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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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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라, 육아 동지들’

9개월 만에 복직 앞두고 돌아보니

육아와 가사노동 향한 시선 달라져
등록 2017-04-16 17:10 수정 2020-05-03 04:28
고된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이의 웃음을 보면 육아휴직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된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이의 웃음을 보면 육아휴직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9개월 전,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페이스북에 일상에 대한 글을 올릴 때마다 늘 스스로를 검열했다. 일터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지인들에게 평일 한낮의 풍경을 전하는 게 한가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지금, 더는 눈치를 보지 않는다. 평일 한낮의 집 역시 어느 직장 못지않은 고된 일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은 내게 그동안 몰랐던 ‘다른 세계’를 열어줬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누군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구나’ 싶으면서 가슴 한구석이 무겁다. 갓난아기를 안고 동네를 서성이는 푸석한 얼굴의 엄마들을 볼 때면 속으로 ‘얘야, 어서 코 자라’ 하고 말한다. 한 손에는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론 유모차를 미는 이들을 볼 때면 ‘외출하느라 고생하셨네요’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려 한다. 바닥에 주저앉아 떼쓰는 아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양육자들의 표정에 내 얼굴이 겹쳐진다. 마트에 분주하게 식재료를 골라 담는 주부들을 보면 ‘딴 집은 매일 뭐 해먹고 사나’ 궁금해진다. 햇볕 쨍쨍한 날 이불을 빨아 널거나 카펫의 먼지를 떠는 부지런한 이들이 보이면 우리 집 이불과 베갯잇이 눈에 밟힌다. ‘아, 오늘 하루도 쉴 틈이 없겠구나.’

직장에서 긴장의 끈을 놔버리면 문제가 생기듯, 육아와 가사노동이라는 세계 역시 긴장을 풀 경우 큰일이 난다. 잠시만 방심해도 아이 얼굴에 생채기가 나고,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집 안에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가 굴러다닌다. 설거지를 대충 하면 아이 물통의 고무 패킹엔 불그스름한 곰팡이가 핀다. 아이의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고 아내와 함께할 저녁을 마련하노라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간다.

물론 직장생활처럼 이 세계도 고된 만큼 보상이 있다. 이른 아침, 창가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아이는 뭐가 좋은지 연신 까르르 웃는다. 나는 그때만큼은 느긋하게 아이와 햇살 속에서 뒹군다. 하루 종일 먹고 싸고 울기만 하던 아이는 어느새 (부정확한 발음이나마) “아빠, 이거 뭐야?”라고 소리친다. 같이 길을 나서면 경비 아저씨한테 손을 흔들고 강아지를 보면 “멍멍”, 참새를 보면 “짹짹” 한다. 사진으로 갈무리해도 온전히 간직할 수 없는 값진 순간들이다.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한 뒤 아내에게 큰소리를 탕탕 칠 수 있게 된 것도 예상치 못한 ‘소득’이다.

복직을 며칠 앞두고 아이의 사진과 그동안 이 공간에 써온 글을 다시 들춰봤다. 육아휴직은 영화 속 ‘빨간 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가 내민 빨간 약을 먹고 생각지도 못한 ‘현실 세계’와 마주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육아와 가사노동이라는 고된 현실을 은폐하려 드는 영화 속 매트릭스 세상 같기도 하다. 기억을 지우는 파란 약 대신 빨간 약을 고른 네오는 이전의 안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 역시 한번 육아휴직을 선택한 이상, 복직하더라도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목격한 이 세계를 외면할 수 없으므로.

빨간 약을 먹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동지가 많아질수록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사회에 한 걸음 다가갈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종일반 신청을 하려고 주민센터에 갔다. (전업주부나 육아휴직자는 맞춤반을, 맞벌이 부부는 맞벌이 사실을 증명하고 종일반을 이용한다.) 친절한 직원은 신청서 곳곳의 ‘모’라고 적힌 항목에 연필로 표시한 뒤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표시한 곳에 작성하시면 돼요.” 관성은 무섭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얼굴을 붉혔다. “아, 아빠셨죠. 아빠 육아휴직이셨죠.”

글·사진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이승준 기자의 ‘주양육자 성장기’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글을 아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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