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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낀 나라’ 조선이여

조선시대 문인의 전쟁일기 <책중일록>과 질정관의 베이징 여행기 <조천일기>
등록 2015-07-24 09:23 수정 2020-05-03 00:54

은 조선이 누르하치의 후금을 선제공격했다가 대패한 ‘심하(深河) 전투’ 당시, 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출병했던 문인 이민환이 남긴 전쟁일기이자 포로수기다. 광해군 11년인 1619년 2월,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1만3천 명의 군사를 보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공격했으나, 그해 3월4일 허투알라 근처를 흐르는 ‘심하’의 부차(富車) 들판에서 후금의 기습을 받아 7천여 명이 죽고 4천여 명이 항복해 포로가 됐다.

(사진 왼쪽)  서해문집 펴냄. 이민환 지음. 중세사료강독회 옮김. 1만1900원. (사진 오른쪽)  서해문집 펴냄.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1만1900원.

(사진 왼쪽) 서해문집 펴냄. 이민환 지음. 중세사료강독회 옮김. 1만1900원. (사진 오른쪽) 서해문집 펴냄.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1만1900원.

광해군의 실리외교 덕에

지은이 이민환은, 군량이 지급되지 않아 사나흘씩 굶으며 행군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 군량을 기다리기 위해 행군을 늦추려 했으나 명나라 제독 유정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상황, 정보에 어두워 후금의 승전보를 아군의 도착 포성으로 잘못 알아들어 기습을 당하는 어리석음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지은이 등이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실리외교 덕분이었다. 누르하치는 여러 번 조선에 사람을 보내 동맹을 맺어 명나라에 대항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사신도 보내지 않고 회신도 하지 않았다. 두 강대국에 낀 약소국의 남루한 처지였다. 두 달 만에 광해군은 “후금의 국서에 회답하려 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기 때문에 국서를 보내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댄 뒤, “두 나라는 전부터 원수진 것이 없으니 서로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 근래 조선에 투항해온 여진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돌려보낸다”는 구두 전갈을 보냈다. 누르하치는 크게 기뻐하며 이민환을 포함해 10명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숭명배금주의자들이 득세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것은 잘 아는 바와 같다.

조헌의 는 1574년 베이징으로 가는 조공 사절단에 질정관으로 동행한 기록이다. ‘조천’(朝天)은 ‘황제를 배알하다’는 뜻이다. 질정관은 불명확한 한자의 뜻과 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국 현지의 학문 경향과 정치 현실을 살피는 자리였다.

조헌의 눈에 비친 명나라 변방의 관리들은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파렴치한들이었다. 조헌은 “다행히 변경에 근심이 적은 것은 다만 오랑캐 가운데 웅대한 계략을 가진 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임금이 된 자가 어찌 저들에게 호걸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방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적었다. 이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누르하치가 “웅대한 계략”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니 조헌의 예지력은 가히 미래를 꿰뚫는 것이었다.

조헌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 등을 수복했으나 충남 금산에서 전사했다. 이 책은 그의 제자 안방준이 엮어 임금에게 바친 것이다.

군사 일으킬 것을 꿰뚫어보았으나

조헌과 이민환의 시대를 앞선 조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이어졌다. 떠오르는 중국과 기존 우방국 미국,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영향력 확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일본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오늘, 우리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고전들이다.

이재성 문화부 책지성팀장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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