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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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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관’ 아니라 ‘반공-냉전사관’이다

1968년 창간 반공잡지 <자유>는 한국 유사역사 뿌리…

‘환국’ 앞세워 공산국가 중국·북한 부정하고 박정희에 러브콜
등록 2017-09-05 18:29 수정 2020-05-03 04:28
<자유>는 유사역사의 원류나 다름없는 ‘우리국사찾기협의회의 대표지’(왼쪽)임을 천명했다. 환국의 강역이 중앙아시아의 ‘수미리족’(수메르인)과 ‘빠빌론 문명’에까지 닿았다는 글이 실린 <자유> 1978년 5월호.

<자유>는 유사역사의 원류나 다름없는 ‘우리국사찾기협의회의 대표지’(왼쪽)임을 천명했다. 환국의 강역이 중앙아시아의 ‘수미리족’(수메르인)과 ‘빠빌론 문명’에까지 닿았다는 글이 실린 <자유> 1978년 5월호.

이유립이 1979년 출간한 는 위서, 즉 ‘가짜’ 책이다.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후 활발한 연구를 통해 가 위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가 위서라는 결정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이유립이 를 출간한 1979년 이전에 의 내용이라며 인용한 문구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가령 이유립이 1974년 쓴 글에서 파나류국(波奈留國)으로 등장한 지명은 1976년 쓴 글에선 파나국(波奈國)으로, 1979년 글에서는 파나류지국(波奈留之國)으로 표기된다. 원본을 봤다고 주장하며 이를 출간한 이유립조차 원본 인용이 뒤죽박죽이었다. 대한제국 관리 유응두의 시와 일제 때 위조된 고서 이 에 인용된 점도 결정적이다. 이것은 가 일제 이후 위조된 책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박창암, 임승국, 이유립 등 유사역사가들은 등 역시 위서 판정이 난 가짜 책들을 빌려 가 ‘진짜’라고 밝히는 데 몰두했다. 그들은 ‘민족의 9천 년 역사’(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반만년도 아니고 9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리기를 사명으로 삼았다. 유사역사가들은 민족사학자를 자임하고, 유사역사를 지지하는 역사 애호가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 이들은 근거가 취약한 ‘환상적 고대사’ ‘고대사 판타지’를 경계하는 역사학계를 종종 친일사학 또는 식민사학이라 매도한다. 이들이 말하는 ‘친일’은 실상 민족을 배반한 행위, 즉 ‘반민족 행위’와 같은 것이다.

는 위조된 책

지난 6주 동안 게재된 의 ‘진짜고대사’ 연재 가운데 ‘임나일본부설 추종 학자 일본에도 없다’(제1172호, 1회),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제1174호, 3회) 등 유사역사의 ‘정설’을 반박하는 젊은역사학자모임의 글은 포털 사이트와 페이스북에서 꽤 많은 화제를 모았다. 흥미로운 점은 1천 개 넘는 댓글을 통해 드러난 대중의 반응이다. 댓글에서 과 젊은역사학자모임은 사실상 ‘반민족 행위자’ 취급을 당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사역사가 대중의 역사 인식에 침입한 ‘킬링 포인트’가 바로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진짜고대사’ 마지막 회에서는 유사역사가 구축한 ‘민족사관’에 대한 팩트 체크를 통해, 그들의 민족사관이 그다지 민족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반공사관’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유사역사가 ‘가짜고대사’를 창조한 배경을 알려면 반공과 독재라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현대사 전공인 필자가 마지막 ‘팩트 체커’로 나서는 이유다.

유사역사가 내세우는 민족사관의 실체를 살피려면 1968년 6월 창간된 잡지 를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는 한국의 유사역사가 뿌리내리고 성장하는 보루가 됐다. 가 냉전 질서 안에서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반공정신’을 확산하기 위해 창간된 잡지라는 것은 창간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유지는 하늘의 공의를 지켜 국제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자유를 탈환하는 십자군의 선두에 나서서 감히 이 거창한 세기의 싸움에 자기를 바칠 것을 맹서한다.”

