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2009년 1월,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였던 상하이차는 서울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경영권 포기를 선언했다. 그해 4월 봄꽃이 피고 매서운 계절이 끝났다 생각했을 때, 쌍용차는 2646명의 인력 감축 계획을 내놓았다. 그것은 ‘경영 정상화 방안’이라는 매끈한 얼굴을 한 살인 통지서였다. 이력란에 ‘쌍차 재직’이라고 썼던 이들이 무참히 쓰러졌다. 일터와 동료가 너무 그리웠다. “형, 보고 싶어요”라고 해놓고선 어영부영 만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망 소식을 전하곤 했다.
비슷한 시기 어떤 현장을 담은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나왔다. 정혜윤 CBS 라디오 PD가 쓴 (후마니타스 펴냄)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중 26명의 목소리를 듣고 쓴 르포 에세이다. 사진집 (숨쉬는책공장 펴냄)는 기록노동자 점좀빼의 카메라에 저장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쌍용차 투쟁 기록을 담았다. 현장을 설명하는 짧은 글줄과 함께 실린 사진들은 에서 담담하게 때로 격정적으로 이어지던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
26명의 목소리로, 현장 사진으로은 표지만으로는 얼핏 평범한 에세이 같기도 혹은 소설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표지 제목 아래 자동차 부품 뒤에 그려진 일상적 풍경도 그렇다. 등 책에 관한 에세이나 인터뷰집, 와 같은 여행기를 써왔던 정혜윤 PD의 전작을 떠올려보면 이 책이 싸우는 자들의 기록지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잘 발휘되지 않는다. 하지만 등을 제작한 이력과 평소 내왔던 목소리를 훑으면 전혀 낯설지 않다. 정혜윤 PD는 가장 그답게 현장의 기록을 전한다. 말하자면 책의 한 귀퉁이를 접어두었다가 독서가 끝난 뒤 그 책의 정서와 맥락을 가장 잘 전하는 문장들을 모아 정리한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귀기울여 기록하고 전달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촘촘하다. 인터뷰는 문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터뷰를 녹여 자신의 문장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택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을 테지만 책에서 저자는 목소리를 많이 내지 않는다. 대신 들은 것은 공들여 정리했다. 26명 해고노동자 개인의 삶, 쌍용차 입사부터 해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구술이 마치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하다. 여러 페이지에 걸쳐 인터뷰이의 목소리만 이어져도 그 지난한 싸움의 과정만 고단할 뿐 읽기에 지치진 않는다.
이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목소리를,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아닌 그들의 시선 그대로 전달했다면 는 이들의 투쟁 현장 속에 녹아 들어간 자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저자 점좀빼는 쌍용차지부 대외협력실장 고동민씨에게 언젠가 “같이 싸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지만 그는 늘 함께 싸운 자였다. 고동민씨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닌 싸움의 한복판에서 끝까지 기억하는 자가 되겠다는 그의 다짐과 마음”이 와닿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사진들은 시위와 투쟁의 가장 가운데에 있다. 그것은 가장 치열한 장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쓸쓸하기도 하다. 바깥에서는 늘 결기에 차 보이지만 사실은 지친 해고노동자들의 뒷모습이나 피곤한 듯 얼굴을 감싸쥔 모습 같은 것, 점좀빼는 뭐라 말을 건네는 대신 카메라에 그 순간들을 담았다. 혹은 서울 대한문 분향소 앞에 놓였던 작은 화단, 한때 해고노동자가 공장에서 신었을 워커에 담긴 화사한 꽃의 대비가 애잔하다. 불안하고 고독한 그곳에도 사람이 있으니 꽃망울 터지는 순간 같은 기쁨이 있었으리라, 우리는 짐작하고 덕분에 조금 안도한다.
보통 월급쟁이를 꿈꿨던 사람들정혜윤 PD의 에서 인터뷰에 응한 26명은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고향 강원도에서 상경해 나이트클럽 디제이를 하다가 결혼하기 위해 쌍용차에 입사해 이듬해 식을 올린 김남오씨, “월급 300만원 받는데 어떻게 내가 착취당한다는 거지? 이 정도면 됐지, 뭣 때문에 파업하나?”라고 생각해왔던 고동민씨, 고향 전남 순천에서 가을걷이하다 면접 보러 올라가 걸린 곳이 쌍용차였던 김정운씨…. 모두 “열심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살 방법을 몰랐던” “조금 더 저축해서 조금 더 넓은 아파트로 옮겨가는, 보통 월급쟁이의 꿈을 꾸고 살았던” 이들이다.
어쩌다보니 긴긴 싸움에 깃들게 되었고 그 싸움은 당장 오늘 자기 앞에 놓인 밥그릇 때문만은 아니다. 정혜윤 PD는 이렇게 쓴다. “인간은 언제나 미래 세대를 위해, 자손을 위해서 어떤 종류의 싸움인가를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없었더라면 양산에서 차를 고치고 있었을” 문기주 정비지회장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내가 자본과 정권에 순종하면서 살면 내 자식들도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순종해도 더 순종해야 하고. 그런 것들 앞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 말고 뭐가 있겠어?” 그런 마음으로 그토록 평범한 아저씨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맨손으로 고공의 철탑에 오르기도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잊히는 것”그런 와중에 지난한 싸움에 지친 24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래도 해고노동자들은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봤다.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어느 날엔가는 두건을 쓰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따뜻한 음식을 놓고 갑니다. …처음에는 지나갈 때 차 유리창도 못 내리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유리창을 내리고 손을 흔들기 시작하고, 맘을 보태기 시작하고. 이게 사람이더라고요. …우린 이렇게 회복되는 거예요. 인간성이 회복되는 거예요. 5년 만에요. 자본이 어떤 시혜를 베풀어서 노사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이런 큰 마음들이 발효돼서 풀어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 소리들이 지금 들려오고 있어요.”
그런 소리들이 모여 지난 2월7일 마침내 해고 무효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사 쪽은 인내의 시간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재판장의 당부를 무시하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다시 한 명, 복직의 날을 기다리던 한 노동자가 지난 4월23일 숨진 채 발견되었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죽음이 25번째를 기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움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좀더 붙들고 있어야 한다. 문기주씨는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힘든 순간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잊히는 것이다”라고 에 썼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1010호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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