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역사가들은 자기 영역을 그렇게 쉽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역사의 모든 풍부함과 복잡성 안에서 과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저기 바깥의 대중 영역에 있는 편향되고 틀리기까지 한 역사서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지도자와 여론 형성가들이 역사를 악용해 거짓 주장을 강화하거나 어리석은 불량 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하게 된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의 이 말은 전문 역사가와 아마추어의 대립, 역사학계와 유사역사 또는 사이비역사의 대립이 한국만의 일이 아님을 넌지시 알려준다. 만약 이 대립을 근대 역사학의 숙명으로 여긴다면, 사이비역사가들로부터 친일사학이라고 공격당하는 일에 학계가 특별히 낙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이비역사가 오도하는 대중을 위해 ‘역사학계는 정말 친일인가’에 대한 팩트 체크는 필요하다. ‘진짜고대사 ⑥’에선 지난 한 세기 동안 일제강점기에 오염된 식민사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역사학계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식민사학 극복의 계보학’을 다룬다.
서구 제국주의 이론 베낀 식민사학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스스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식민 시기를 경과해야 했다. 당시 역사 연구 주제를 선점한 식민주의 역사학은 ‘정체성론’과 ‘타율성론’, 두 축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비극 속에 근대 역사학의 당면 과제는 식민사학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내세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이란 무엇인가.
먼저 정체성론은 한국사의 진보를 부정하고, 한국사를 정체와 낙후를 거듭한 역사로 파악한다. 정체성론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출발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라는 발전 도식을 세계사적 보편으로 이해했는데, 일본 학자들은 자국의 역사를 이 틀에 끼워맞추려 애썼다. 후쿠다 도쿠조와 시카타 히로시 등 일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내세운 정체성론의 핵심은 한국사에서 봉건제가 결여돼 있다는 거였다. 일본 역사에선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춘 봉건제를 포착할 수 있지만 한국 역사에선 찾을 수 없음에 따라, 한국사는 여전히 봉건제 이전 단계인 고대사회에 정체돼 있다는 주장이었다.
역사학은 독립운동이었다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내세운 ‘정체’ 개념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창안한 ‘아시아적 정체’에서 빌려온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애덤 스미스가 에서 중국을 ‘정체된 국가’(Stationary State)라고 평가한 것과 카를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섞어 ‘아시아적 정체’라는 괴상한 식민지배 논리를 창안했다. ‘아시아는 정체돼 있으므로 서구사회가 그 발전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는 ‘한국은 정체돼 있기 때문에 일본이 발전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정체성론’으로 변용됐다.
타율성론은 정체성론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타율성론에서 한국사는 ‘자율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항상 주변 강대국의 영향에 따라 ‘타율적’으로 전개된 역사다. 반도적 성격론 혹은 만선사관(제1175호 진짜고대사 ④ ‘가짜가 내세우는 가짜 프레임’)이 그 예다.
반도적 성격론을 내세운 대표 식민사학자이자 경성제대 교수이던 도리야마 기이치는 한국사를 반도 밖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흥망성쇠에 영향받아온 역사라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중국 대륙의 한 왕조가 흥할 때 고조선이 쇠한 반면, 중국 대륙이 위·진·남북조로 분열해 약화됐을 때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한 해양세력은 ‘왜’, 즉 일본인데 왜의 국력이 강성해진 16세기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휘청한 것이 반도적 성격론에 부합하는 사례다. 대제국을 이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된 것만 상기해도 반도적 성격론은 학술적 가치가 희박한 주장이었다. 역사학의 기본 책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국가적 기획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기꺼이 부역한 일본 식민사학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국사를 한반도와 만주까지 아울러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만선사관도 학술적 가치가 형편없기로는 마찬가지였다. 만선사관의 대부 격인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대놓고 식민지배의 학문 기여를 천명한 인물이다. 구라키치가 만든 만선역사지리조사실 소속 야나이 와타리는 “조선의 역사는 비참한 역사이고 굴욕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개 만주 민족 또는 만주에 세력을 얻은 민족으로부터 받은 타격과 손해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했다. 만선사관은 이처럼 조선 역사의 타율성을 부각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만주를 끌어들인 것에 불과했다. 만선사관의 대표 주자인 이나바 이와키치는 한국의 왕통은 대부분 만주계로서 때때로 중국계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한국인 가운데 왕이 된 사람은 없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제강점기 이래 줄곧 식민사학을 이루는 악의 축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했다. 먼저 한국사가 봉건제를 결여해 정체됐다는 정체성론의 극복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맡았다. 백남운과 이청원 등 한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사 역시 세계사적 발전 도식에 따른 노예제-봉건제를 경험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백남운이 주목한 것은 신라 중대의 녹읍제 시행에 따른 귀족의 토지 영유권 확대였는데, 그는 이로써 봉건적 사유지가 생겼다고 봤다. 이청원이 고려 말에 주목한 부분은 몽골 침략 뒤 등장한 이른바 권문세족과 그들의 대토지 사유제였다.
