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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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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다, ‘김사인표 서정’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고갯마루, 김사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
등록 2015-07-24 18:20 수정 2020-05-03 09:54

김사인의 세 번째 시집 는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고갯마루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 ‘달팽이’의 구절처럼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 (…)/ 더듬더듬/ 먼 길을” 간 끝에 이른 지점이어서 더욱 귀하고 반갑다.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에이 시브럴’)라는 회의와 의심의 말이 없지 않지만, 그런 회의와 의심조차 겸양을 가장한 오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편이 꼼꼼하고, 허투루 부려 쓴 말이 없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펴냄. 김사인 지음. 8천원.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펴냄. 김사인 지음. 8천원.

이문구의 인물평에 맞먹을 인물시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김태정’ 앞부분)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처럼 낮게 엎드려 살다 간 시인 김태정을 노래한 시는 생전의 그를 기억하는 이에게는 망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을 준다. 글쓴이가 후배 시인의 태도와 심성을 적확히 꿰뚫어본 결과다. ‘인사동 밤안개’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거느렸던 화가 여운에 대한 시도 마찬가지다.

“바바리는 걸치고서/ 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 인사동 고샅을/ 밤마다 순찰 돌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수몰 앞둔 시골 면소/ 충직한 총무계장처럼.”(‘인사동 밤안개-여운 화백’ 부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가 동료 문인들의 특성과 장점을 익살스러운 문장에 담아 쓴 인물평이 유명하거니와, 운문 쪽에서 그에 맞먹을 만한 사례가 김사인의 인물 시들이 아닐까 싶다.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통영’ 마지막 연)

“담배 문 손등으로 비가 시린데 말이지,// 갯가로 시집간 딸아이 웅크린 등에도 이 찬비 떨어지겠고 말이지,// 쉐타 팔짱 너머, 널어놓은 가재미 도다리나 멀거니 내다보겠지,”(‘삼천포 1’ 앞부분)

소도시를 묘사하는 풍경과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실주의 풍경화인 양 여실하다.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는, 개의 죽음을 노래한 시 ‘좌탈’이나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라는 시 ‘공부’에서 보듯 ‘김사인표 서정’의 바탕에는 불교적이랄까 동양적인 세계관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손쉬운 달관과 화해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이 또한 김사인 서정시의 듬직함이다. ‘불길한 저녁’이라는 빼어난 ‘정치시’는 2015년 현재 시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불길한 저녁’, 2015년 빼어난 ‘정치시’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이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 유서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진술 같은 안개 깔리고/ (…)// (…)/ 집요한 회유같이 졸음은 오고”(‘불길한 저녁’ 부분)

최재봉 문화부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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