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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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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러본 “오빠” 더 살가워진 ‘덕질’

소녀 시절 H.O.T. 팬으로 돌아간 30대 엄마들…

우상·스타 아닌 친구·가족처럼 느껴져
등록 2018-10-20 17:24 수정 2020-05-03 04:29
10월13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H.O.T. 콘서트에 관객이 1층에서 3층까지 가득 차 있다

10월13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H.O.T. 콘서트에 관객이 1층에서 3층까지 가득 차 있다

“딱 5년만 할 수 있던 ‘덕질’이란 걸 미리 알았다면, 더 죽어라 했을 텐데 말이야.” 17년간 계속된 푸념이었다. 2001년 2월27일 서울 잠실주경기장 콘서트에서 “항상 우리를 믿어주는 여러분이 있고 우리 멤버가 있는 한, 에이치오티(H.O.T.)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리더 문희준의 말을 믿었다.

그해 5월13일 토니안, 장우혁, 이재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로부터 일방적인 해체 통보를 받았다며 기획사를 떠나겠다고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어떤 설명이나 인사도 없이 다섯 명은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서울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소녀 팬들이 모여 침묵시위를 했다. 나도 그곳에 있었다.

흰 풍선 소녀들

그때 그 소녀들 중엔 이제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엄마도 있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말은 틀렸다. 지난 2월 문화방송(MBC) 예능프로 은 흰 풍선 소녀들을 다시 17년 전 어느 날로 데려갔다. 엊그제 본 책의 줄거리는 자꾸 까먹는데, 그때 외운 노래는 어찌 그리 뼛속 깊이 녹아 있는지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철 지난’ 노래들을 무한 반복해 들으며 가끔은 머릿속으로 춤을 따라 추고, 아무도 없을 땐 랩도 중얼거렸다. 그때 그 장소, 잠실주경기장에서 콘서트가 다시 열린다는 소식에 예매 당일 스케줄을 싹 정리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전쟁에 나아갔다. 은행 앞에 밤새 줄 서서 표를 구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니 “참, 좋은 세상이 됐구나” 싶었다.

대학 졸업 뒤 처음으로 피시(PC)방에 가 있다는 친구, 2살·4살 아들을 피해 방문을 잠그고 예매 전쟁에 나섰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난 참 겁 없게도, 스마트폰 앱을 열었다. 손가락 독수리 타법은 자신 있다며, 티켓 발매 시간에 딱 맞춰 ‘예매’ 버튼을 눌렀지만 내 앞에 기다리는 사람 수는 4만 명. 당연한 일이었다. 손 빠른 친구 덕에 1층 왼쪽 한편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고, 그날부터 디데이를 세기 시작했다.

10월13일 첫 공연을 4시간 앞둔 오후 3시, 잠실주경기장을 찾았다. 하얀 우비를 입은 ‘소녀’들이 벌써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만들었다. 10대였던 흰 풍선 소녀들은 이제 30대 중·후반을 바라본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17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전날부터 밤새 기다렸다는 얼굴에선 피곤함보단 설렘이 가득했다. 전국 곳곳, 아니 세계 곳곳에서 콘서트를 위해 달려온 이들이 있었다. 아내를 따라온 남편들, 뒤늦게 H.O.T. 팬이 된 10~20대 친구들이 퍽 기특해 보였다. 꿈꾸던 순간을 마주했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며 신나게 옛 추억을 꺼내놓고 깔깔대는 모습을 보면서, ‘H.O.T.는 무엇인가’ 생각했다. 5만 명이 다 같이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미아보호소 설치된 공연장
공연이 끝난 직후 무대의 모습.

공연이 끝난 직후 무대의 모습.

공연장에 미아보호소가 설치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기와 함께 와 ‘점프 점프’ 구호에 맞춰 몸을 흔들던 엄마 팬의 모습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멤버들은 불혹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최고의 공연을 선사했다. 별다른 인사말 없이 연달아 등 대표 7곡을 칼군무와 함께 완벽하게 소화했다. 메인보컬 강타와 메인댄서 장우혁의 실력은 17년 전 그때보다 확실히 무르익었다. 토니안은 신곡을 발표했다. 긴 공백기의 틈은 노련함과 연륜으로 메워졌다.

곡 중간중간 이어진 입담은 더 걸쭉해졌다. 멤버들에겐 H.O.T. 해체 뒤 토니안·장우혁·이재원이 결성했던 프로젝트 그룹 제이티엘(JTL) 시절, 아픈 이야기마저 농담으로 주고받을 여유가 생겼다. 팬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담은 를 부르며 멤버들과 팬들은 내년을 기약했다. “두려움은 없어요. 슬픔도 이젠 없어”라는 히트곡 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대여섯 번 떼창으로 반복한 뒤 아쉬움을 갖고 집에 가는 길,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임신부 있어요. 조금만 조심히 해주세요.” 눈빛만 봐도 서로의 그 간절했던 지난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팬들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오빠들’을 보겠다고 몸싸움을 하던 예전의 흰 풍선 소녀들이 아니었다.

