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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 방우용을 찾아서

항일전쟁 최전선 옌안서 홍군 치료한 의사이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방우용을 찾아 옌안에 가다… 연안파 출신으로 해방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과전징·금현 직때 리제면약 사제 약영업업계사는원 들힘이든 말척하 쇼는하 의고약 넘품어 리가베고이 그트 뒤의는 세 금계방… 잊 혀 ” 어느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를 발굴하다
등록 2013-03-16 05:23 수정 2020-05-03 04:27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꿈꿨던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 방우용. 그는 중국 공산당 근거지가 있던 중국 산시성 옌안 ‘백구은(베쑨)국제화평의원’에서 6년간 내과주임으로 일한 뒤 1945년 11월 북한으로 귀국한다. 당시 방우용의 환송 사진(앞줄 앉은 사람 오른쪽에서 네 번째). 방우용 오른쪽에 앉은 이는 아내 이덕신. 앞에 세운 아이는 부부의 아들로 보인다.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꿈꿨던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 방우용. 그는 중국 공산당 근거지가 있던 중국 산시성 옌안 ‘백구은(베쑨)국제화평의원’에서 6년간 내과주임으로 일한 뒤 1945년 11월 북한으로 귀국한다. 당시 방우용의 환송 사진(앞줄 앉은 사람 오른쪽에서 네 번째). 방우용 오른쪽에 앉은 이는 아내 이덕신. 앞에 세운 아이는 부부의 아들로 보인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포갰다. 두 손은 편하게 앞으로 모아 잡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함께한 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다. 자세는 여유가 있는데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다리를 벌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젊은이도 있고, 고개를 살포시 기울여 수줍게 웃는 여인도 보인다. 그를 위한 자리인데도 정작 그의 입술은 굳어 있다. 흙먼지처럼 작고 마른 몸이다. 옆자리에 아이를 세우고 앉은 아내보다 어깨 하나 아래다. 얼굴을 오른쪽으로 조금 틀었다. 왼쪽 뺨 위로 파인 무언가가 길고 깊다. 그가 살아온 이력을 짚어보면 상처로 보아도 무방하다. 물 빠진 인민복, 배경 삼은 토굴, 별 모양의 나무 창살이 여기가 아닌, 중국 어딘가를 짐작게 한다.

 

<font color="#C21A1A">중국인들 “우리 시대의 편작”이라 불러</font><font color="#008ABD">방우용. 그는 경남 언양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 (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조선인 의사였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이자 조선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였고 사회주의를 추구한 혁명가였다. 중국인들로부터 “우리 시대의 편작”이라고 불렸던 흑백사진 속 남자다.</font>

중국 산시성 옌안혁명기념관 3층 전시실에 걸린 이 사진의 제목은 ‘백구은국제화평의원환송방우용대부합영’(白求恩國際和平醫院歡送方禹鏞大夫合影)이다. 백구은국제화평의원에서 의사 방우용을 환송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뜻이다. 날짜는 1945년 9월. 일제 패망 직후다. 사진 아랫줄에 앉은 이들의 이름이 제목 아래 적혀 있다. 왼쪽부터 ‘양극기·설봉·담장·윤성·이덕신·방우용·노지준·유신권·유충한’. 산시성 전체를 누렇게 덮은 황토 흙벽돌처럼 단단한 표정의 그가 방우용이다.

방우용. 낯선 이름이다. 그는 경남 언양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조선인 의사였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이자 조선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였고 사회주의를 추구한 혁명가였다. 중국인들로부터 “우리 시대의 편작”이라고 불렸던 흑백사진 속 남자다.

방우용이 산시성 시안에 있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판사처(사무소)를 통해 장제스가 쳐놓은 국민당 봉쇄를 뚫고 옌안으로 들어간 것은 1939년 여름이다. 당시 옌안 동쪽 황허를 건너 열린 진차지(晉察冀, 산시·차하르·허베이 지역) 해방구 전선에는 우리에게 평전 (실천문학사 발간)으로 잘 알려진 캐나다인 의사 노먼 베쑨이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베쑨을 음차한 백구은(白求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다. 그즈음 베쑨은 팔로군의 열악한 의료 실태에 대해 절망하는 보고서를 쓴다. “이곳은 지금 20만 군대가 포위 속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또 병원에는 거의 항상 2500명 정도의 부상병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의 교전 횟수는 1천 차례가 넘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의료 사정은 어떻습니까? 약품도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부 출신의 중국인 의사 5명,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중국인 의사 50명, 그리고 외국인 의사 1명이 이 부상병들을 다 처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에서 인용) “전선에서 가장 나이 든 병사”라던 49살의 베쑨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홍군들을 보고 절망하던 순간에, 46살의 방우용이 팔로군 총사령부가 있던 황토 오지 옌안을 찾는다.

