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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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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오프스피드’

허 찌르는 아이의 속도, “에라 모르겠다”로 맞추다
등록 2017-01-20 15:52 수정 2020-05-03 04:28
아이는 이삿짐을 실어나르는 사다리차만 보면 넋을 놓고 구경한다. 마음이 바쁜 주양육자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지만, 아이는 꿈쩍도 안 한다. 한겨레 이승준 기자

아이는 이삿짐을 실어나르는 사다리차만 보면 넋을 놓고 구경한다. 마음이 바쁜 주양육자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지만, 아이는 꿈쩍도 안 한다. 한겨레 이승준 기자

프로야구에서 자주 쓰는 용어 중 ‘오프스피드’(off-speed)라는 말이 있다. 투수가 시속 150km 강속구만 던진다고 타자를 이기는 게 아니다. 투수의 공을 많이 상대할수록 타자는 공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불같은 강속구를 쳐낼 수 있는 원리다. 그래서 투수는 타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강속구를 던지다가도 느린 변화구를 던져 허를 찌르는데, 이게 오프스피드다. 강속구를 예상하던 타자에게 느린 공은 실제보다 더 느리게 보인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야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육아휴직 뒤 내 모습이 헛스윙만 하다 삼진아웃 당하는 무기력한 타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이는 변화무쌍한 오프스피드로 공을 던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유형의 투수였다.

휴직 초기에 나는 직장인처럼 일하던 대로 육아에 임했다. ‘기상→기저귀 갈기→체온 확인→아침식사→간식→낮잠→간식→목욕….’ 주어진 임무를 하나씩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8년 넘는 직장 생활 동안 ‘빠른 공’에만 적응하며 달려온 내 착각이었다.

아이는 절대 내 속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특히 나를 쩔쩔매게 한 것은 목욕 뒤 옷 입히기였다. 목욕을 끝내고 기저귀를 채우려면 아이는 오열하며 거부한 뒤 ‘올누드’로 집안을 뛰어다녔다. 로션을 발라주려 하면, 자기 손에 짜달라는 요구를 ‘무한 반복’했다. 기저귀를 들고 쫓아다니는 동안 아이가 바닥에 오줌을 갈기는 참사(?)도 벌어졌다. 요새는 외출하다 이삿짐을 실어나르는 큰 사다리차만 보면 넋 놓고 구경하는 아이를 잡아끄느라 진땀을 뺀다.

‘루킹 삼진’을 당하고 애꿎은 방망이를 내팽개치며 화풀이하는 타자처럼, 마음대로 안 되는 아이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옷 안 입으면 감기 걸릴 텐데’ ‘빨리 가야 하는데’ ‘감기 걸리면 고생인데’ 같은 생각이 이어지며 조바심에 화를 내고 무력감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나는 ‘유희관’(느린 속구와 오프스피드로 2016시즌 15승을 거둔 두산 베어스 투수)을 키우고 있는 건가!

나는 왜 빨리빨리 해치우려고만 할까. 어른 시계와 아이 시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 속도에 적응해보려고 마음먹으니 변화가 시작됐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목욕 뒤 (‘참사’를 막기 위해 기저귀만 억지로 채우고) 아이를 내버려뒀다. 한참 휴지기를 가진 뒤 아이는 거짓말처럼 순순히 옷입기에 응했다. 아이 손에 로션을 짜주고 얼굴과 몸에 바르게 하니 보채지 않았다. 사다리차에 정신 팔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멈춰 서서 이삿짐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한참 지켜본 뒤 “○○야, 아저씨들한테 방해가 되니까 이제 그만 가자”고 하면 아이는 순순히 내 손을 잡았다. 따져보니 짜증 내고 화내는 시간이나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는 시간이나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투수가 능수능란하게 오프스피드로 공을 던져도, 타자는 열 번 중 두세 번은 안타를 친다. 정답은 없다. 공의 속도에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해설자나 타격 코치들은 “타석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투구 패턴을 파악하라”고 조언한다.

각양각색의 투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아이의 성격과 성장 단계에 따라 주양육자는 오늘도 각자 타석에서 다양한 문제로 고전할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전설적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삼진은 홈런으로 가는 길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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