의 반공 성격은 이 잡지를 출간한 출판사 ‘자유사’의 핵심 인물 박창암(1923~2003)의 이력만 살펴도 금세 드러난다. 만주군 간도특설대 하사관 출신인 그는 1953년 미국 특수전학교를 졸업하고 5·16 군사쿠데타에 ‘혁명동지’로 참여해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다. 그러다 1963년 9월 쿠데타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보석으로 석방된 후 의정부에 칩거했다. 1968년 창간호부터 박창암은 군인 시절 얻은 군사 지식과 정세 정보를 바탕으로 반공과 전쟁 태세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거의 모든 호의 권두언을 그가 집필했다. 그의 호는 다름아닌 ‘만주’(滿洲)였다.

‘민족·자유’ 내세우며 공산주의에 맞서

의 논조가 유사역사 편향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진 것은 창간 8년이 지난 1976년 1월호부터다. 1975년 10월 ‘우리국사찾기협의회’(국사찾기협의회) 발족이 계기였다. 이 단체의 설립취지문에 나온 ‘당면 목표’는 유사역사의 ‘강령’이나 다름없다.

“1. 본 협의회는 단군조선은 실재의 상고시대로서 우리 국사의 상한으로 본다.

2. 본 협의회는 단군조선 이래 반만년의 역사강역은 현재의 한반도에 국축된 판도가 아니라 그 강역의 동은 연해주 일원, 북은 흑룡강 유역, 서는 바이칼호, 남은 산동반도 일원 및 황하, 진수, 양자강에 걸친 중원대륙 등을 동서남북으로 경위 삼아 일련하는 대강역이었음을 밝힌다.

3. 본 협의회는 현행 국정 국사 교과서는 마땅히 그 반도 국축사관(跼縮史觀·우리 민족의 판도가 한반도에 갇혀 있었다는 위축된 사관)을 탈피한 대륙사관에 입각하여 개정되도록 그 방향 촉구에 힘쓴다. 특히 단군신화설과 한반도 내 한사군설의 개정은 시급을 요하며….”

국사찾기협의회에는 박창암을 비롯해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임승국, 이유립, 박시인, 이대위 등 유사역사의 핵심 이데올로그들이 참여했다. 1976년 1월호부터 이들의 글이 다른 필자를 밀어내고 잡지 대부분을 채웠다. 1977년 1월호부터는 아예 잡지 속표지에 “국사찾기협의회 대변지”라고 썼다. 목차에는 “국민정신혁명의 기본인 민족사관 확립의 지침지”라는 문구를 삽입해 잡지 발간 목표를 더 명확히 천명했다.

이들이 내세운 민족사관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열망하며 3·1 만세운동을 벌이던 피지배 민중이 인식한 그 ‘민족’을 가리키는 사관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가들이 내세운 민족사관은 공산주의 전략에 대응하는 반공 체계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민족’과 ‘자유’를 한 가치관 안에 결합하고 그 근거를 고대사에서 찾았다. 이들은 또 민족사관의 반대편에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놓고, 유물사관의 사상적 대비 차원에서 민족사관 개념을 정립해나갔다. 국사찾기협의회가 1976년 4월 정리한 ‘한국사연표’는 중국 역사까지 ‘환국’ 역사로 포괄했는데, 당시 공산주의 국가이던 북한과 중국의 존재는 아예 삭제했다. 북한과 중국을 ‘민족’으로 포함하지 않은 것은 유사역사가들의 민족사관이 기실 뿌리 깊은 반공을 기반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유사역사가들이 끊임없이 반공독재국가에 ‘러브콜’을 보낸 일 역시 이들이 내세운 ‘반공적 민족’ 개념의 실상을 드러낸다. 유사역사가들은 지면을 통해 박정희 정부의 주장과 부합함을 반복 강조했다. ‘단단학회’(1966년 이유립이 조직한 단군교 계통 종단)가 집필자로 등장하는 1977년 2월호 ‘국조고전 에서 본 충효관’이란 글 서두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요지’를 길게 인용했다. 임승국은 1977년 4월호 ‘정문에 일침을 가한다-전문가·비전문가의 시비’란 글 마지막에 박 대통령의 올바른 국가관 언급을 인용했다. 1976년 11월 최규하 국무총리가 국사 교과서의 단군신화 부분 개정을 약속하자, 는 이를 환영하며 드디어 자신들의 주장이 ‘일인지하 만인지상’ 국무총리의 말로 공신력을 얻었다고 환호했다. 그들의 인정투쟁은 반공독재국가의 승인을 얻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진짜 민족사관’은 냉전 질서 비판한다

