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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독립운동가를 쏘았는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출신의 김립 암살 사건

범인 오리무중에 암살 둘러싼 네 가지 설만 분분
등록 2018-03-10 16:57 수정 2020-05-02 19:28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국내 신문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지면. 오른쪽 아래는 암살되기 1년 전에 찍은 김립의 사진. 임경석 제공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국내 신문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지면. 오른쪽 아래는 암살되기 1년 전에 찍은 김립의 사진. 임경석 제공

1922년 2월8일은 수요일이었다. 중국인들이 위안샤오제(元宵節)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을 사흘 앞둔 때였다. 상하이 시내는 음력 새해를 맞아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음력 설날 춘제(春節)부터 거리를 떠들썩하게 한 폭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설날부터 대보름날까지 밤낮없이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중국인들의 오랜 풍습이었다.

정초에 울려퍼진 12발의 총성

북쪽 외곽 중국인 밀집 구역인 자베이 바오퉁루(寶通路)도 그랬다. 자동차 2대가 조심스레 마주 다닐 수 있는, 넓지 않은 차로였다. 양쪽으로 2∼3층짜리 중국인 가옥이 늘어서고, 맨 아래층에는 상점과 수공업 작업장이 들어찬 평범한 길이었다. 상하이 육로 교통의 관문인 베이잔(북역)에서 300m쯤 떨어진 이 거리에서도 폭죽 소리가 울리곤 했다. 마치 총소리 같았다.①

오후 1시였다. 점심때인지라 바오퉁루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네 남자가 둘씩 짝지어 걷고 있었다. 중국옷과 양복을 나눠 입은, 지식인층으로 보이는 30∼40대 남성들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이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사람이라면 아마 네 사람이 이방인임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 사람은 거리를 오가는 중국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어였다.

바오퉁루와 추장루(虬江路)가 만나는 지점이 저기 보였다. 앞선 두 사람은 굽은 길을 돌아 추장루로 들었다. 뒤의 두 사람이 길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잠복해 있던 양복 입은 청년 4명이 튀어나왔다. 둘은 앞을 가로막고, 둘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멀찌감치 뒤를 가로막았다. 앞길을 가로막은 두 청년이 양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커먼 쇠뭉치를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탕, 탕, 탕….”

연이어 권총 격발음이 울렸다. 정초에 거리에 울리는 폭죽 소리에 섞여 둔탁한 총성이 바오퉁루 일대에 울려퍼졌다. 습격자들의 목표는 한 사람이었다. 40대 중반 남자가 쓰러졌다. 앞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국옷을 입은 중년 신사였다.

총성이 이어졌다. 습격자들은 권총에 장전된 탄환을 다 쓸 때까지 계속 총을 쏘았다. 마지막 탄환까지 쏜 뒤에야 두 습격자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멀찌감치 후방을 차단했던 다른 두 청년도 유유히 사라졌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로 꼽히는 (申報)는 사건 직후 두 차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피습자는 바오퉁루에 거주하는 한국인 양춘산(楊春山)이었다.② 양춘산은 ‘한국 독립당의 중요 분자’인데, 애초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살다가 중국 관할 구역으로 이사한 지 불과 3~4일밖에 안 된 상태였다. 44살로, 여러 해 ‘정치관계 일’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신문은 피격 전후의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습격자들은 권총으로 양춘산을 사살했는데 “총탄이 비 오듯 했다”고 한다.③ 총을 맞고 땅에 넘어진 희생자는 바로 숨이 끊겨 죽었다. 사건 현장 좌우에 중국인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상가의 중국인들은 사건을 직접 보고 크게 놀랐으나, 범인들이 모두 권총을 들고 있어 감히 앞에 나가 간섭하지 못했다. 그래서 습격자들은 범행을 마치고 활개치며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란 듯이 현장 떠난 습격자들

신문기자는 현장 주변 상점을 돌며 목격자들에게 보고 들은 바를 물었다. 그에 따르면 “흉수(兇手)는 2인인데, 둘 다 양복을 입었고 신체는 왜소”했다. 그들은 범행을 마친 뒤 ‘철로 방면’으로 뛰어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로’란 바오퉁루와 추장루가 만나는 교차로를 축으로 북쪽과 남서쪽으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부설된, 상하이 베이잔 역과 우쑹 역을 잇는 철도선을 가리킨다. 교차로는 길이 다섯 갈래로 나뉘는 오거리였다. 습격자들이 도주하는 데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범인 수를 두 사람이라고 증언한 것은 실제와는 다르지만 정직한 진술임이 틀림없다. 목격자들은 후방 감시를 맡은 다른 두 명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머잖아 경찰이 출동했다. 관할 경찰관서인 5구(區) 2분서(分署) 소속 순경들이 사건 현장에 왔다. 물론 흉행을 저지른 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검찰청에서도 관계자들이 나왔다. 검찰관과 검시원이 현장 검증을 지휘했다. 그 결과 주검 가까이서 탄피를 발견하고, 주검에서 12발의 총상을 확인했다. 희생자의 사망 원인은 총상으로 말미암은 것임이 명백했다.

중국 쪽 치안 관계자만이 아니었다. 인접한 공동조계 경무처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공동조계란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재상하이 외국 조차 구역을 이른다. 이 구역의 행정과 경찰권은 영국이 주도하고 미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공동조계 경무처 관리가 중국 검찰청에 찾아와 사건의 시말과 정형을 조사했다.

이 사건에 상하이 이외 지역의 중국 언론 기관도 관심을 보였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1922년 2월18일, 저장성 항저우에서 발행되는 (杭州報)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재상하이 한인 양춘산의 암살 사건을 논함’이라는 논평 기사였다.