방우용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서도 흥미로운 존재다. 그는 항일전쟁의 최전선에서 자신이 가진 의술을 혁명의 주된 도구이자 사람을 살리는 무기로 사용했다. 중국 동북지역(만주)이나 화북지역(옌안)에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이거나 직업혁명가로 활동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는 많다. 이들에 대한 기록과 자료도 꽤 된다. 이를 근거로 2005년 일부 운동가들에게 독립유공자 추서가 이뤄지기도 했다. 반면 방우용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다. 그가 맡았던 직책만이 간간이 확인된다. 사망 연도도 모른다. 중국 쪽도 마찬가지다. 중국 혁명 속 베쑨이나 조지 하템(중국 이름 ‘마해덕’) 같은 서양 의사들에 대한 기록물은 넘쳐나지만 방우용에 대한 기록은 몇 줄에 그친다. 북한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사실상 사진으로만 남았다. 

<font color="#C21A1A">‘홍색 관광’ 열풍으로 커진 옌안혁명기념관</font><font color="#008ABD">방우용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다. 그가 맡았던 직책만이 간간이 확인된다. 사망 연도도 모른다. 중국 쪽도 마찬가지다. 중국 혁명속 베쑨이나 조지 하템(중국 이름 ‘마해덕’) 같은 서양 의사들에 대한 기록물은 넘쳐나지만 방우용에 대한 기록은 몇 줄에 그친다. 북한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font>

옌안은 황허 지류인 연하가 와이(Y)자로 합쳐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을 따라 바짝 건물들이 들어섰다. 건물 뒤로는 황토 흙산들이 솟았고 거기에 집을 짓거나 토굴을 팠다. 현재 전체 인구는 200만명이 넘는다. Y자 중심 지역에는 40만 명 정도가 산다. 옌안 아래에는 시안이, 옌안 위로는 바오안이 있다. 미국인 기자 에드거 스노는 바오안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뒤 을 썼다. 모두 홍군, 팔로군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이들 도시 이름에는 모두 ‘편안할 안’(安)이 쓰였다. 중국 역사에서 전쟁과 외침이 많았던 지역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대장정으로 지리멸렬하며 잡동사니 군대로 쇠했던 홍군이 10년 넘게 터를 잡고 힘을 기른 옌안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3월5~7일 중국 혁명의 성지라는 옌안을 찾았다. 한국에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시안에서 고속철도나 기차, 버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시안~옌안은 고속도로 이정표상으로 326km 떨어져 있는데 최근에 개통한 고속철로는 2시간15분 정도면 간다. 에드거 스노는 시안에서 옌안까지 “6t 닷지트럭”을 타고 꼬박 이틀이 걸렸다고 했다. 요즘은 베이징에서 곧장 비행기를 타고 옌안으로 갈 수도 있다. ‘백비’라 불리던 국민당 군대의 옌안 봉쇄 따위는 지금 없다. 다만 고속철을 타는 데도 신분증을 제시하고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허름한 터미널에서 옌안행 버스를 타도 마찬가지다. 3위안(약 540원)짜리 지하철을 타더라도 엑스레이 검색대에 가방을 넣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이 느끼는 그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 하는데, 검색대 직원들은 마냥 건성이다.

2005년에도 옌안혁명기념관을 방문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낡고 크기만 한 기념관은 볼품없었다. 전시물도 그저 그랬다. 혁명 성지 옌안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길거리 좌판에서 뭉텅이로 흥정되는 마오쩌둥 열쇠고리가 그나마 혁명 성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8년이 지난 2013년 다시 찾은 옌안은 달랐다. 옌안 곳곳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옌안혁명기념관도 달라져 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2009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예의 중국 정부가 지은 공공건물들이 그렇듯 과장되게 컸다. 혁명의 성과를 크기로 보여주려 했다. 옌안을 굽어보는 마오쩌둥 동상도 더 커진 듯했다. 2004년 대장정 70돌, 2006년 장정승리 70돌 즈음에 불어닥친 ‘홍색 관광’ 열풍의 결과물로 보였다. 경제대국의 자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가 과거 혁명의 기억과 기이하게 착종된 공간으로 다가왔다.