특히 임승국이 1977년 6월호에 쓴 글을 보면, 유사역사의 민족사관은 실상 ‘반공적 민족사관’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역사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의 호적수는 ‘민족사학-민족주의-민족적 주체의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란 인류가 사회생활을 시작 영위하면서 최초로 갖게 마련인 인류 공통의 원초적 본능의식이며 국민(민족의 일(一) 성원)이라는 성분은 인류가 갖는 최초의 법률적 지위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 ‘국가’라는 의식은 ‘인류’ ‘세계’라는 의식에 한발 앞서 갖기 마련인 인류 최초의 사회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본능에 바탕한 민족, 국가에 대한 이같은 의식을 무시하고 ‘민족보다 인류를’ ‘국가보다 세계를’ 고양 주입하려는 온갖 시도나 노력은 인류의 본능적 의식을 기만하고 왜곡시킬 만큼의 위압과 폭력(팟쇼)를 전제하지 않고 성립되지 않는다…‘승공통일’을 위한 체제나 그 체제철학 그리고 오늘의 유신체제도 의당 민족사학에 바탕을 둬야만 한다.”

또한 박창암은 1976년 5월호에서 기존 사학과 유사역사의 차이를 설명하며 ‘간첩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상 당시 유사역사는 매카시즘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민족사관에 대한) 기우와 소극성은 표리일체이며 간첩균은 바로 이러한 생리층·계열에 기생 밀착하는 것이 상례였다.”

‘유사 민족사관’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통용되는 민족사관과 확연히 구분된다. 역사학계, 특히 현대사에서 정리하는 민족사관의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현실 속 ‘국가’를 넘어 민족의 경계를 확장함으로써 지금도 우리를 구속하는 냉전 질서를 비판하고 상대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를 위하여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에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 재외국민, 조선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 민족사관 또한 소수자와 젠더 문제에 한계를 보이는 등 비판과 성찰의 대목이 있다.

그러나 기존의 민족사관에 비춰, 반공주의에 기반한 유사 민족사관은 애당초 민족사관이라 부를 수 없다. 유사역사의 사관은 ‘반공-냉전 사관’으로 고쳐불러야 옳다.

유사역사가들이 고대사를 부풀리는 일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 유사역사 추종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소개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가 실재했다고 믿는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아틀란티스가 전설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지만, 미국에서 아틀란티스는 오컬트 문화와 결합해 ‘진짜 역사’로 대중에게 소비되고 있다. 나치 독일은 아틀란티스가 아리안족의 원류라 믿고, 이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지원했다. 일본에도 고대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고 싶은 것만 찾는 건 역사학이 아니다

다만 이들 나라에서는 유사역사의 주장을 국회나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책 연구기관에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유사역사가를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자를 ‘반민족행위자’라고 모욕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끄집어내 과거를 구성하는 역사 서술은 ‘역사학’이 될 수 없다. 역사학계가 오랫동안 유사역사를 제대로 된 ‘연구’로 취급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진짜고대사’가 고대사를 넘어, 현대사를 포함해 한국사 전반에 다양하고 진일보한 이해와 관심을 촉발하는 데 기여하기 바라며 연재를 마친다. 진짜고대사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김대현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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