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세기’는 지났다. 19세기부터 사회 변화의 견인차였던 세계노동운동은 사회운동의 퇴조와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왜소화됐다. 한국 노동운동의 처지는 더 딱한 것이어서, 자본의 ‘사무총국’을 자임한 국가와 적대적인 노조 파괴로 일관하는 기업들로 인해 노조가입률은 다시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고, 이를 타개할 노동자계급의 진보정당은 무력하기만 하다. 가히 ‘노동운동의 죽음’이 회자되는 사이, 벼랑 끝의 노동자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다.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을 이끌어낸 사건들의 연속이다.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 자신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열쇠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크리스 하먼의 이 말은 ‘노동의 세기’가 저문 오늘, 세계노동운동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로 읽힌다. 이런 점에서 평생을 한국 노동운동과 함께한 김금수 선생이 펴낸 1~3권(후마니타스 펴냄)은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려는 전 지구적 차원의 길잡이다. 193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인혁당 사건’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저자는, 한국노동교육협회 대표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논설위원, 노사정위원장,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 등을 지낸 ‘한국 노동계의 대부’로 불린다.
지난 10여 년간 현장의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진행해온 세계노동운동사에 대한 학습과 토론의 결과이자 그 연구 성과인 이 책은, 자본주의의 발생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노동운동의 영광과 상처를 3권에 걸쳐 총 2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담아냈다.
사실 세계노동운동사에 대한 기존 국내 연구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거나, 주요 몇 개국의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돼왔다. 번역서 역시 약사(略史)에 치중해 통사적 차원에서 세계노동운동사를 살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계노동운동사 연구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연구자들의 필요에 부응하고자 집필된 이 책이, 다른 한편으로 좀더 심화된 연구를 촉구하는 의도를 담게 된 까닭이다.
이 책은 세계노동운동사의 주요 흐름을 역사적 맥락에서 개괄하고 있다. 특히 많은 연구들이 주요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운동사를 중심으로 전개돼왔다면, 이 책은 주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책의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노동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고루 담았다.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아시아의 한 챕터로 다룬 구성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한국 노동운동을 객관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고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옅을 수는 없다. 한국 노동운동이 처한 조건을 생각할 때, 이 책의 집필 과정은 자연스럽게 세계노동운동사와 한국의 노동운동, 1848년 혁명과 촛불운동, 이념 논쟁과 진보정당의 분열, 파시즘 성격 논쟁과 한국 사회 사이의 끝없는 대화의 과 정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노동운동이 갖는 정당성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세계노동운동사에 대한 역사 적 서술을 기반으로, 이를 둘러싼 당대의 논쟁은 물론 현재의 주요 이론적 논쟁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계급론, 노동계급 형성 이 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에드워드 팔머 톰슨과 에릭 홉스 봄 사이의 논쟁, 이후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분석 적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니코스 풀란차스의 소개, 아담 쉐보르스키·에릭 올린 라이트 등을 거치며 전개된 현대 계급론의 흐름, 파시즘 의 형성을 둘러싼 풀란차스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논쟁 등 세계노동운동사를 둘러싼 이론적 성과까지 알 뜰하게 챙겼다.
이 책은 노동운동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노동운동 없이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일깨운다. 노동자계급이 작업장에서 벌인 경제투쟁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의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나아졌고, 노동자들이 제기한 선거권 쟁취 투쟁을 비롯한 정치투 쟁 덕분에 민주주의는 그나마 필부들의 눈치를 보게 됐 다. 국가전복 세력, 좌경용공 집단, 집단 이기주의 세력 등으로 매도돼온 한국의 노동운동이 갖는 정당성도 그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300여 년에 걸친 세계노동운동사는 우리에게 말한 다. 세계의 노동운동은 몇 번의 빛나는 승리와 일상적인 패배로 점철됐다. 노동운동의 죽음은 곧 ‘부활’을 잉태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지배가 있는 곳에 노동운동의 저항 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기는 정의와 평등이라는 이상의 승리가 언 제나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든 유지한다면,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전혀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역사학 자 레오 발리아니의 20세기에 대한 회고를 책 말미에 넣 은 점은, 역사를 읽는 일이 희망을 읽는 일에 다름 아니 라는 현자의 위로인 것만 같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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