기념관 3층 전시실 중간쯤에 ‘의료위생’ 전시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마오쩌둥은 “죽어가는 이와 부상자들을 구하는 것은 혁명의 인도주의를 밝히는 길”이라고 했다. 인민해방군복 차림의 젊은 안내원은 “장정 과정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옌안에 의료시설과 의과대학을 세우는 등 후방 지원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의료위생 전시실 맨 위에 걸린 것이 바로 방우용 사진이다. 사진 제목과 이름만 나와 있을 뿐 아무런 설명이 없다. 방씨 성을 가진 중국인으로 알기 쉽다. 옌안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 전시 자료와도 멀찍이 따로 떨어져 있다. 기념관 직원들도 방우용이 조선인 의사라는 사실만 알지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기념관 사료실에 방우용 관련 자료가 더 있는지 문의했다. 있을 법도 한데 한참 찾아보더니 더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따로 큼직한 전시실을 차린 베쑨과는 대접이 달랐다.

 

<font color="#C21A1A">경성의전과 도쿄대학서 의학 공부 뒤 중국으로</font>
방우용 연표

방우용 연표

한국 쪽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되는 자료들을 종합하면 방우용은 1890년 경남 언양에서 태어났다. 1941~47년 옌안에서 발간된 중국 공산당 신문 등은 방우용의 출생연도를 1893년 2월20일이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일부 기록들은 그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왔다고 돼 있다.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펴낸 동문록을 보면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 48명 가운데 방우용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 당시 조선인 학생이 많았던 경성의학 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일본 학생과는 다른 차별적인 교육과정, 일본인 교수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불만도 컸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구금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서울에서 구금된 전체 학생의 20%에 달했다(신재의,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의 민족의식’). 중국 쪽 자료는 방우용이 “젊은 시절 일본의 식민지배, 조선 학생들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를 목도하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 서울대 의대 동창회 쪽에 문의한 결과, 방우용이라는 이름만 나와 있을 뿐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고 했다. 방우용은 왜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수천km 떨어진 혁명의 전선에 뛰어들었을까. 동창회 쪽은 그의 행적을 증언할 다른 졸업생들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왔다.

중국 쪽 기록은 방우용이 일본 도쿄대학에서도 공부를 했다고 전한다. 의학 관련 공부를 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1년이 지난 1928년 그는 중국으로 향한다. 난징과 상하이를 주요 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행적은 1929년 그 유명한 황포군관학교에서 확인된다. 항일전쟁·국공내전 기간에 숱한 군사·정치 지도자를 배출한 황포군교는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간 곳이다. 이 학교의 학생·교직원 명부인 에는 7기생 입교 시기 교관으로 방우용이 등장한다. ‘학교본부 군의처’에는 교관 11명이 있었는데, 방우용은 소교’ 직위에 국적은 ‘한국’으로 적혀 있다. 황포군교에서 군의관을 양성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6기까지 광저우에 있었던 황포군교는 7기 시기에는 난징에 본교를 두었다. 앞서 6기생 입교 시기에는 님 웨일스의 로 잘 알려진 김산도 교관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이 시기 방우용은 상하이에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원이던 조공운(趙公雲)에 대한 중국 자료를 보면, 방우용은 조선인 혁명가였던 조공운이 상하이에서 국민당 군대에 들어가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font color="#C21A1A">“풍부한 내과 지식에 임상 경험 훌륭”</font>

국민당 통치구에서 활동하던 방우용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이후 전쟁이 격화하자 스스로 옌안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여름 시안을 거쳐 옌안에 입성한다. 이즈음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던 최창익과 그를 따르는 의용대원 18명이 옌안으로 들어가려고 시안에 집결한다. 18명 중 한 명이 방우용이었을까. 옌안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관련 연구를 해온 염인호 서울시립대교수(국사학)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100%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 최창익을 따랐던 이들 중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출신의 젊은이가 많았다. 이미 40대 후반인 방우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염 교수는 “당시 조선인들끼리 똘똘 뭉쳐 다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산도 본인의 인맥을 통해 옌안으로 들어간 경우다. 방우용 역시 혼자서 옌안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1939년 여름 방우용이 중국 산시성 옌안 팔로군군의원 내과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남자가 방우용으로 추정된다.

