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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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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내세우는 ‘가짜’ 프레임

2600기 무덤, 1만5천여 점 유물 등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물증을

무조건 가짜이고 조작이라 말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망상
등록 2017-08-15 09:08 수정 2020-05-02 19:28
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역사 유물 연대 측정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평양은 갑자기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사이비역사가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북한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이처럼 보편적 학문의 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사진은 단군릉 전경. 한겨레

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역사 유물 연대 측정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평양은 갑자기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사이비역사가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북한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이처럼 보편적 학문의 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사진은 단군릉 전경. 한겨레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며, 고조선 멸망 뒤 세워진 낙랑군의 위치 역시 평양 일대라는 것은 아직 낙랑군이 존속하던 3세기에 저술된 중국 역사서 와 약간 뒷시기에 저술된 등의 기록(제1174호 진짜고대사 ③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참조)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여기에 오랜 기간 쌓인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까지 더해지면, 낙랑군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는 일은 학술적으로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평양 일대에서 무수히 출토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 즉 ‘스모킹건’이다.

고분이 중국 포로들 거라고?

하지만 사이비역사가들은 물증이랄 수 있는 고고학 유물의 존재를 왜곡 또는 무시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정설을 무조건 ‘식민사학’ ‘매국사학’으로 매도한다. ‘진짜고대사 ④’에서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평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을 살피고, 더불어 사이비역사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대하는 비상식적이고 억지스러운 태도도 짚어보려 한다.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 유물 중에 문자가 적힌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琅富貴) 같이 ‘대놓고’ 자기 소속을 밝힌 막새기와가 있다. 막새기와는 기와 건물의 지붕 끝에 설치하는 마감용 기와다. 장식적 기능이 있어 다양한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놓곤 했다. 또 낙랑군에 속하는 25개 현 중 23개 현의 이름이 확인되는 봉니((封泥)도 수백 개 발견됐다. 봉니는 문서나 귀중품을 상지에 넣고 끈으로 묶은 다음 매듭에 진흙을 붙인 뒤 도장을 눌러 봉한 것을 말한다. 봉니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위조설 시비가 일었지만 이후 연구를 통하여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봉니는 진품으로 볼 수 있음이 확인됐다.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임을 입증하는 무덤 유적은 더욱 압도적이다. 북한 학계는 199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평양시 낙랑구역(구역은 서울의 ‘구’ 개념으로, 평양시 18구역 가운데 한 곳이 ‘낙랑구역’이다) 안에서만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을 발굴했고, 유물 1만5천여 점을 수습했다. 무덤 유형은 주로 덧널무덤(목곽묘·북한에서는 이를 형태에 따라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으로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과 벽돌무덤으로,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같은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들 무덤 안에서는 ‘중국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대표적 유물로 칠기(漆器)가 있다. 칠기는 나무에 옻을 칠한 물건이다. 칠기는 한나라에서 중요한 신분인 이들의 무덤에 묻히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 칠기 1점 가격이 청동 술잔 10개의 값어치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물증’이 있는데도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가짜’와 ‘조작’이라는 프레임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이 유적·유물이 낙랑군과 상관없다고 애써 우기거나 조작된 가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인다. 예컨대 사이비역사에 경도된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거대한 낙랑 고분군에 대해 고구려에서 잡아온 중국계 포로들의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에 대해 팩트체크를 해보자. 평양 지역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칠기 중 제작 연대가 적힌 것만 수십 점에 달한다. 이를 통해 무덤이 조성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칠기 중 제작 시기가 이른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기원전 85년의 것이며, 다른 것들도 대개 기원 전후 시기가 적혀 있다. 기원전 85년은 에 따른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 연도보다 50여 년 전이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자면 아직 건국조차 하지 않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이미 평양 일대까지 영역화했고, 수만 명의 중국인 포로를 잡아다 정착시킨 셈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위조품?

