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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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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 하는 사이비역사가들

올바른 역사 연구에 전문적 훈련·지식 뒤따라야
등록 2017-08-09 15:41 수정 2020-05-03 04:28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표시한 3세기 무렵 한반도 일대 정치체들의 위치. 당시 한반도에는 낙랑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낙랑군의 속현이었다가 군으로 승격한 대방군이 남쪽에 자리잡았고, 고구려와 삼한은 물론 부여·옥저·동예 등 다양한 정치체가 병립했다.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바깥으로 옮겨 파악하려는 사이비역사가들은 다른 정치체들의 위치까지 달라지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기경량 제공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표시한 3세기 무렵 한반도 일대 정치체들의 위치. 당시 한반도에는 낙랑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낙랑군의 속현이었다가 군으로 승격한 대방군이 남쪽에 자리잡았고, 고구려와 삼한은 물론 부여·옥저·동예 등 다양한 정치체가 병립했다.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바깥으로 옮겨 파악하려는 사이비역사가들은 다른 정치체들의 위치까지 달라지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기경량 제공

‘한사군’은 역사 교과서로 한국 고대사를 배운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개념이다. 한사군은 중국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한무제(기원전 140~86년)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기존 고조선 강역에 설치한 4개의 군(郡)(낙랑군·현도군·임둔군·진번군)을 가리킨다.

이 중 실제 명맥을 유지한 것은 낙랑군뿐이다. 낙랑군은 나머지 3개 군이 폐지·축소될 때 3개 군에 속한 지역을 넘겨받아 관할 지역을 넓히며 400년 넘는 기간에 존속했다. 한국사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연구할 때 낙랑군의 이해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특히 한국 역사학계가 일부 사이비역사가로부터 ‘식민사학자’ ‘친일사학자’라고 손가락질받은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낙랑군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낙랑군이 평양에 있으면 친일? </font></font>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기와 끝에 마감을 위해 붙이는 막새들(왼쪽 위). 막새면 중심부에 글자 ‘낙랑예관’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새겨넣었다. 확대된 사진의 오른쪽 위(낙)·아래(랑), 왼쪽 위(예)·아래(관)에서 네 자가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기와 끝에 마감을 위해 붙이는 막새들(왼쪽 위). 막새면 중심부에 글자 ‘낙랑예관’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새겨넣었다. 확대된 사진의 오른쪽 위(낙)·아래(랑), 왼쪽 위(예)·아래(관)에서 네 자가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역사학계에선 낙랑군의 중심 지역을 평양으로 보는 ‘낙랑군 평양설’이 정설이다. 그러나 유명한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가 만들어낸 왜곡된 인식’이라 하고, 낙랑군 평양설을 그대로 따르는 한국 역사학자에게 ‘식민사학자’ ‘친일파’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더구나 이덕일 소장은 낙랑군 평양설을 입증하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사료를 뒤지면 뒤질수록… 한사군은, 낙랑군은 평양에 있다는 사료는 단 한 개도 없고,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 아니면 그 서쪽으로 더 가는 데 있다라는 사료들이 중국 사료에 계속 수십 개 나옵니다.”(2016년 6월26일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 발대식에서)

참으로 충격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사실을 다루는 학문인 만큼 증거에 입각해 연구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덕일 소장의 말대로라면 우리 역사학계는 단 한 개의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이야기를 오로지 ‘친일’을 목적으로 정설로 삼고 있다는 게 아닌가.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든 왜곡의 산물이 아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록이 존재하며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다산 정약용은 역사지리와 자연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저서 와 이다. 정약용은 에서 한사군 위치를 자세히 논하며 “낙랑은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2도의 땅”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고려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에서도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으로 언급했고, 일연의 도 마찬가지 인식을 보였다. 이외에 낙랑군 위치를 평양으로 서술하는 역사서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인식은 학자들의 연구가 수백 년간 쌓여온 결과다. 그런데도 사이비역사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낙랑군 평양설이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에 의해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왜곡한다. 정약용 같은 실학자, 심지어 고려시대 사람들도 모두 식민사학자인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낙랑군 위치의 다양한 설이 등장하고 요동 일대를 지목하는 이도 나타나지만,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결론이 통설 지위를 잃은 적은 없다.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철저히 허위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의 주석을 ‘1차 사료’로 착각</font></font>

그렇다면 이제, 사이비역사가들이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한 주장을 팩트 체크해보자. 최근 사이비역사가들은 낙랑군이 있던 시기에 작성된 ‘1차 사료’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차 사료인 고대 중국 역사서에 ‘낙랑군은 요서나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2015년 11월16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주최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학술대회는 사이비역사가의 수준이 폭로된 현장이었다. 사이비역사학계의 대표 격으로 참석한 이덕일 소장은 후대 사람인 조선 학자, 즉 정약용 같은 사람이 한사군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한편, “가장 중요한 건 한사군이 실제로 설치되었을 당시에 쓰여진 1차 사료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준비한 나 같은 ‘1차 사료’들의 내용을 장황하게 열거했다. 그러나 이는 토론 상대자인 윤용구 박사의 다음 지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은 에 주를 붙인 거예요. …이건 의 기록이 아니에요. 여기 주가 달려 있는… 괄호 친 건 다 ‘주’예요.”