1939년 여름 방우용이 중국 산시성 옌안 팔로군군의원 내과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남자가 방우용으로 추정된다.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베쑨의 다급한 보고서가 작성되던 때, 방우용은 옌안에 가자마자 팔로군군의원 내과주임이 된다. 중국 기록은 방우용이 “이미 20여 년간 의료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내과 방면 지식이 특히 풍부했다. 이론적으로 깊이가 있었고 임상 지식은 더 훌륭했다. 짧은 시간 동안 보고 듣고 만져보는 것만으로 대략 정확한 진단을 해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옌안혁명기념관에는 이 시기 방우용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1939년 찍은 ‘팔로군군의 원의무공작자합영’이라는 제목의 사진 속에는 흰 가운을 입은 32명의 남녀 의료진이 활짝 웃고 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약간은 상기된 듯한 표정의 남자가 방우용으로 보인다. 1945년 9월 사진과 비교하면 살은 조금 더 붙었지만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가 똑같다. 혁명 성지 옌안에 막 들어온 중년의 혁명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옌안에서의 6년을 예상했을까.

방우용이 베쑨과 얼굴을 맞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베쑨이 있던 진차지 해방구와 옌안은 거리가 있다. 게다가 베쑨은 방우용이 옌안으로 들어가고 넉 달여 뒤인 1939년 11월 패혈증으로 숨진다. 하지만 방우용과 베쑨의 ‘인연’은 다른 식으로 이어진다. 팔로군 총위생부는 베쑨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해 12월1일 팔로군군의원을 ‘백구은국제화평의원’으로 바꾼다. 이듬해 1~4월 백구은국제화평의원은 옌안 유만가구(유씨 집성촌)의 산 중턱으로 자리를 옮긴다. 방우용은 이곳 본원 내과주임이 된다. 환자 치료와 함께 의료 인력을 양성하는 교수 역할까지 한다.

 

<font color="#C21A1A">마오, 방우용에게 직접 쓴 족자 선물</font>

백구은국제화평의원은 의사와 환자가 얽힌 ‘고통의 공동체’였다.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시설은 여전히 열악했다. 흙동굴이 치료실로 쓰였다. 그나마 일반 인민들이 사는 토굴과 달리 안쪽에 회벽을 바르거나 흙벽돌을 쌓아 먼지를 줄였다. 전체 직원은 260명이었다. 초기에 하루 문진 환자는 780명에 달했다. 당시 백구은국제화평의원에서 일했고 그 뒤 중국 군사의학과학원 원장까지 지낸 중국인 의사 서통금은 ‘회억연안화평의원’(연안 화평의원을 추억하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처음 침대는 200개가 있었다. 원장은 노지준, 정치위원 유신권, 의무주임 겸 내과주임은 황수측이 맡았는데 나중에 방우용이 내과주임을 맡게 됐다. 환자들은 한 줄로 지은 석요동(흙벽돌을 쌓아 만든 토굴)에서 묵었다. 공작인원(의료진)은 모두 산비탈에 있는 토굴 등에서 살았다. 과주임 이상의 기술 간부들은 새로 지은 석요동에 묵도록 했다. 의원이 학교와 가까워 학생들이 실습하는 데 매우 편리했다.” 서통금은 외과에서 일했다. 그의 친구 서근죽은 방우용이 주임을 맡은 내과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후 침대는 250개까지 늘어난다. 노지준, 유신권은 1945년 9월 방우용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이다.

