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기자는 인터뷰의 최고 경지는 가족 인터뷰라고 했다. 가장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사이일수록 인터뷰로 인한 상처는 더 크고 깊을 수 있고, 혹시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조심스러워 어떤 질문도 꺼내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인터뷰 상대는 ‘가족’
내 어머니는 부산에 혼자 살고 계신다. 언젠가 통화에서 어머니는 “네가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아직도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해 마음이 안 좋다.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게끔 좋은 머리와 신체를 줬다고 생각해라”고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몇인데, 부모님을 원망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라고 답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사실 어머니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머리를 물려받은 덕에 인터뷰 과정에서 이것저것 잘 기억해 질문할 수 있고, 특별히 모나지 않은 외모 덕분에 인터뷰이에게 나쁜 인상을 주진 않는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간혹 매를 들어 내게 인내심과 겸손함을 심어주는 동시에 늘 상대방보다 몸을 낮춰야 한다는 자세를 심어줬고, 가끔 다락방에 가둬 자기반성과 관찰력을 갖게 했다. 역설적으로 이것들이 어우러져 인터뷰어로서의 자질이 형성됐는지 모른다.
2010년 처음 얼굴을 마주한 양익준 감독(사진)과의 인터뷰는, 그래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는 영화 로 인해 자기 뇌의 용량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이 들어왔다며 어지러움과 답답함을 호소했다. 나 역시 가벼운 공황장애 증세에 시달릴 때였다. 인터뷰 중 갑자기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태의 두 남자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뒤 2012년 라는 책을 냈다. 인터뷰 뒤 가장 부러웠던 점은 양익준이 를 통해 가족과 화해할 단초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족에게 직접 하기 힘든 얘기를 영화를 통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양 감독의 아버지는 를 본 뒤 가족회의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얘기했단다. 단순하지만 힘있는 그 한마디로 양익준 감독과 가족 사이에 화해의 단초가 마련됐을 테다. 양익준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진 질문에 아버지가 화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익준과의 여러 에피스드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양익준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시사회에 나를 초대했다. 근처 술집에서 배우 몇 명과 뒤풀이를 하던 중 예전에 인터뷰한 감독이 다른 테이블에 있었다. 그분께 실수를 범했던 일이 생각나 사과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분도 계속 일행과 대화 중이었다. 결국 그 자리가 끝날 무렵에야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분은 반가워하신 것도 잠시, 내가 “그때 죄송했습니다”라고 하자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냥 서 있기도, “이 정도로 화를 내실 일은 아니다. 감독님의 잘못도 있다”고 항변하기도 애매한, 그렇다고 자리에 다시 앉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그의 짜증을 들으며 서 있는 5분 남짓한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술집을 나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인지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양익준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많은 위로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를 폭력적인 영화라고 하지만, 는 폭력을 성찰하게 하는 영화다. 우리 안의 폭력을, 그 폭력의 비극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힘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다.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그냥,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같은 사람에게 왜 그래?”이다.
분노조절장애 한국에 필요한 ‘미용고사’
분노에 가득 찬 질풍노도의 젊은 시기를 보냈던 양익준은 이제 ‘미용고사’를 입에 달고 산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네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낸 것이다.
양익준은 이렇게 말한다. “살면서 쌓인 많은 것들, 화, 분노 이런 것이 실은 대단한 것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따뜻한 사과 한마디에 상당 부분 풀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나도 용기 내서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 내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한국은 분노조절장애와 피해의식의 사회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 선수가 부진하다고 “도륙해서 고기로나 써야 한다”는 댓글을 달고, 아파트 도색 작업 중 휴대전화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고 로프를 끊고, 인터넷 애프터서비스(AS) 기사를 살해하고, 층간 소음 시비로 이웃을 죽이기도 한다. 지금 우리에게 ‘미용고사’의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문득 양익준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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