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는 ‘무성애자 라인’의 저주를 풀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과거를 고백했다. 이때 ‘무성애자 라인’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동아리에서 사용했던 표현으로, 실제 ‘무성애자’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개념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실수였다.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않는 이를 의미하니, 연애하지 않음을 뜻하는 이 라인에는 ‘비연애자’ 혹은 ‘연애 무첨가’라는 이름이 더 맞춤할 것이다.
20대 초반, 연애시장에 부나방처럼 뛰어들던 나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 찜찜함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연애가 계급의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하게도’ 미팅과 소개팅의 대상은 언제나 대학생이었고 연상이었으며 ‘인 서울’ 대학이었다.
그 경험은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기억을 소환했다. 흔히 ‘정상’ 교육과정이라는 12년의 수험 준비 기간, 나는 그 끝에 무엇이 든 줄도 모르면서 막연히 보물선이겠거니 하고 시키는 대로 줄만 당기는 레미제라블이었다. 옆에서 같이 당기는 친구와 ‘어깨빵’을 해가며, 맛없는 급식을 사료처럼 씹어넘기며. 선생님에게 무자비한 폭언을 당해도 생활기록부가 무서워서 찍소리 못하고, 밤이고 낮이고 문제집을 푸는 동안 머리 위에는 ‘엄마가 보고 있다’ ‘2호선을 타자’ ‘공장 가서 미싱할래, 대학 가서 미팅할래?’ 같은 문구가 급훈이랍시고 걸려 있었다. 이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며, 지금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다(자매품으로 ‘지금 공부하면 미래의 아내 얼굴이 바뀐다’가 있다).
‘공장-미싱/대학-미팅’이라는 도식은 대학의 간판을 기준으로 이 세상의 대우가 달라질 것을 암시한다. 이때 미팅은 성공적으로 그 과업(!)을 수행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며, 좋지 못한 성적은 곧장 공장과 미싱으로 치환된다. 10대 후반에게 대학생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은 학벌이 작동하는 연애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것을 요청하고, 연애를 특정 군의 생활양식으로 제한한다.
20대 초·중반의 연애는 항상 ‘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대학생’의 일상으로 가시화된다. 이것은 20대 초·중반이 종종 ‘대학생’으로 뭉뚱그려지는 안이한 범주화와도 관련이 깊다. 미디어나 풍문 속 연애는 언제나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연애 대상은 ‘복학생 오빠’거나 ‘새내기 여대생’, ‘과 선배’의 기표로 등장하고 소비된다.
연애 자본은 이렇게 계급화된 학벌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연애가 정말 그토록 자연스럽고, 지극히 좋은 것이며, 청춘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마땅한 가치라면, 어째서 이 사회는 청춘을 항상 ‘대학생’으로 소환하고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이상적 로맨스로 제공하느냔 말이다.
얼마 전 2016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수많은 레미제라블들은 갑오개혁 직후 처음으로 새경을 쳐서 해방된 노비처럼, 수험표와 신분증을 들고 이전까지 금지됐던 구역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능 응시생만을 그날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세계에서 ‘수험생이 아닌’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아닌 열아홉‘들’이 존재한다.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투명 가방끈’의 회원들은 올해에도 대학 거부 선언을 했다. 이 무수한 이들의 앞에 놓인 길은 ‘공장’으로 단일화할 수 없이 다양하고, 훨씬 복잡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을 것이다. 그 길에 연애는 단지 비가시화됐을 뿐, 있을 수 있고 또 당연히 없을 수도 있다. 대학 생활이 미팅과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 대학생이 아닌 삶이 곧 미팅 대신 미싱을 의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공장에서 미싱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학 가서 미팅’하는 삶과 대척점에 놓여 본보기처럼 제시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짐송 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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