알고 보니 이덕일 소장이 ‘1차 사료’라고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자료는 한나라 존속 시기에서 수백 년 지난 당나라 때 사람 안사고나 이현 등이 나 에 붙인 ‘주석’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1차 사료’도 아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고려 중기 김부식이 지은 ‘원본’ 가 있고, 현대의 역사학자 A가 본문에 이러저러한 보충 내용과 해설을 추가적으로 단 ‘역주본’이 있다고 치자. 이덕일 소장은 역주본에서 현대 역사학자 A가 붙인 보충 내용과 해설을 긁어와서는 ‘이것이 바로 김부식이 쓴 서술이다. 후대 사람이 덧붙인 내용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김부식 본인이 어떻게 썼는지가 중요하다’고 엉뚱한 주장을 늘어놓은 셈이다. 자료에 대한 몰이해가 부른 대참사였다. 역사서의 본문과 후대인이 덧붙인 주석조차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갖다붙여 ‘1차 사료’라 주장하는 것이 ‘비주류 사학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연구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낙랑군과 관련된 진짜 ‘1차 사료’의 내용은 어떠할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삼한을 바다에 둥둥 띄울 셈인가</font></font>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낙랑군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중국 하북성 노룡현은 남쪽에 바다를 면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삼국지> <후한서> 등 당대 핵심 사료에 낙랑군과 대방군 남쪽에 있었다고 기술된 삼한은 바다에 둥둥 떠 있게 된다. 기경량 제공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낙랑군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중국 하북성 노룡현은 남쪽에 바다를 면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삼국지> <후한서> 등 당대 핵심 사료에 낙랑군과 대방군 남쪽에 있었다고 기술된 삼한은 바다에 둥둥 떠 있게 된다. 기경량 제공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는 바로 서진 시기 진수(233~297년)라는 사람이 저술한 정사 다. ‘동이전’에는 3세기 무렵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존재하던 여러 정치체의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특히 고구려·부여·동예·옥저·마한·진한·변한 등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터 잡은 고대정치체의 상대적 위치와 방향이 설명된 점은 크게 참고되는 부분이다. 여기에 보조 자료 격으로 약간 뒷시기의 기록 ‘동이전’ 내용까지 참조하면 더욱 분명한 상(지도 참조)을 얻을 수 있다.

고구려전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 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하고 있다.

예전

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 큰 바다(대해)에 닿는다.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예전

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과 접해 있다. 동쪽은 큰 바다(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옛 조선의 땅이다.

한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해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한전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이덕일 소장은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이 아닌 중국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북성 노룡현은 바닷가에 자리(지도 참조)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낙랑군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는 마한·진한·변한 등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어야 한다. 사이비역사가들은 낙랑군을 ‘대륙’에 옮겨다놓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낙랑군을 중국 쪽에 옮겨 비정(역사에 등장하는 지명 위치를 추정)하면 그 주위의 고구려·예·옥저·삼한까지 모두 옮겨 이해해야 한다. 고대 한반도는 텅텅 빈 공간이 되고 만다. 역사적 공간으로서 한반도를 말살하는 일이다.

그런데 ‘1차 사료’는 아니지만 후대 중국의 역사서에 낙랑군이 요하 일대에 있었다는 기록이 일부 확인된다.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평양 지역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사실상 그 생명을 다한다. 당시 낙랑군을 이끌던 장통은 자신을 따르는 일부 낙랑인을 이끌고 요동·요서 지역을 장악한 선비족의 수장 모용외에게 집단 망명했다. 모용외는 이들을 위해 자기 영토 내에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해주었다. 이 내용은 중국 역사서 에 실려 있다. 이처럼 본거지를 떠난 이들을 새로운 땅에 정착시키며 과거 살던 지역명을 계승해 사용하는 것을 ‘교치’라고 한다. 이렇게 설치된 행정구역은 ‘교군’ ‘교현’이라고 부른다. 얼핏 어렵고 헷갈리는 개념이라 생각하겠지만,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이북5도청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중국 내 낙랑군 지명은 망명 흔적</font></font>

교치는 서진이 멸망하면서 시작된 5호16국·남북조 시대(4세기 초~6세기 말)에 성행한 현상이다. 서진 말 흉노족이 일으킨 ‘영가의 난’(307~312년)을 계기로 중원 지역 한족이 이민족에게 쫓겨 멀리 남쪽 지역으로 대규모 망명을 했다. 새로 정착한 남쪽 지역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과거 사용하던 북쪽 지역명을 옮겨서 계속 사용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 이민족이 장악한 북쪽에서 전개된 ‘5호16국 시대’는 여러 종족과 왕조가 부침을 반복하는 혼란기였기에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다. 각 지역 세력가들은 유민을 자기 영토에 정착시켜 인구 증가를 통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요동·요서 지역의 실력자인 모용외가 평양 지역에 있다가 고구려에 쫓겨 도망 온 낙랑 유민을 받아들인 것도 그 정책의 일환이었다.

요하 일대에 새로 설치된 낙랑군은 정치적 격변에 따라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동했다. 313년 이후 내용을 담은 중국 역사서에서 낙랑군과 조선현의 명칭이 요하 일대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이 ‘낙랑군이 중국에 있었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기록은 바로 이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후대 역사서의 단편적 기록만을 보고 낙랑군이 처음부터 요동이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착각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 전개나 교치 개념의 이해가 전무한 탓에 생긴 ‘무지의 소산’인 셈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오류를 교정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 연구에는 자료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하려는 전문적 훈련·지식과 연구 대상에 대한 겸손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학문으로서 ‘역사학’과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이비역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 간극이다.

기경량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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