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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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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국가대표가 돼야죠!”

6년 전 충주상고서 약체팀 돌풍 몰고 왔던 한교원 선수,

4년제 편입 걱정하다 프로·국가대표팀 합류하고 K리그 ‘베스트11’에도 올라
등록 2014-12-12 14:57 수정 2020-05-03 04:27

‘송 기자·조 피디의 후’가 새롭게 찾아갑니다. ‘송 기자·조 피디’는 에서 스포츠와 사람의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담은 ‘스포츠다큐’, 영화 스태프들을 다룬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 등을 연재한 바 있습니다. 지면을 통해 새롭게 선보이는 ‘송 기자와 조 피디의 WHO&後’는 과거 두 사람이 만났거나, 언론이 다루고 지나간 이들의 현재를 다시 찾아갑니다. 한겨레TV(www.hanitv.com)를 통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6년 전 ‘스포츠다큐’에 소개된 충주상고 축구부의 한 선수가 첫 회의 주인공입니다. _편집자


차두리의 패스, 골문 앞에서 그 공을 향해 움직이는 박주영과 한교원. 지금 이 장면 속에 한교원(24)이라니.

이 이름은 기억의 시간을 6년 전으로 순식간에 끌고 갔다. 스카우트 제의란 걸 받지 못했던 선수들의 집합소, 그래도 축구를 계속 하고 싶다며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아이들로 꾸려진 축구부, 그리고 패배가 익숙해 “솔직히 쟤네 팀이 훨씬 세요”라는 것쯤은 인정하던 아이들의 팀에서 주전 공격수. 팀 창단 뒤 처음 오른 전국대회 16강전에서 선제골을 넣고 ‘토끼춤’을 추며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던 아이, 정작 어머니는 예식장 식당 보조일을 나가느라 자신의 ‘오늘 골’을 보지 못해 아쉽다면서 대학을 가도 등록금이 걱정이란 말을 기자에게 남겼던 그 아이. 그때 16강전에서 결국 상대팀에 4골을 내줘 충주상고의 돌풍이 끝나가던 경기 막판쯤이었던가? “끝난 게 아니잖아, 포기하지 마”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던 축구부 아이들과 선제골을 넣었던 바로 그 한교원.

2014년 11월14일, 차두리가 띄워준 공의 낙하 지점에서 몸을 날려 헤딩 결승골(요르단전 1-0승)을 넣은 선수는 박주영 앞에 있던 한교원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의 첫 해외 원정경기 승리를 부른 골이었다. 그날은 슈틸리케 감독의 생일이었다. 언론은 국가대표 4번째 출전 만에 데뷔골을 넣은 한교원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포기하지 마”라고 외치던 아이들

한교원이 중·고등학교 때 축구 경기를 하던 충주공설운동장을 국가대표가 돼 다시 찾았다. 지난 9월 국가대표가 처음 됐을 때 충주 시내에 축하 플래카드도 걸렸다. 한겨레 조소영 피디

한교원이 중·고등학교 때 축구 경기를 하던 충주공설운동장을 국가대표가 돼 다시 찾았다. 지난 9월 국가대표가 처음 됐을 때 충주 시내에 축하 플래카드도 걸렸다. 한겨레 조소영 피디

우린 6년 만에 다시 만났다. 우린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축구선수를 그만둘 고비를 여러 차례 넘으며 왔던 그의 얼굴 위로 “지금 끝난 게 아니잖아”란 외침이 울리던 6년 전 운동장 속의 한교원이 포개졌다. “축구로 돈을 벌 수 있게 돼 기쁘다”는 그는 “그런데 돈을 함부로 막 못 쓰겠다”며 프로선수들이 으레 가진 차도 없이 걸어서 약속 장소에 나왔다. 그는 12월1일 프로축구(K리그) 시상식에서 생애 첫 ‘베스트11’에 뽑혔다.

