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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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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 날자꾸나!

서울 만리동 산꼭대기 예술인마을에서 펼쳐지는 다큐 연극 <아임언아티스트>
등록 2017-02-01 22:13 수정 2020-05-03 04:28

# 104m 산꼭대기 예술인주택

해발 104m 봉학산 꼭대기에 위치한 만리동 예술인주택 ‘막쿱’.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제공

해발 104m 봉학산 꼭대기에 위치한 만리동 예술인주택 ‘막쿱’.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제공

청색버스 163·261·463·604번과 녹색버스 8001번을 타고 ‘만리동 고개’ 정류장에 내리면 만나는 산동네. 객공 구함, 시다 구함. 환일고등학교 언덕길을 오르면 전봇대나 창틀마다 봉제공장 구인광고가 먼저 눈을 맞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미싱은 24시간 내내 ‘잘도 도네 돌아간다’.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접근성이 좋아 24시간 봉제기계 수리를 하는 가게, 실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 ‘르호봇’이라는 제법 큰 봉제회사도 있습니다.” 관광안내원처럼 작은 세모 깃발에 핸드마이크를 든 이은서 연출의 설명이다. 그는 1월14~18일 서울 중구 만리동2가 만리동 예술인주택에서 공연한 연극 의 연출자다. 연극의 한 부분으로, 수십 명의 관람자를 산꼭대기 예술인마을까지 안내하는 참이다.

처마를 맞댄 1970년대식 주택과 낡은 가게 간판들 위로는, 원주민이 떠난 공간에 25층 신축 아파트가 우람하게 몸집을 불리고 있다. 다시 가파르고 촘촘한 목조 계단.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해발 104m 봉학산 정상이 나타난다. 옛날옛적 인근 학교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일합’을 겨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고개를 들면 예술인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막쿱’(Mallidong Artists Cooperative, M.A.Coop)이 우뚝 섰다. 서울역, 공덕역, 충정로역 방면에서 각각 치달려온 1월의 칼바람이 울력성당으로 관객의 귀와 볼을 호되게 후려친다. “웰컴 투 막쿱, 관객 여러분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 “연극보다 육아, 나는 예술인인가”

예술인주택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날마다 15~20분가량 고난의 길을 올라야 하는 ‘달동네’다. 2013년 조합을 결성하고 2015년 입주를 시작해 29가구 중 현재 27가구에 66명이 살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5층, 2개 동 주택의 한 가구는 60m²(18평) 미만으로, 스튜디오형 9가구, 방 2개와 3개짜리가 10가구씩이다. 주변 전세 시세의 80% 수준으로 길게는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입주 자격은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영화·연예·국악·사진·건축·어문·출판 등 문화예술진흥법이 규정한 예술 분야에서 일하고 ‘적당히 가난해야’ 한다. 돈이 너무 많으면 자격 미달이고 너무 적으면 임대료를 못 내니까.

예술인 이웃들을 보며 자극받기도 하지만,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예술인주택 예비 입주자를 2배수 45가구 뽑으면서, 이은서 연출은 “경쟁자들보다 내가 예술인주택에 더 적합한 예술가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들어온 뒤에도 두 아이를 키우느라 연극보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아, 나는 지금 뭐하는 거지? 아, 나는 과연 예술가인가? 그리고 놀이터에서 이웃 엄마들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연출은 “예술인주택에서 출산과 경력 단절의 두려움을 겪으며, 함께 두려워했던 다른 엄마 예술가들과 공연을 도모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터뷰와 토론으로 공동 창작했다. 202호에 입주한 구정연 작가의 아이디어가 첫 출발이었고, 2016년 11월 포럼을 열어 연극 방향의 큰 틀을 짰다. 넓게 보면 다큐멘터리 연극 범주에 들지만, 이 연출은 굳이 ‘자기 서사 기반 연극’이라고 규정한다. 지극히 사적인 얘기가 어떻게 다큐에서 연극이 되고 다시 연극에서 다큐가 되는지 보여준다는 의미다.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임 언(an) 아티스트’(난 일개 예술가다)라면서도 ‘아임 언(un) 아티스트’(난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부정한다. 한편으론 ‘아임 언(frozen) 아티스트’(난 졸아 있는 예술가다)라며 불안감을 표출한다.

# 삶과 예술의 관계 맺기는 진행 중

서울 만리동 예술인주택 ‘막쿱’에서 공연한 연극 <아임언아티스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왼쪽)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규정된 틀을 깨려는 시도로 보인다.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제공

서울 만리동 예술인주택 ‘막쿱’에서 공연한 연극 <아임언아티스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왼쪽)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규정된 틀을 깨려는 시도로 보인다.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제공

예술인주택 1층 커뮤니티룸에서 공연이 시작됐다. 이소영 무용가는 슬럼프를 겪던 일화를 소개하며 관객에게 간단한 춤을 가르치고, 김승언 배우는 실입주자의 2배수로 뽑은 예비 입주자 45가구가 겪은 심리적 부담감을 소개하고, 김수진 배우는 입주자 역할을 연기한다. 이선시 무용가는 테크닉이 아닌 춤의 본질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묻는다.

하이라이트는 연극 마지막을 장식한 ‘하루살이와 날개’다. 이소영 무용가의 글과 이선시 무용가의 안무를 보태, 배우들이 낭독과 춤을 펼친다.

“나는 하루를 산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 날개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 힘만으로는 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아팠다. 끝이 났다. 날개를 벗었다. 뜯어내야 했다. 텅 빈 몸. 다시 태어난다 해도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날개 없는 날갯죽지가 숨을 쉴 때마다 움직였다. 내 힘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접혀서 만난다.”

이소영 무용가는 출산 뒤 ‘날개’라는 춤꾼의 삶은 사그라지고 ‘텅 빈 몸’만 남았다. 예술가의 날개는 꺾였지만, 꿈은 죽지로 남아 아직 꿈틀거린다. ‘접혀져 만나는 시간’은 출산 전과 출산 후의 시간이 만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한다는 뜻일까? 경력 단절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이상의 시 ‘날개’의 한 구절 “날자, 날자꾸나”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들은 접이식 유리문을 열고 예술인주택 밖으로 나갔다. 맵찬 바깥바람이 점령군처럼 실내로 쳐들어왔다. 소름 돋는 상쾌함이다.

예술인주택 공급자인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규정한 예술인이라는 고정관념의 틀, 예술인 스스로 갇힌 정체성의 틀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산꼭대기 예술인주택은 집의 안과 밖, 예술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공간이다. 도시에서의 삶과 예술은 어떤 관계인지, 삶과 예술은 어떻게 나란히 갈 수 있는지, 예술인주택 예술인들의 질문과 관계 맺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는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의 유망연출가 지원사업 ‘뉴스테이지’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은서 연출은 최근 ‘블랙리스트 사태’를 접하며 “사회적 문제와 마주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손준현 대중문화팀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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