은 수저)로 떠먹여도 보았습니다. 어죽을 끓여 먹여보지만 그것도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하루는 저녁을 일찍 먹고 강에 골뱅이를 건지러 갔습니다. 큰물이 지고 난 후라 아직 물이 많아 골뱅이 잡기가 수월치 않았습니다. 한참을 강가 따라 올라가니 메밀달개미(메밀껍질)를 쏟아놓은 것같이 까만 물웅덩이를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골뱅이 새끼들이었습니다. 큰 것으로 골라 한 움큼 건져다가 삶아 국물을 조금 떠먹이니 받아먹고 입맛을 다십니다. 그날부터 매일 저녁 골뱅이를 한 움큼 건져다가 삶아 국물도 먹이고 골뱅이도 먹이길 한 달쯤 되니 캐리는 열심히 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며칠이 지나니 일어서려고 애쓰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 날인가 일어서고 걷게 되었습니다.

캐리가 병을 앓는 동안 높이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아름다운 큰 개가 되었습니다. 복 때가 되자 높이를 팔았습니다. 캐리는 병줄이 놓이자 밥을 잘 먹고 아주 조금씩 개의 면모를 갖추어갑니다. 높이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병치레를 해서인지 많이 크지도 못하고 그리 예쁘지도 않습니다. 그런 녀석이 내가 어디를 가든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밥할 때면 부엌 앞에 쪼그리고 앉아 꼼짝도 안 합니다.

봄이 되자 일찍 새끼를 가졌습니다. 초여름에 캐리는 조그만 체구에 새끼를 아홉 마리나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어멈아, 사골이라도 하나 사다 사람도 먹고 캐리도 먹이자”고 하십니다. 캐리 덕에 온 가족이 사골국을 먹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우린 사골에 쌀뜨물을 받아 붓고 푹 끓이다가 그 물에 죽을 끓입니다. 사골은 열 번을 고아도 기름이 나옵니다. 모두의 염려와는 달리 캐리는 잘 먹고 젖도 흔하고 아주 열심히 새끼를 돌봐서 아홉 마리나 되는 강아지를 잘 키워냈습니다.

개 판 돈으로 그릇을 사면 잘산다

개 판 돈으로는 세금을 물면 못살고 그릇을 사면 잘산다고 합니다. 캐리는 그렇게 새끼를 낳기 시작한 것이 여러 해 동안 봄가을로 1년에 꼭 두 번씩 새끼를 낳았습니다. 어머니는 강아지를 팔아서 그릇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주부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스텐 그릇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제사 때마다 닦지 않아도 번쩍번쩍하는 스텐 그릇을 제사상에 올리고 좋아들 하였습니다. 큰일을 할 때는 동네 그릇을 빌려다 쓰곤 했는데, 우리 집은 캐리가 새끼를 낳을 적마다 ‘세신’ 스텐 대접을 사 모아서 할머니 장례 때도 큰오빠 잔치 때도 그릇을 빌리지 않고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 집은 사람들이 동물농장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많은 짐승을 길렀습니다. 지금처럼 동물은 애완의 대상이 아니라, 팔아서 돈을 만드는 재산이고, 필요할 때 먹는 식량이고, 농사에 동원하는 노동력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부터 온 가족이 짐승을 좋아해서 기르는 동안만은 정성과 애정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70년 넘게 살면서 사람 이상으로 소중하고 행복하고 마음 아팠던 동물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개, 고양이, 닭, 토끼, 돼지, 부엉이, 물고기, 배추벌레…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동물들을 소개합니다.
전순예 저자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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