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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같은 현실 현실 앞에 예술

검열, 블랙리스트, 문화예산 횡령 의혹…

무용·음악인까지 시국선언 나선 이유
등록 2016-11-12 05:17 수정 2020-05-03 04:28
정영두 안무가가 지난 10월29일부터 영국 런던 주영 한국문화원 앞에서 용호성 한국문화원장에게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술 검열 사태의 책임을 묻는 시위를 하고 있다. 정영두 제공

정영두 안무가가 지난 10월29일부터 영국 런던 주영 한국문화원 앞에서 용호성 한국문화원장에게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술 검열 사태의 책임을 묻는 시위를 하고 있다. 정영두 제공

“George Orwell’s 1984 is not fiction. It’s the reality in Park Geun-Hye’s South Korea. Not Censorship!”(조지 오웰의 는 소설이 아닙니다. 2016년 박근혜의 한국에서는 현실입니다. 검열 반대!)

정영두(42) 현대무용 안무가가 영국 런던 주영 한국문화원 앞에서 든 손팻말 글이다. 그는 10월29일(현지시각)부터 지금까지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급 공무원인 용호성 주영 한국문화원장에게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술 검열 사태의 책임을 묻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아 참, 죄송함을 밝힌다. 이 연재물 이름이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의 준말 ‘첫공막공’인데, 이번엔 무대 밖 얘기를 좀 해야겠다. 무대에 있어야 할 예술인들이 무대 밖으로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문화융성, 창조문화융합’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국가정책이 사실은 최순실과 차은택 등 특정 개인의 사익을 위한 거짓말이었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문화예술 고위 관료와 기관장들이 옷을 벗고, 그 자리엔 입맛에 맞는 ‘예스맨’들로 채워졌다.

문화예술계 내 ‘그들만의 프리패스’

그들의 사익을 위한 ‘프리패스 진용’이 갖춰지자, 예술가에게 돌아가야 할 수조원대의 정책지원금이 그들 배를 불렸다. ‘해처먹고 말아먹는’ 것도 모자라, 검열과 탄압으로 예술가의 팔을 비틀고 영혼을 옥좼다. ‘절차적 민주주의’ 쟁취 이후 이토록 광범위한 검열은 없었다고 예술인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른다.

1987년 6월 항쟁 이래 최대 규모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은 스스로 ‘블랙리스트 예술가’라고 부른다. 검열과 블랙리스트라는 참담한 시대, 예술가의 예술적·사회적 존재가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다고 느낀다. 여러 시국선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예술 분야가 있다.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던 무용인·음악인들의 시국선언이다.

국가지원금 거부할 줄 아는 자존감
김윤진 안무가가 지난 11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선녀 퍼포먼스’를 통해 범무용인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김윤진 페이스북 갈무리

김윤진 안무가가 지난 11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선녀 퍼포먼스’를 통해 범무용인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김윤진 페이스북 갈무리

무엇이 이들까지 나서게 했을까? 먼저 정영두 안무가를 보자. 그는 지난해 국립국악원 검열 사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용호성 원장에게 검열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있다. 국립국악원(원장 김해숙)이 자체 기획 공연 에 참여할 예정이던 박근형 연출가를 배제하도록 출연진에게 요구하자, 이에 반발해 앙상블시나위·정영두 등 예술인들이 출연을 거부하고 1인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정 안무가는 검열과 블랙리스트, 그리고 ‘문화예산 횡령’을 어찌 보는지 궁금했다. 11월3일 런던에 있는 그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인터뷰했다. 그는 검열 논란을 부른 카카오톡을 쓰지 않는다. “사소한 발언이나 행동까지도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소설 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예술가들의 입과 눈을 통제하는 것은 곧 사회 전체를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원칙적이다. 주변에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시절, 교수의 허위 학력 의혹에 모두 침묵할 때 학교 게시판에 비판글을 올려 공론화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예의 바르다. 식사 자리에서 늘 상대 의자를 빼주는 등 배려한다. 그는 집요하다. 예술의 방식으로 용 원장의 책임을 끝까지 물을 참이다.

“검열이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저항하려 합니다. 예술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도 저항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바라는 것은 예술의 형태로 끝까지 가도록 애쓰겠습니다.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는 공직자가 많아진다면, 그들은 또 국민을 섬기기보다 지배하려 들 것입니다. 처벌받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정 안무가는 ‘창조경제를 내세운 문화예산 횡령’에 대해 예술가의 반성도 요구했다. “세금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많은 예술가가 자신을 마주해서 사고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와 보수, 순수와 대중예술을 떠나 지원금이나 경제적 이익을 좇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루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어울리지 않는 프로젝트라면, 아무리 이름을 알리고 국가 지원금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거부할 줄 아는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정 안무가가 비판한 대목은 보통 시민은 물론 대부분의 예술인이 고개를 끄덕일 내용이다. 이런 공감대가 그동안 소극적이던 무용인과 음악인들까지 시국선언 대열에 동참하게 했다.

11월3일 김윤진 안무가 등 무용인들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선녀 퍼포먼스’를 통해 검열과 블랙리스트 등에 항의했다. ‘무용인 시국선언’에는 하룻새 250명이 서명했다.

음악·무용인들 “그간 부끄러웠다”

김윤진 안무가는 솔직히 부끄러움 때문에 시국선언을 준비하게 됐다. “연극인들이 모여 블랙리스트와 검열에 반대하는 ‘대학로엑스(×)포럼’을 보고 부러웠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시국선언의 장르별 서명란에 보니 무용인들 이름이 있어, 우리도 따로 선언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많은 무용인이 참여하셨습니다.”

‘사회적 발언이 익숙지 않은 동네’라 무용인들은 서로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독려했다. 국공립단체 종사자나 교수들한테는 연락하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모이자고 한 게 250명이 됐다.

음악계도 다르지 않다. ‘음악인 시국선언’은 클래식과 국악, 대중음악계를 망라했다. 서명 시작 하루도 되지 않아 1427명이 동참했다. 선언문은 예술적 사건을 넘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세월호 참사,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개성공단 중단,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공권력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사망 등을 통틀어 고발한다.

그동안 음악계가 현실에 눈감아왔다는 점에서 보면 무척 놀라운 일이다. 피아니스트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칼럼을 통해 음악계가 사회적 발언에 소극적이던 모습을 되짚었다. “(20년 전 노동법 날치기 사태) 당시 음대 학생이었던 나는 명단 속에서 음악계의 서명부터 찾았다. 하나 한 사람도 보이질 않아 헛헛했다. 음악인들은 특히 클래식 음악가들은 그만큼 조심스럽다, 아니 무심하다. 세상의 풍파에 휘둘리지 않는 자발적 고립, 그 안에서 혹독한 자기 수련이 예술적 미덕으로 인정받는 분야인 것이다.”

손준현 대중문화팀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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