범인은 일본인인가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중국 상하이 <독립신문>1922년 2월20일치 지면(왼쪽).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이 쓴 김립 암살 사건 보고서.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중국 상하이 <독립신문>1922년 2월20일치 지면(왼쪽).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이 쓴 김립 암살 사건 보고서.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기자는 ‘한국 독립운동에 분주하게 헌신하던 사람’이 살해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죽은 이에게 깊은 동정의 뜻을 표했다. 독립을 위해 희생됐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터이지만,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먼저 몸이 죽었으니 그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라고 적었다. 기자는 피살자의 죽음을 가리켜 ‘순국’이자 ‘희생’이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기자는 암살자의 정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독립지사를 암살하는 일은 아마 ‘모국인’의 행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문맥상 일본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논평자는 그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암살 따위를 저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통박했다.④

이 암살 사건은 일본 식민 지배 아래 있는 한국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는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조선인 양춘산’이 상하이에서 참혹하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문은 피살자가 일찍이 북간도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하다 근래에 상하이로 온 사람이라는 정보도 제공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보도 기사에는 ‘범인은 일본인인가’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중국 신문의 보도를 보면 범인은 일본인인 듯하다”고 적었다.⑤

피살자는 누구인가? 일본 경찰은 이 암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일본제국’을 적대시하는 한국 독립운동계의 거물이 피살됐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재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나섰다. 공동조계 경무처에 연락해 수사 결과를 입수했고, 상하이 한인 사회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첩보망을 가동했다.

총영사관 경찰부가 탐지한 바에 따르면, 피살자 양춘산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양춘산은 중국인으로 행세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김립(金立)이었다.

김립은 1919년 11월 재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해, 임시정부의 재정과 인사를 비롯한 모든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거물급 인사였다. 국무원 비서장이란 국무총리 직속 집행기구의 책임자로서, 산하에 서무국을 비롯한 실무 부서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국무원 각부 차관회의를 주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운영 전반을 좌우하는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그는 1920년 9월15일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⑥

피살자가 누군지에는 어떤 관찰자도 이견이 없었다. 일본 경찰뿐만 아니라 공동조계 경찰의 판단도 동일했다. 상하이 공동조계의 최고행정관리기구인 공부국(工部局) 산하 경찰국장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발송한 1922년 2월16일치 수사 결과 통지문에도 같은 정보가 쓰여 있었다.⑦

게다가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도 그처럼 판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기관지 을 보자. 사건 발생 12일이 지난 뒤였다. 이 신문에 ‘양춘산의 피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양춘산이라 칭하는 나이 40여 세 된 우리 사람 하나가 지난 8일에 어떤 청년 4인에게 피살되었는데, 일설에는 그 피살된 이가 곧 김립이라고도 하더라”⑧고 적혔다.

청년 망명객이 보낸 의문의 편지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였다. 우편물 검열을 하던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우편물 더미에서 의심스러운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재상하이 청년 망명객이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재상하이 독립운동가 사회에 대한 어둡고도 우울한 풍경이 묘사돼 있었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의 내막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이동휘의 심복인 김립이라면 알겠는가? 어제 대낮에 대도에서 혹자로부터 12발이나 맞고서 길 위에서 즉사했다”고 쓰여 있었다.⑨

이동휘는 김립과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재임했던, 독립운동계의 최상급 지도자였다. 김립을 가리켜 그의 심복이라고 지목했음에 눈길이 간다. 편지에서는 사건이 있었던 날을 ‘어제’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2월9일에 쓰였음을 알겠다. 김립이 살해된 다음날 이미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 사이에 그 소식이 신속히 퍼져나갔음을 짐작게 한다. 게다가 사건 정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알고 있음이 주목된다. 피살자가 누구라는 것, 대낮에 큰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총상 12발을 입었다는 것, 현장에서 김립이 즉사했다는 것 등 사실을 놀랄 만치 적중시켰다.

편지 발신인이 누군지 일본 경찰 문서에는 거명돼 있지 않기에 그 신상은 알 수 없지만, 상하이 망명자 사회의 내막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조차 누가 왜 김립을 죽였는지 쓰지 않았다. 알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워낙 기밀 사항이라 편지에 차마 적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과연 누가 김립을 암살했는가? 왜 그처럼 처참하게 죽여야 했는가? 피살자 신원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각종 기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정보를 전한다.

처절한 죽음의 진실을 찾아서

네 가지 설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일본 정보기관이 김립의 암살을 사주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이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의심했다. 한국인 사회주의 진영의 반대파가 그를 죽였거나, 혹은 한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은 자객이 그를 암살했을 것으로 보았다. 어떤 이는 암살자들이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일파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과연 어느 주장이 실제에 부합하는가? 혹시 네 가지 풍설 외에 달리 범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도대체 범인들은 왜 김립을 그처럼 처참하게 죽였는가? 이제 이 의문들의 해답을 찾아나서자. (다음 연재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정진석 소장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222쪽, 1999년 1월
② ‘閘北寶通路發生暗殺案’, 1922년 2월9일치 14면
③ ‘閘北寶通路暗殺案 續聞’, 1922년 2월10일치 14면
④ 在杭州領事代理 副領事 淸野長太郞, ‘朝鮮人楊春山ノ暗殺事件ニ關スル新聞論評ノ件’, 1922년 2월18일
⑤ ‘조선인 양춘산, 상해에서 피살’, 1922년 2월14일치
⑥ ‘叙任及辭令’, 1920년 12월25일치
⑦ ‘상해 공동조계 경찰국이 재상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보낸 통지문’(영문), 1922년 2월16일
⑧ ‘楊春山의 피살’, 1922년 2월20일치
⑨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高警第686號, 在外不逞鮮人ノ落膽’, 1922년 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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