중국 산시성 옌안 유만가구 산 중턱에 자리한 백구은국제화평의원 수술실(왼쪽 벽돌건물)과 치료실·의료진 숙소로 쓰인 흙동굴(오른쪽). 방우용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중국 산시성 옌안 유만가구 산 중턱에 자리한 백구은국제화평의원 수술실(왼쪽 벽돌건물)과 치료실·의료진 숙소로 쓰인 흙동굴(오른쪽). 방우용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옌안에서 방우용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어머니 의사’로 불렸다. “화평의원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방우용을 위한 생일 축하연을 오늘 연다.” 1943년 2월15일치는 특이하게도 방우용의 50살 생일 기사를 다루고 있다. 당시 마오쩌둥은 방우용에게 직접 쓴 족자를 선물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后知松柏之后凋).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 나이 든 이들은 옌안의 고된 삶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백구은국제화평의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방우용에게 어울리는 헌사였다. 주더(주덕) 팔로군 총사령관 역시 그에게 ‘의국의인의지구’(醫國醫人醫地球·나라를 치료하고 사람을 치료하고 세상을 치료한다)라는 글을 전했다. 강풍이라는 화가는 방우용에게 ‘금일편작’(今日扁鵲)이라는 그림을 선물했다. 그림에는 중국 전국시대 명의였던 편작이 등장하는데 얼굴은 방우용이고 머리 모양과 복장은 편작을 그렸다. 손에는 약이 든 호리병을 들었다. ‘우리 시대의 편작’이라는 극찬이었다.

3월6일 찾은 옌안 유만가구 산 중턱에는 방우용이 근무했던 백구은국제화평의원 수술실과 치료실로 쓰인 석동굴·흙동굴 수십 개가 남아 있다. 위치를 물었더니 젊은이들은 ‘백구은’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이날따라 바람이 거셌다. 밀가루보다 곱게 갈린 흙먼지가 사정없이 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이런 곳에서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유적지 관리는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방우용의 치료실 혹은 숙소로 추정되는 굴은 농기구와 쓰레기가 쌓인 채 버려져 있거나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한씨 성을 가진 30대 여성은 “96살이 된 할아버지 한 분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데 지난해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방우용은 1945년 9월 일제가 패망하자 드디어 귀국길에 오른다. 나라를 떠난 지 20여 년 만이다. 떠나는 방우용을 환송하며 유만가구 백구은국제화평의원 흙동굴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에서 방우용은 웃지 않았다. 방우용은 고향 언양이 있는 남이 아닌 북으로 국경을 넘는다. 옌안에 있던 조선의용군 등 수백 명도 북으로 들어간다.

 

<font color="#C21A1A">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북에서 숙청된 듯</font><font color="#008ABD">방우용은 1956년 종파사건 당시 숙청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방우용은 귀국 뒤 북한에서 검열국 검열위원을 맡았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안파라는 틀 안에서 숙청이 진행될 때 방우용도 같이 숙청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정병일 연구원(학술교수)</font>

‘북한의 초기국가건설과 연안파 역할’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정병일 연구원(학술교수)은 “방우용은 1956년 종파사건(조선노동당 8월 전원회의 사건) 당시 숙청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방우용은 귀국 뒤 북한에서 검열국 검열위원을 맡았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안파라는 틀 안에서 숙청이 진행될 때 방우용도 같이 숙청된 것으로 봐야 한다.” 방우용이 검열위원일 때 검열국장은 옌안에서 같이 활동한 최창익이었다. 연안파 최창익은 만주파 김일성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숙청된다.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남침부대 주력을 이뤘다. 한국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염인호 교수는 “방우용이 조선독립동맹 소속인 것은 분명하지만 의사였던 그가 조선의용군 소속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군인이 아닌 의사였던 방우용의 흔적은 북한, 한국, 중국에서 차례차례 지워진다. “연안파에는 만주파와 달리 엘리트 지식인이 많았다. 만주파가 연안파를 숙청한 뒤 북한 역사에서 연안파는 삭제된다. 한국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 재생산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거부된다. 중국 역시 혁명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이 아닌 조선인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것은 부담이 된다.”(정병일) 온양 방씨 종친회 쪽에서는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40분이 계시지만 방우용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종친회 쪽은 “독립운동을 신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는데 빨갱이로 몰리고 연좌제가 적용된 탓에 친척들이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방병건씨는 “광복군 중심으로 사료가 발굴되다보니 이름이 알려진 몇 사람한테만 포커스가 맞춰지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중국 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연구의 대가였던 최용수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2007년 작고)를 2005년 7월 중국 베이징 집에서 만났다. 당시 최 교수는 “좌익계와 민족주의계 분열의 아픈 기억을 합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협력하고 단결했던 역사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 방우용은 여전히 옌안에 묶여 있었다. 황토 먼지로 뿌연 옌안에서 중국 관영 <cctv>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사망 소식이 들린다.
옌안(중국)=글·사진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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