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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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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타이밍

“태하 바보!” 누나도 도깨비에 빠진 엄마도 엇갈리기만 하네
등록 2017-01-06 20:03 수정 2020-05-03 04:28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는 큰아이. 둘째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다. 박수진 기자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는 큰아이. 둘째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다. 박수진 기자

벌써 찾아온 것일까. ‘둘이 논다’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첫째는 바운서에 앉은 동생과 대화를 시작했다. “태하야, 누나가 이거 읽어줄까?” 첫째는 내가 비장의 무기로 새로 구입한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장난감으로 놀아주는 일에 관심 없던 나는 아이가 둘이 되면서 새 장난감, 새 책 등 ‘새로운 것’에 집착이 생겼다. 결정적 혼돈의 순간에 꺼내어 단 10분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저지하고픈 마음에서다.) 책에는 큰아이가 좋아하는 펭귄, 고슴도치, 다람쥐가 구석구석 등장한다. 누나가 책 읽어주는 소리에 화답하듯 둘째는 옹알이를 시작했다. “아~, 오~, 쁘~.”

큰아이는 책을 읽어주고, 둘째는 옹알이를 하며 심지어 “이건 너하고 나하고 비밀이야”라며 비밀까지 만드는 꿀 같은 30분. 나는 재빨리 감자, 양파를 볶은 뒤 카레물을 부어 저으며 ‘여기가 천국인가’를 연발했다. 천국 같은 시간이 30분 정도 이어졌고 “외로워, 심심해”를 말하며 징징대는 큰 아이를 목격하지 않은 채 무사히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효과를 기대하며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친구·가족과 전화할 때 그 기적 같은 순간을 말했다. “글쎄, 첫째가 동생한테 책을 읽어주면서 30분을 놀더라고, 둘이서.” 첫째는 어른들끼리 자기 얘기를 하면 그게 칭찬이든 그저 행동 묘사이든 그 행동을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음날 예상대로 첫째는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겠다며 잠자는 아이를 바운서에 앉혀달라 법석을 떨었다. 둘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계속 잤다. 다음날 침대에서 잠들려는 동생에게 책읽기를 시도하던 첫째는 “태하, 바보”라며 토라진 목소리로 동생을 타박했다. 둘째는 누나의 책 읽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다음날 바운서에 앉아 놀고 있는 동생에게 책을 읽어주던 첫째는 또다시 “태하, 바보”를 외치며 책을 내팽개쳤다. 동생이 옹알이로 책읽기에 화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정말 기적이어서 기적이로구나. 첫째가 책을 읽어주고 싶은 순간과 90일 아기가 배고프지 않고 졸리지 않고 목욕한 지 얼마 안 돼 개운한 기분으로 옹알이하고 싶은 순간이 겹치는 일은 그 뒤로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 ‘미스 타이밍’의 문제는 식구가 한 명 늘어난 뒤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남편과 나는 두 아이 육아로 인해 각자가 느끼는 기쁨과 고독, 불안과 상실을 공유할 시간을 점점 잃어버렸다. 쉬는 날 낮에 남편과 큰아이는 쇼핑몰이든, 공원이든, 아쿠아리움이든 밖으로 나돌았다. 밖에서 찍은 큰아이 사진과 그날의 줄거리만이 부부간 대화창을 채웠다.

두 아이가 잠들고 나도 깨어 있는 몇 안 되는 밤에는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책을 읽는다. 때로는 잃어버린 지 오래된 연애 세포를 떠올리며 이어폰을 꽂고 도대체 늙지 않는 ‘도깨비 같은’ 동갑의 남자배우가 활약하는 드라마를 봤다. 남편이 뭘 말하러 나에게 왔다가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보고 돌아서는 등을 여러 번 봤다. 같이 소파에 앉았다가도 둘째가 찡얼대거나 첫째가 찾아 금방 일어서야 하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꽤나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부부였는데, 지금은 육아와 장보기 등 각종 집안일을 나누고 처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마저도 메신저를 통해서 할 뿐 대화다운 대화를 얼굴 보고 하는 시간은 사라졌다.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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