10대들의 승리

H.O.T. ‘덕질’을 하기엔 꽤 괜찮은 조건을 갖춘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 근처에 한때 멤버 5명이 모여 살던 숙소가 있었고, 문희준의 집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가끔 그곳에 들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거기서 ‘뻗치기’(취재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를 처음 해봤다. 멤버 누구라도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집에 가는 게, 전부였다.

H.O.T. 공연 당일이 되면 교육청은 조퇴 금지령을 내리고, 학생주임 선생님은 교문 앞을 지켰다. 차마 담을 넘진 못했다. 학교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엔 10팀 중 6팀이 H.O.T. 춤을 췄다. 광고, 예능 프로, 영화까지 장악했다. 거리에선 그들의 음악이, 텔레비전에선 그들의 얼굴이 쉬지 않고 나왔다.

1997년 9월6일 예능 프로 (MBC)로 데뷔한 H.O.T.는 한국에 1세대 아이돌 문화를 불러일으킨 그룹이란 평가를 받는다. 한류 열풍 초창기 세계시장에 처음으로 케이팝을 소개하고 팬덤을 일으켰다. 정규 음반 5장 중 4장은 100만 장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다.

H.O.T.의 음악을 그저 ‘대중음악’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쉽다. 그들의 음악엔 사회를 비판하고 약자를 위로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로 학교폭력을 고발하며 등장한 이들은, 3집 로 똑같은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에 일침을 날렸다. 4집 에는 1999년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희생자를 위로하는 내용이 담겼고, 5집 로는 소외당하는 사회적 약자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교훈을 줬다. 팀명인 H.O.T.는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 10대들의 승리라는 뜻이다. 유치해서 피식 웃음이 나는,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한 이름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는 그 이름을 따라 사춘기와 ‘중2병’을 넘긴 듯하다.

다시, ‘덕질’
10월13일 H.O.T. 공연 시작을 4시간 앞둔 오후 3시. 팬들이 굿즈(상품)를 사려고 공연장 앞에 길게 줄을 섰다.

10월13일 H.O.T. 공연 시작을 4시간 앞둔 오후 3시. 팬들이 굿즈(상품)를 사려고 공연장 앞에 길게 줄을 섰다.

교복 입은 소녀들은 음반이 발표되기 며칠 전, 음반가게 앞에서 길게 줄지어 섰다. H.O.T.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포스터를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멤버들의 잡지 인터뷰를 꼼꼼히 읽고 스크랩하며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멤버들 사진을 벽에도 붙이고, 교과서 표지에도 붙였다.

그땐 가수와 팬이 ‘음성사서함 152’로 소통했다. 멤버들이 남겨둔 음성 메시지나 스케줄 안내를 확인하려, 공중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비밀번호 2357을 눌렀다.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는 브이오디(VOD) 같은 건 없던 때라, 온 가족을 동원해 모든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H.O.T. 학용품, 향수, 음료수, 그들의 디엔에이(DNA)가 들었다는 목걸이까지 모두 모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강타의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란 말을 믿어보려 한다. 이 나이에 다시 덕질을 시작하려니, 서툰 게 한둘이 아니다. 음원 인기 차트 순위를 올리려면, 사이트마다 법칙이 있다. 열심히 스트리밍해보자. 온라인 생중계되는 ‘깜짝 방송’을 보려고 각종 앱을 깔고 알림을 신청했다. 멤버들의 에스엔에스(SNS)는 이미 모두 팔로했다. 틈날 때마다 들어가 라이브방송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콘서트 후유증도 만만찮다. 수만 명이 찍은 콘서트 영상은 계속 다양한 버전으로 SNS에 올라온다. 끊고 싶어도 끊기 어렵다. 검색, 다시 검색. 하루에 몇 번씩 보고 또 봐도 새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H.O.T. 멤버들도 신비주의를 버리고 SNS로 팬들과 가깝게 소통한다. 팬들이 올려둔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더 응원하게 된다. 우상이나 스타가 아닌 이젠 정말 내 친구, 가족처럼 느껴진다.

애틋하고 먹먹한 마음은 그들이 반가워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토록 순수하게 무언가를 좇은 기억이 그때 이후엔 없다. 교복 위에 하얀 우비를 입고 흰 풍선을 흔들던 그때의 나 그리고 우리. 공연장 어디엔가 그때 그 소녀들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기만 했다.

글·사진 김미나 국제부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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