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가 상영되는 전국 극장의 이름이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에 다 담겨 있었다. “(상영관이) 겨우 이거라서요. 안타깝고, 속상하고, 화도 나죠.”
영화를 찍기 전인 지난해 초여름, 그는 고사를 지내는 대신 배우·스태프와 ‘관객 500만 명 (기원) 출정식’을 열었다. “지금은 허황된 숫자가 됐다”지만 그땐 희망을 품을 근거가 있었다. 출연 배우들이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는 처음 본다. 거칠고 붉은 피가 낭자하는 영화들 속에서 ‘힐링’이 될 영화”란 공통된 의견을 보내서다. 김혜자씨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화”라며 5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결심했다. 일단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천을 받아서 봤는데, 다시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란 관객의 반응과, 개봉 3주 만에 상영관 수를 20개 밑으로 떨어뜨린 극장의 결정이 충돌하는 상황이 당혹스럽다.
우린 3년 전에도 같은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땐 그가 장애인 아동이 당한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관객 466만 명)를 제작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였고, 이어 개봉한 하정우·공효진 주연의 <러브픽션>까지 손익분기점(관객 120만 명)을 넘긴 직후였다. 그는 <도가니>의 흥행 수익금을 배분할 때 ‘피해 아동 지원금’이 누락되지 않도록 꼼꼼히 신경 썼고, ‘성공한 제작자’로 불리기 시작했으면서도 “겉멋을 부리지 말자”며 사무실을 서울 강남 논현동에서 강북으로 줄여서 옮겨와 기자를 맞이했다. 당시 그가 얘기해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도가니> <러브픽션>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2009년 아파트를 팔고 아내, 자녀 셋과 함께 2년여 월세방에서 지낸 시절을 떠올리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영화인들이 어떤 영화에 꽂히면 무모함 같은 게 있지만 상식적 판단으로는 나쁜 아빠, 나쁜 남편인 거죠.”
2010년, 엄용훈 삼거리픽쳐스 대표는 아내가 전셋집으로 옮기는 데 보태려고 친척에게 빌린 돈을 소설의 영화 판권 계약금으로 사용했다. 미국 작가 바바라 오코너가 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이란 작품이었다. “가장의 지위를 잃었지만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소설 속 아빠”와 자신이 겹쳐 보인 것이다. “언젠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경제적 고통을 안긴 가족에게 멋지게 사과하고 싶었다”던 그는 “또 죄를 짓게 생겼다”며 아쉬움이 밴 웃음을 지었다.
상영관 수가 쪼그라들어 관객이 상영관 확보 서명운동까지 벌이는 상황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개봉 전 시사회에선 “웃음과 감동이 어우러진 영화”란 반응이 주를 이뤘다. “캐릭터들이 생동감 있는 사랑스러운 영화”(봉준호 감독)란 평도 많았다. 엄 대표는 나이 일흔을 넘긴 김혜자씨가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 출연해 영화 홍보에 힘을 실은 것도 “깜짝 놀랄” 고마움으로 기억했다.
“처음엔 ‘러닝머신?’이라고 되물으실 정도로 이 프로그램을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어른들이 홍보를 도와주지 않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방송에) 나간들 누가 알아주겠느냐’며 흔쾌히 출연을 허락하셨죠. 원래 (<런닝맨> 제작진이) 우아한 노부인 콘셉트로 설정해뒀는데, <런닝맨>에선 같이 뛰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운동화를 직접 가져오셔서 방송 제작진도 놀랐죠.”
영화가 탄탄하게 잘 나왔다는 자신감이 김혜자씨에게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개훔방>은 지난해 12월31일 전국 205개 스크린에서만 개봉했고, 지금은 그 10분의 1 수준으로 스크린 수가 떨어졌다. 관객의 호평과는 무관한 흐름이었다.
시사회 반응이 어머어마하게 좋았는데, 긴장에 빠지기도 했던 건 극장 배급 관계자들에게서 ‘왜 하필 이때…’란 반응을 접하면서였죠. (겨울방학이) 1년 중 (영화 흥행) 사이즈가 큰 시기인데, 대기업이 투자·배급한 영화가 경쟁을 벌이는 기간에 우리처럼 작은 배급사(리틀빅픽쳐스)가 배급하는 영화가 끼어드는 걸 불편해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영화를 극장에 배급하면서, ‘중소 배급사의 영화는 성수기에 배급하지 말라는 건가’란 느낌이 들 정도였죠.”
대기업이 투자·배급한 영화에 스크린이 몰리면서 <개훔방>의 스크린은 개봉 2주차부터 빠르게 감소했다. 그는 “최소한 개봉 당시 스크린 수만이라도 2주차에 유지됐다면 우리 영화가 상승했을 것”이라고 했다. 트위터·페이스북에 <개훔방>을 추천하는 글이 속속 올라오는 ‘개(훔방)판’ 행렬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극장의 직원은 엄 대표에게 “저도 제 아이, 부모님과 함께 봤는데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재밌는 영화였다. 하지만 상영 권한은 (대기업) 본사 프로그램팀이 갖고 있어 (상영관 축소가)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하다”며 거꾸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의 수요’가 스크린을 늘리는 ‘공급’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투자·배급한 영화에 스크린이 쏠리는, ‘공급량’에 의해 관객의 수요가 발생하는 기현상”을 우려했다. “다양한 영화를 향유하고 싶은 선택권을 침해받은” 관객이 특정 영화를 볼 수밖에 없도록 스크린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10개 스크린에 10개의 영화를 튼 뒤, 관객의 입소문에 의해 어떤 영화의 스크린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럽죠. 하지만 (극장이) 특정 영화의 예매 시기를 더 빨리 열어주고, 개봉 단계에서부터 스크린의 지배적인 양을 몰아주면 관객들은 ‘이 영화가 재밌나보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개훔방>처럼 (처음부터) 달랑 한 관이 걸려 있으면 ‘저건 재미없나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죠. (특정 영화에 대한 스크린 공급 과잉이) 영화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는 대기업 중심의 ‘영화 쏠림 현상’이 미칠 영향도 걱정했다.
“다양한 콘텐츠가 나오기보다 자본이 콘텐츠를 재단하게 되고, 향후 우리 아이들이 유사한 영화, 햄버거처럼 인스턴트 영화에 익숙해지는 안타까운 사회가 될 수 있죠. 대기업 중심으로 쏠리면 제작원가(제작비)는 상승하겠지만, (중소 제작자들이 위축돼) 영화의 다양성과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고용이 축소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계 문제가 문화계를 넘어 경제·사회학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배우·스태프들에게 실패한 작품의 구성원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든 점,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입힌 점, 관객에게 지역 경계를 넘어서까지 상영관을 찾아다니게 한 점에 대해 죄를 지은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잠시 ‘흥행 실패 제작자’가 됐지만 인터뷰에 나선 것은, “영화 선택권을 잃은 소비자의 권리”를 회복하려면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다. 이 영화로 사과하고 싶었다는 그의 마음도 가족에게 전달됐을까.
“6살 늦둥이가 <개훔방>을 여러 번 봤어요. 대사도 따라하고 좋아해요. (가족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해요. 다만 영화 한 편 할 때마다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두려움 같은 건 더 생기지 않았을까 싶고.”
그 ‘6살 꼬맹이’가 엄마랑 “동네에 영화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목소리엔 순간 울컥하는 아빠의 마음이 뒤섞였다.
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사진·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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