사이비역사가들이 기대는 최후의 보루는 조작설이다. 그들은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을 덮어놓고 ‘가짜’라고 단정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3년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다. 이 유물은 3개의 넓적한 나무판에 붓글씨를 이용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에 속한 모든 현의 인구수를 기록한 행정 문서다. 낙랑군 전체 인구 자료가 평양에서 발굴된 것은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 평양임을 말해주는 명확한 증거다.

평양에서 출토된 이 자료가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였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는 나무판에 글씨를 써 문서를 작성한 ‘목독’ 자료인데, 이덕일 소장은 목독은 휴대가 가능해 요서 지역에 살던 낙랑군 관리가 이것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와 묻혔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동시에 어떤 강연회에서는 초원 4년 현별 호구부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위조품으로, 나중에 파내려고 몰래 묻어놓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낙랑군을 평양에 두기 위해 일본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는 사이비역사가들의 프레임은 식민사관의 하나인 ‘만선사관’만 제대로 알아도 허위라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흔히 일제 식민사관은 ‘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가두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만선사관은 오히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하나의 역사 단위로 묶어 이해하려는 역사관이다. 물론 그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만선사관은 일제의 만주 침략과 밀접하게 연동됐으며, 당시 중국 대륙을 넘보던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제시됐다. 조선인에게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이 있다면, 이미 현실세계에서 조선인을 지배하는 일본에도 만주 지역에 대한 연고권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식민사관이 작동했던 시대적 맥락을 안다면, 일본인들이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낭비해가며 평양 지역에 낙랑군 유적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차라리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제2의 왕검성 ‘창조’한 이유

이덕일 소장을 비롯한 사이비역사가들은 평양 일대에 존재하는 낙랑군 유적의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 북한 학계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한다. 수천 기에 이르는 낙랑 유적을 발굴한 주체인 북한 학계에선 정작 이것을 낙랑군 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남한 학계가 엉뚱하게 거짓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가 낙랑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학계가 그처럼 무리한 견해를 고수하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학계에서 평양 지역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존재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주로 고고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60년대에 이르러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요하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을 국가가 공인한 정설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고조선 중심지에 설치된 낙랑군 역시 자연스럽게 한반도 밖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됐다. 이는 고조선 영역을 광대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망과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때나마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작동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므로, 국가에서 공인된 학설만이 정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낙랑군 평양설’은 북한 학계에서 일체 배제돼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30여 년간 지속되던 북한 학계의 정설에 큰 변화가 발생한 계기는 1993년 단군릉 발굴이었다. 단군릉은 본래 평양시 강동군의 대박산 기슭에 있던 돌방흙무덤이다. 조선시대부터 단군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사실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북한의 절대 권력자인 김일성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시에 따라 이 무덤의 전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해당 무덤은 5세기대 고구려 무덤임이 확인됐다.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 장식 등은 고구려의 왕족이나 유력 귀족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학계에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야 어떠하든 이 무덤은 국가 방침에 따라 반드시 단군릉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서 출토된 인골의 의문스러운(?) 연대 측정을 통해 무려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는 최종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후 단군릉은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복원됐고, 단군릉이 발견된 평양 지역은 갑작스레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북한은 평양에서 발원한 문명을 ‘대동강 문화’라 명명했고 이어 ‘세계 5대 문명’이라는 선전이 이어졌다.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라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북한은 30여 년간 이어오던 정설을 뒤집었다. 이제는 평양 지역이야말로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있던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용납될 수 없었다. 고대 사료를 볼 때 고조선의 왕검성과 왕검성에 설치된 낙랑군은 다른 지역일 수 없다. 북한 학계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평양에 고조선 수도 ‘왕검성’을 두고 대신 요하 유역에 ‘제2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논리를 창조했다. 나중에 낙랑군이 설치된 왕검성은 바로 요하 유역 제2의 왕검성이라는 것이다. 북한 학계 외에 어느 나라 학자들도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준다. 쇼비니즘적 욕망과 정치적 목적성이 학문에 개입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 하는 점 말이다.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로 말한다.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요서 지역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요서 지역에서 낙랑군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면 된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런 물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평양 지역에서 확인된 수많은 증거물에 대해 ‘조작’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사이비’ 딱지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기경량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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