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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맞닥뜨릴 세계

자베스 첫 번역집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등록 2017-03-10 23:37 수정 2020-05-03 04:28

프랑스 시인 에드몽 자베스(1912~91)의 시집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가 자신의 문학적 모범으로 자베스를,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진정한 시인”으로 자베스를, 1967년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에서 4대 프랑스 작가로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자베스를 꼽았다. 이곳에선 귓결로만 들리던 궁금한 이름.

시인 이성복이 외국 시인들의 시를 옮겨 적은 뒤, 거기서 흘러나온 자신의 시 100편을 나란히 써놓은 형태의 여섯 번째 시집 (2003). 이 책 속에서 자베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블로 네루다, 파울 첼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로버트 프로스트, 아르튀르 랭보,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이름들과 함께 인용됐지만 많은 독자에겐 오랫동안 유독 낯선 이름이었다. 적어도 단행본으론 번역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덤이 없는 자들은? (…) 우리의 그림자들은 모두 절규라네,”(‘헌사’) 에 인용된 이 시 하나로도 자베스의 우주는 짐작될 수 있었다. 발견되지 않은 별 단 하나에도 충일한 에너지가 있는 곳을 우리는 우주라 부른다.

(에드몽 자베스 지음, 최성웅 옮김)에는 전복, 신, 무한, 문체, 책, 죽음, 무, 공허, 모래 등이 ‘요주의 단어’로 되풀이된다. 자베스 생전 마지막으로 나온 이 시집의 마지막 시는 ‘모래’. 자베스는 이집트 출신이다. 무한은 꼭 길거나 크지 않다는 것, 모래처럼 한 줌조차 셀 수 없는 것이야말로 무한하다는 사실을 사막에서 배웠을지 모른다. (“가장 긴 선은, 최초에, 가장 짧은 선이었다. 점을 초월하려는 진정되지 않는 욕망 자체였다.” 29쪽)

신부터 모래까지, 종교적일 정도로 광막한 시어들의 다발에 ‘전복의 서(책)’란 이름이 붙었다. 번역가 최성웅씨는 “독자는 책과 거리를 둔다. 독서할 때 물리적으로 30cm 정도 거리를 둘 뿐 아니라, 내용과도 거리를 둔다. 아주 내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에서 안전하다고 믿는 거리마저 뒤집어버리는 글. 자베스는 그런 글을 쓰길 원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신은 인간을 제 전복의 영상으로 창조하였다./ 신성하든 인간적이든, ‘나’는 모든 전복의 무대다./ 살아가는 기술, 그것이 바로 전복에 내몰린 기술이다! 그때가 곧 지혜의 시작일 수 있으니.” 38쪽, “글은 거울이 아니다. 쓰기란, 미지의 얼굴을 맞닥뜨리는 행위다./ 분별없는 바다이기에, 한 차례 파도로는 죽을 수 없다.” 8쪽)

자베스는 파울 첼란(1920~70)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유대계 시인이다. “자베스가 볼 때, 글쓰기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서는 대학살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언어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려면 작가는 자신을 의심의 유배지, 불확실성의 사막으로 추방시켜야 한다”(폴 오스터)는 의견에 공감하는 이들에겐, 이탈리아 국적을 갖고 이집트에서 태어나 프랑스 이민자로 살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프랑스어로 시를 쓴 자베스 역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가능하게 했다.

석진희 디지털뉴스팀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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