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탐사보도 독립언론 가 삼성가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을 단독 보도했다. 10·26 재·보궐 선거 투표소 변경 의혹, 4대강의 진실, 세월호 참사 정부 재난관리 시스템 불신 자초 등 기존 공중파에서 볼 수 없던 진실을 발굴한 매체다. 하지만 탐사보도로도 세상일을 다 파헤칠 수는 없다. 멀리는 천안함,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탐사보도는 ‘진실’을 갈구했지만 ‘의혹’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공안통치의 철권 앞에 진실의 접근권은 삼엄하게 통제됐고, 법적 진상 규명 기구마저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했다. 진실과 시민권의 위기 앞에서 언론의 (탐사)보도는 무력했다.
“연극은 기자들에게 엄청난 플랫폼”이런 비극적 현실에서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해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기자들이 실패한 것을 해낸다!” 어떻게 기자들이 실패한 것을 연극이 해낸단 말인가? 그는 연극 을 통해 1991년 영국 보수당 정부가 시행한 철도 민영화 정책의 폐해를 파헤쳤다. 민영화로 유발된 철도 사고의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를 만나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공무원들을 추적했다. 연극은 거의 모든 관계자 인터뷰를 거쳐 사고의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으며, 책임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점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또 다른 작가 그레고리 버크는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을 인터뷰해 를 썼다. 그러므로 ‘기자들이 실패한 것을 해낸다’는 뜻은 ‘기자들은 진실을 알리는 데 실패했지만, 연극은 실재 인물의 발언을 무대에서 재연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들처럼 사실을 그대로 재연하는 작품을 ‘버베이팀(Verbatim) 연극’이라 부른다. 버베이팀은 ‘말 그대로’ 또는 ‘문자 그대로’라는 뜻이다. 실제 사건의 영상물, 신문기사, 판결문, 속기록 등 기존 자료는 물론 직접 취재, 인터뷰, 녹취로 얻은 자료가 ‘그대로’ 연극이 된다.
199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한 ‘버베이팀 연극’은 이미 굳건히 자리잡았다. 버베이팀 연극에는 기자 출신 극작가 그룹도 있다. 대표적인 기자 출신 작가로는 일간신문 의 외교안보 에디터를 지낸 리처드 노턴 테일러가 첫손에 꼽힌다. “나는 연극이 기자들에게 엄청난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문이나 방송, 정치 게시판들과는 차원이 다른 더 많은 지면과 단어, 시각을 제공하는 미디어다. 주류 언론은 (청문회 등 사회적 사건을) 피상적·부분적으로 다룬다. (연극의) 2만5천 자는 (신문의) 250자보다 영향력이 크고, 관객 앞에서 무대 위 배우들의 입으로 전달했을 때 훨씬 강력해진다.”(2011년 5월31일 기고)
버베이팀 연극은 한국 연극계에도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올해 상반기 연극계 최고 문제작으로 꼽히는 김재엽 연출의 이 그중 하나다. 2015년 문화계를 들끓게 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치 검열’ 의혹을 다룬 작품이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의 발언을 속기록, 인터뷰, 언론 보도를 통해 ‘가감 없이’ 재연했다.
정치 검열과 소수자 차별·혐오를 꿰뚫다속기록을 보면, 문화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비판을 허용해야 된다”는 야당 의원 말에도 ‘동의’하고 “정치적 논란이 예상되는 작품은 지원을 철회해야 한다”는 여당 의원 말에도 ‘동의’한다. 예술위원장의 답변도 비슷하다. 연극은 실제 상황의 재연에 이어 실재 인물의 발언에서 모순점을 포착한다. 검열의 언어를 하나씩 ‘리플레이’해 검열의 모순을 캐는 것이다. 진실 공방으로 난마처럼 얽힌 언론 보도보다 훨씬 간명하게 연극은 ‘팩트’와 ‘해석’을 제시한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김재엽 드림플레이 테제21 대표는 “기존 연극은 드라마를 채우기 위해 부차적인 장면을 써야 하는데, 버베이팀 연극은 바로 핵심 사건으로 들어간다. 극장도 ‘세상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버베이팀이란 새로운 연극 양식이 들어올 틈이 생긴다”고 했다.
이 연극은 지난 6월 모든 자리 공연이 매진되면서 7월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같은 달 13일 도종환 의원을 비롯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민주 의원 7명이 이 연극을 단체 관람했다. 막이 내린 뒤 토크 콘서트가 진행됐다. 도 의원은 “국감에서 다뤄진 상황이 연극으로 구성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속기록, 언론 보도를 실제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검열의 본질을 꿰뚫었다면, 이연주 연출의 은 보수 쪽의 발언을 통해 보수 쪽 주장의 허구성을 파헤친다. 물론 전자와 마찬가지로 무대 위 언어는 차별받는 이들의 실제 육성을 가져왔다.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등에서 뽑아온 것이다. 새마을운동 다큐멘터리 영상물도 적극 활용했다. 특히 보수단체들이 규정한 퇴출 대상 ‘세월호, 동성애, 종북, 이슬람’ 등을 제시하면서 역으로 한국 사회의 억압성을 더 뚜렷이 드러냈다.
8월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불리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반’(동성애)을 다뤘다. 동성애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라면, 정치 검열은 차별과 배제,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두 사안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연주 연출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검열의 과정과 연결된다. 개인적 영역을 넘어 역사·제도적으로 학습되고 국가 정책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증언·발언을 날것 그대로우리 연극계에 나타난 버베이팀 연극이 어디 이 두 작품뿐이랴.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도 이미 무대화가 잦았다. 마지막으로 버베이팀 연극의 의미를 한 번 더 되새김해보자. 성수정 번역가는 “언론 보도와 청문회 기록을 출연배우가 그대로 재연한다. 철도 민영화 등에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국회 발언, 이라크전에 참전한 병사의 증언 등 실존 인물의 언행이 ‘날것 그대로’ 연극에 실린다”고 설명했다. 성 번역가는 7월 안산문화재단 주최 ‘극작가 워크숍’에서 버베이팀 연극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버베이팀 연극. 기대가 크지 않는가.
손준현 대중문화팀 기자 dust@hani.co.kr※‘손준현의 첫공막공’ 연재를 시작합니다. ‘첫공막공’은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의 준말로 공연예술 전반을 다루겠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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