“막연한 꿈이 있었죠, 국가대표라는. 멀어 보였지만 그 꿈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끝까지 하려고 했던 거죠. 대학 때 너무 힘들어서 다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어머니도 ‘끝까지 해보라’고 하셨고요. (사실) 국가대표 이전에 프로선수부터 되자, 그 전에 4년제 대학에 편입부터 해서 다음을 생각해보자고 했던 건데….”

‘다음’과 ‘다음’을 밟아가며 국가대표까지 올라온 요즘의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하류 인생 혹은 비주류의 인간승리’ 같은 말들이다. 한번은 누나가 “네가 비주류였니?”라고 물었다고 한다. 누나에게 동생은 ‘누군가의 주변인’ 같은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언론의 표현들이) 맞는 말이기도 하죠. 2년제 대학에 가서 프로까지 오는 게 힘드니까요.”

프로에 진출한 선배가 거의 없는 고등학교, 주목받지 못한 학교의 축구부 아이들에게 대학의 문은 넓게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교원은 조선대 축구부에서 받아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고교 졸업 이전에 조선대에 합류해 3개월가량 훈련했다. 그러다 대학에서 “축구부 정원이 차서 (특기생으로) 너까지 받아주기 어렵게 됐다”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수능시험을 봐서라도 축구를 하려고 조선대 체대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에겐 조선대 안에 있는 조선이공대(2년제)가 창단하는 축구부에 들어간 뒤 4년제에 편입하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들어왔다. 그는 조선이공대 레저스포츠학과 야간반에 들어갔다.

“조선대 축구부와 마주치며 운동해야 하는데, (조선대 축구부가) 얼마나 무시하는 눈으로 볼까, 자존심이 상했어요. 무너지더라고요. 전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자꾸 제자리를 걷거나 뒤로 가는 느낌이 비참했어요. 그땐 공만 봐도 싫어서 울면서 어머니께 ‘운동 그만두겠다’고 전화도 드렸죠.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조선이공대에서 훈련만큼은 거르지 않았다. 저녁엔 기둥에 묶인 자전거 튜브를 허리에 차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추가 훈련도 했다. 그는 이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훈련이 습관화된 ‘몸의 기억과 버릇’이 작용한 덕분이라고 했다. 1학년밖에 없던 창단팀이니 3~4학년이 주축인 다른 대학과 붙어 패배의 횟수만 쌓아갔다. 2학년이 되면서 이기는 경기가 생겨났다. 약팀에서 강팀을 상대로 골을 넣는 경험이 오히려 그를 성장시킨 기회가 됐다. “많이 이긴 게 아니었지만 조금씩 이겨나가니까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지킬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니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할 수 있었죠.”

‘이기는 재미’로 추스른 자존심[%%IMAGE2%%]

심리적 공간에서 낙담 혹은 비관의 팽창을 막고, 이를 덜어내는 방법으로 마음을 추슬러나갔다. 2학년 때 대학리그 18골을 넣은 그에게 감독은 프로 드래프트(신인선발)에 지원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프로 선발에서도 떨어지고, 프로에 지원하느라 시간이 지체돼 4년제 편입 정원도 차면 편입도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2011년 창단한 광주FC가 신인을 대거 선발할 것이란 소식도 돌아, 그는 “연습생 신분으로라도 광주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며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프로 선발 결과를 전하는 인터넷 실시간 문자중계를 보던 그는 인터넷을 접고 팀 숙소를 나왔다. 여러 프로팀들이 1~2순위까지만 뽑고 3~5순위 지명권을 포기한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PC방에 들렀다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널 5순위로 지명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전환점)”가 된 프로 입단이 손에 잡힌 것이다. 당시 허정무 인천 감독은 무명의 2년제 대학에서 2010년 대학리그 18골을 넣은 무명을 건져올려 5순위 막차에 태웠다. 측면 공격수인 그는 빠른 돌파가 강점이다. “프로는 냉정해서 날 보여주지 못하면 잘려나간다”는 것을 아는 그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2군리그 경기에서 데뷔, 그다음 1군 경기 경남전에서 6분, 포항전 십 몇 분 출전, 그날 첫 도움 기록, 그다음 경기에 선발출전해 80분”을 뛰는 식으로 프로 데뷔 첫해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2011년 겨울훈련 때 피로골절 수술을 받아 3개월 재활의 위기도 거쳤지만, 그는 인천에서 3시즌 동안 93경기(15골 6도움)나 뛰었다. 올해 전북 현대로 이적해 팀 우승과 함께 K리그 득점 공동 4위(11골)에 올랐다.