타율성론에 대해서는 신채호나 정인보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주로 반응했다. 고조선 역사를 강조했고, 외세로 간주된 한사군은 한반도 바깥으로 비정되면서 한국사에서는 소거됐다. 심지어 태고 시절에 우리 민족이 중국 본토까지 지배한 바 있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 일대로 확장해 이해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독립군들이 만주를 주 무대로 활동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은 아무런 연원 없는 타국의 땅이 아니라 옛 조상들과 관련된 곳이었다.
‘이병도’라는 문제적 인물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처럼 식민주의 역사학과 치열하게 대립했다. 다만 한계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도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 이론을 세계적 보편이자 과학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당위와 개인적 바람을 담은 선언적 경향이 강했다.
식민사학 극복에 힘쓴 한국 근대 역사학의 계보를 더듬는 와중에 ‘이병도’라는 문제적 인물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이비역사가들은 현재의 한국 역사학계를 두고 ‘식민사학자인 이병도의 후예들’이라고 공격한다. 그런데 이병도는 스스로 일본 역사학을 극복하려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어떻게 극복했다는 걸까.
이병도가 내세운 것은 ‘실증’이었다. 일부에선 실증주의야말로 식민사학을 극복할 사관 또는 역사 연구 방법론으로 간주했지만, 이병도의 노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를 이끌던 이병도에게 남은 것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테두리 내에서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학문적 경쟁의식일 뿐, 식민주의 역사학 극복을 위한 대안적 ‘사관’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식민주의 역사학의 시선을 공유했고 후학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1960년대 4·19를 계기로 식민사학 극복의 본격적인 전기가 마련된다. 4·19를 계기로 ‘민족주의 고양’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극복, 그리고 새로운 한국사상의 수립이었다. 양자의 합작품이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를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이 외국 문명인 한사군의 세례로만 서술했던 고대국가의 성립을 달리 해석한 연구가 나왔다.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연구였다. 이기백은 ‘성읍국가-연맹왕국-왕족 중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단계를 설정했고, 서구 인류학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한국사상에 독자적인 국가 성립 과정을 복원한 연구도 등장했다.
조선의 후진성을 강조하던 식민주의 역사학에 저항하며 조선 후기를 새롭게 쓰기도 했다. 일종의 토지대장인 ‘양안’ 연구를 토대로 차경지 경영을 통해 부농이 된 ‘경영형 부농’의 존재를 밝혀내고, 조선 시대 안에 잠재된 자본주의의 맹아를 지적한 김용섭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 조선 후기 실학에 보이는 ‘근대 지향성’ 강조 등 조선 사회 내부에 근대성이 내재돼 있었음을 밝히려는 연구가 활발했다. 1980년대에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내재적 발전론’이 민중론과 결합하면서 민중사학, 과학적·실천적 역사학 등 사회운동 또는 민족운동과 연관된 역사 서술도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이후 새로운 문제의식으로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되면서 ‘내재적 발전론’ 비판이 시도되기도 했다. ‘내재적 발전론’조차 서구적 근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식민주의 역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역사는 만족을 위한 게 아니다21세기, 2017년의 역사학계는 어떨까.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수십 년간의 노력을 딛고 서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수정·보완을 시도하는 흐름과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극복을 서구적 근대성과 발전론으로부터의 독립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공존한다. 그 와중에 역사 연구의 주제는 훨씬 넓어졌고 전문화됐다. 세계적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은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한다”고 했다. 역사학자들은 민족을 넘어선 새로운 역사의 주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역사 연구에서 탐색하고 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을 위해 고투하는 역사학계에 식민사학·친일사학의 프레임을 덧씌우는 일은 무엇을, 또 누구를 위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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