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씨는 노점상과 철거민과 빈민과 서민의 삶을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조심히” 드러내려 했다고 말했다. 청계천 노점상들이 많이 옮겨온 동묘역 인근의 벼룩시장에 카메라를 메고 나온 그는 그렇게 사람들에 게 다가갔다.
서울 지하철 동묘역 3번 출구에서 그를 만났다. 5월13일 오후 4시, 어깨에 사진기를 멘 그는 동묘역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벼룩시장 골목으로 앞장섰다. 인도에 설치된 가드레일을 보더니 “원래 노점상들이 인도에 있었는데, 저걸 설치하니까 도로로 나오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가드레일은 단속반이 되어 인도에 있던 노점상을 도로로 쫓아냈다. 그렇게 삶의 속내를 모르는 전시행정은 도로의 기능도 죽였다. 그러나 어떤 단속도 삶의 의지를 이기진 못한다. 오늘도 절박한 노점상은 도로 위에서 중고품을 고르는 손님을 맞는다. 그가 입은 조끼에 새겨진 ‘전국노련’ 네 글자는 마흔일곱 그의 인생을 요약한다. 그가 건넨 명함 앞에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사무처장 최인기, 뒤에는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 최인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날도 그는 세월호 촛불원탁회의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빽판”에 심취했던 ‘청계천 키드’“‘한결같다’는 말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말처럼 20여 년을 빈민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을 떠나지 못하는 그가 펴낸 책의 이름은 (동녘 펴냄)이다. 2012년에 나온 첫 책 가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이 땅의 가난을 수직으로 기록했다면, 은 오늘의 가난을 수평으로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에 그는 카메라를 잡고 뛰어다니며 찍는 일을 배우고 더했다.
“제게 청계천은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첫 문장 그대로다. 동묘역 3번 출구, 이곳이 오늘의 청계천인 이유를 그는 책에서 이렇게 전한다.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밀려난 노점상들은 동묘 숭인동 주변에 새롭게 터전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옛날 청계천 ‘벼룩시장’의 명성을 인근 ‘동묘’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곳은 그에게 새로운 고향과 다름없다. 중고 물품이 늘어선 길을 지나는 그에게 “웬일이야” 인사를 건네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그가 “안녕하세요” 안부를 묻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는 양해를 구하고 상인들 사진을 찍었다. 누구는 “또?” 하며 눈을 찡긋했고, 누구는 그냥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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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삼일아파트에서만 네 차례 이사를 다녔으니까요.” 책에 나오는 말처럼, 1974년 상경한 그의 가족은 청계천 일대에서 오래 살았다. 어머니가 청계천에서 20년을 한결같이 옷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달동네, 철거촌, 개발 지역과 쪽방 등에 대해 쓴” 은 “(황학동) 레코드가게의 딸이었던 교복 차림의 갈래머리 소녀가” “이제는 파마머리의 중년이 되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가게를 지키고 있는” 30여 년 사이의 이야기다. “빽판”에 심취했던 ‘청계천 키드’는 6번의 구속을 겪은 운동가가 되었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가난의 순환10년 전인가. 두 달치 월급을 털어서 쓸 만한 카메라를 샀다. 같이 사회운동을 하는 부인은 “최소한 10년은 열심히”라며 허락했다. 당시 청계천 개발로 무너져내리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용산 참사 같은 현장에서 활동가로 버텨내는 일이 먼저여서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역사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고통을 겪었다. 아니 겪고 있다. 지난해 사진기자 출신인 임종진 작가를 무작정 찾아가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는 “사진을 찍는 태도를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가난의 민낯을 찍고 속사정을 적은 ‘최인기의 사진세상’을 에 연재했다. 그의 글을 보고 연락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노무라 선생은 1960년대부터 찍어온 청계천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 그가 쓰는 카메라도 노무라 선생이 선물한 것이다. 이처럼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은폐된 가난이 그렇다.
지난 4월에 나온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의 책에는 ‘애프터서비스’가 있다. ‘여기에 투쟁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그는 책에서 청계천 삼일아파트 철거민 대책위원장이었던 최용규씨를 수소문해 찾아간다. 청계천 터줏대감 최씨는 막바지까지 힘들게 싸워 성동기계공고 근처 임시상가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고 책은 전한다. “문제는 구청과 서울시 공무원의 묵인 아래 진행된 사업이었기에 담당자와 해당 공무원이 떠나자 곧바로 또 철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청계천 개발은 끝났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는 가난의 순환이 있다. “예전에는 벼룩시장의 중심이었던 청계천 6가와 7가 사이에 롯데캐슬이 들어섰잖아요. 무조건 부수고 높이만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높이 올라갈수록 주변에는 그림자만 짙어지기 마련이에요. 그 그림자 안에 누가 사는지 몰라요…. 지금 그곳은 유동인구가 동묘 쪽 절반도 안 돼요. 귀신 나올 정도로 찾지 않는 곳이 되었어요.”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살아온 최씨가 전하는 나지막한 말은 어떤 보고서보다 힘이 세다. 이런 끝나지 않는 상처의 기록은 책의 끝에 청계천 상인들이 입주한 문정동 가든파이브의 ‘텅 빈 신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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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난을 은폐하는 권력과 가난을 낭만으로 여기는 정서에 맞서야 한다고 여긴다. 책에 실린 동자동 쪽방촌 전도영씨 말도 꼭 그렇다. “여기는 사진 찍기가 힘들어. 카메라 들이대면 막 난리나. 여기 오면 내가 다 소개해줘. 내가 막아줄게. …난 이곳을 더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의 가난과 아픔을 막 드러내야 해. 문제가 있음을 보여줘야 해. 알려야 해.” 그렇게 전후 맥락을 아는 그의 카메라에 내보인 민낯이, 그라서 알아들은 말들이 책의 곳곳에 있다. 용산 참사로 아버지를 잃고 4년간 옥살이를 했던 이충연씨도 그렇게 사진을 찍고 말을 풀어냈다.
“가난과 아픔을 막 드러내야 해”이날 동묘의 벼룩시장을 둘러보고 종로를 향해서 걸었다. 대로가 아니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1965년에 지은 동대문 아파트의 광장처럼 뚫린 내부를 보여주었고, 은색 환풍구가 기하학적 무늬를 그리며 뒷벽을 타고 오르는 오래된 건물 앞에 멈춰섰다. 도심 뒤편에 숨겨진 쪽방촌, 여인숙, 시장…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동묘역 3번 출구에서 동대문역 5번 출구까지, 짧은 거리였다. 은 달동네, 비닐하우스촌, 쪽방촌 같은 서울의 민낯으로 당신을 이끈다. 거기서 당신은 백사마을 할아버지, 청량리 성노동자, 포이동 비닐하우스촌 아가씨를 만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은 최인기씨의 당부와 함께. 함부로 부수고 내쫓지 말고 제발 주민과 끝없이 소통하라는.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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