터닝포인트 된 인천의 5순위 지명

그리고 브라질월드컵 이후 새로 부임한 독일 출신의 슈틸리케 감독이 지난 9월 그를 국가대표팀에 불렀다. 청소년·올림픽대표 등을 거친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연령별 대표팀에 한 번도 뽑힌 적이 없다. “(대표팀 훈련장이 있는) 파주트레이닝센터도 처음 가봤다”는 그는 “대표팀 밥도 왜 그렇게 맛있는지”라며 웃었다. 아버지가 일하던 고모네 사업장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그는 축구회비를 낼 형편이 안 돼 고등학교 1학년 때 축구를 그만두기도 했다. 충주상고 시절 스승인 안종성 미덕중 감독은 국가대표로까지 성장한 제자를 대견해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교실로 찾아가 축구를 다시 하자고 했더니, ‘가정이 어렵다’는 거예요. ‘축구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한교원은 축구회비를 도움받기로 하고 축구를 다시 시작했다. 안 감독은 “대표팀에서 같은 포지션인 이청용에 비해 교원이가 스피드와 골결정력은 뛰어나지만, 이청용이 가진 기술의 세밀함은 부족하다. 이청용의 장점을 보완하면 교원이가 더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한교원은 이제 자신이 선망하던 차두리 등과 같은 대표팀에서 뛰게 됐다. “두리 형이 ‘대표팀에서 자기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돌아가는 선수를 보면 안타깝다. K리그에서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내 팀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해외파 선수들도) 다 똑같은 선수들이고, 여기 선수들이 모두 국가대표 자격을 받고 온 선수들이다’라며 주눅들지 말라고 말해줬죠.”

한교원은 요르단전에 앞서 “네가 꼭 일을 낼 거 같다”고 자신감을 준 차두리의 패스를 받아 대표팀에서 골을 넣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희열”을 맛봤다. 충주상고 축구부 시절 친구들 중에선 “촌놈이 성공했네”라고 좋아해준 이도 있다. 어머니는 “네가 장가갈 때 가져가라”며 아들의 대표팀 유니폼을 집에 간직하고 있다.

한교원은 “대표팀에 들락날락하는 게 전부라서, 성공했다고 할 만한 선수는 아직 아니다”라고 했다. “친선경기 4경기를 뛴 거밖에 없고, 대표팀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선수도 아니죠. 진짜 국가대표가 돼야죠.”

혹여 나태해질 만하면 “예전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축구부 시절 친구들이랑 (숙소 식당에서) 소시지도 훔쳐먹고, 근처에서 사과도 따먹고. 소소한 게 즐거웠거든요. ‘근데 지금은 배부른 건 아닌가. 항상 나는 쉬웠던 (길을 간) 적이 없지 않았느냐’며 나를 추스르죠.”

‘나는 쉬운 길을 간 적이 없었지’

우린 2008년 대통령금배가 열렸던 충주공설운동장에 함께 섰다. 그를 처음 본 운동장이다. 그는 한때 선택받지 못한 선수였으나 패배가 익숙한 팀에서 무수한 패배를 당하며 무엇을 채워나가야 할지를 배워왔다. 축구공을 들고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여건이 다 좋을 순 없죠. 그런데 꿈과 목표가 간절하면→준비하게 되고→준비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순환·사이클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는 기자와 만난 12월4일에 발표된 아시안컵 축구대표팀 훈련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내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최종 출전 명단에 들 기회를 위해 12월15일 대표팀 훈련에 합류한다. 그는 섣부른 낙관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쉬운 길을 간 적이 없으므로.

충주=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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