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을 작황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30포기 남짓 건진 배추는 크기가 작았어도 노란 속이 제법 알차게 들었다. 김장을 해볼까, 욕심을 부려볼 만했다. 그러나 이틀이 꼬박 걸린다는 공정의 번잡함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20포기는 교회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처가 식구들과 나누기로 했다.
“은이 아빠, 대단해.” “이 선생, 노후 걱정 없겠어.” 갈채가 쏟아졌다. 설교 시간엔 조는 게 예사요 십일조는커녕 절기 헌금조차 거르기 일쑤인 ‘나이롱’ 모태 크리스천은 교인들의 잇따른 찬사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첫해 수확의 3분의 2를 바친 셈이니 그동안 내지 않은 십일조, 이걸로 갈음할 순 없을까’ 부질없는 망상도 잠시, 농사꾼 카인을 형제 살해의 비극으로 내몰았던 그분의 매정함을 떠올리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인들의 칭찬에도 뭔가 찜찜했다. “올해는 자네 믿고 김장 배추 따로 주문 안 해도 되는 거지?” 통화할 때마다 거듭 확인하시던 장모님 때문이었다. 인과응보였다. 가난한 신문사에 다니는 변변찮은 기자 사위, 처가 식구들 인정 한번 받아보겠다며 봄·여름 푸성귀 작황을 틈날 때마다 부풀려 자랑한 게 화근이었다. 처가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농사 신동’으로 통하고 있었다.
진실은 머잖아 드러났다. 추석 전 텃밭을 방문한 장모님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서방 수고는 했네만, 이걸로 배춧국이나 끓여먹을 수 있으려나?”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당신은 그래도 유기농 배추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지는 않으신 듯했다. 전화는 수시로 걸려왔다. “이 서방, 배추 좀 어떤가?” 다행히 부실하던 배추는 10월 중순을 넘기며 잎이 무성해지더니, 11월 들어 어엿한 김장 배추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였다. 밭 상태를 곁눈질하는 이제훈 편집장과 정인환 기자의 얼굴에선 부러움과 질투심이 묻어났다. “오, 잘하면 김장하겠는데?”(이 편집장) “당신, 우리 몰래 약 치고 비료 퍼부은 거 아냐?”(정 기자)
두 사람은 기자가 쓴 ‘지금은 도시농업 시대’(906호 특집) 기사를 읽은 뒤 주말 농사꾼 대열에 합류한 경우였다. 스티로폼 상자를 구해놓고 베란다 농사를 시도해볼 요량이던 편집장은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 뒤 혼자 주말농장을 방문해 계약을 했다. 일주일 뒤, 이번엔 가족과 차를 몰고 경기도 의정부의 처가를 가던 정 기자가 들렀다. 집 근처 주말농장 등 몇 군데를 저울질하던 그는 북한산 자락의 빼어난 풍광에 마음을 뺏긴 듯, 역시 그날로 계약을 마쳤다. 며칠 뒤엔 이정훈 기자가 가세했다. 지난해부터 이곳에서 농사짓던 박종찬 기자(한겨레TV)까지 포함하면, 한겨레 기자 5명이 한 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아름다웠던 봄과 여름의 끝4월 말, 첫 푸성귀를 수확했다. 파티가 벌어졌다. 숯불에 노릿하게 구워낸 삼겹살을 갓 딴 상추와 겨자채에 싸먹는 맛은 실로 천상의 맛이었다. 달달한 막걸리가 술술 넘어갔다. 에헤라디야.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 뒤로 두 달은 주말마다 술판이었다. ‘X기자’ 부부와 김성환 기자 부부, 김남일 기자 등 주말마다 식구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X기자가 이죽거렸다. “아주 살판났구만. 이게 무슨 주말농장이야? 주막농장이지.” 또래가 비슷한 아이들은 저희끼리도 잘 놀았다. 개구리와 달팽이를 잡고, 나비와 풀벌레를 쫓아 밭고랑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농장은 좋은 놀이터였다.
6월 중순에 이르자 봄 가뭄이 절정에 달했다. 웅덩이가 바닥을 드러냈고, 지하수마저 끊기는 빈도가 잦아졌다. 농장 주인은 물차까지 동원해 인근 창릉천에서 물을 퍼왔다. 물 쓰는 문제로 농장 주인과 임차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물 한 통 받으려고 15분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농사꾼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갈수기에 빈번하다는 농촌 물싸움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하지만 가뭄에도 오이와 호박, 고추, 토마토는 탈 없이 잘 자랐고, 주말 술판도 중단 없이 이어졌다.
7월, 장마가 시작되자 푸성귀 자라는 속도가 무섭게 빨라졌다. 일주일에 두 번은 밭에 나가 다 자란 잎을 따줘야 했다. ‘푸성귀 보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처가와 이웃들에게 주는 것만으로는 소화가 안 됐다. 일요일마다 전날 따놓은 푸성귀를 씻어 교회에 가지고 갔다. 교인이라야 30명이 조금 넘는 작은 교회니, 그 정도면 점심 한 끼분으로 충분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홍익대 앞 두리반의 유채림씨(집사)는 “이런다고 교회에서 집사 한 자리 내줄 것 같나. 의도가 불순해 보이지만, 어쨌든 맛은 좋다”며 지속적인 공급을 독려했다.
8월엔 열매 따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창 때는 일주일 수확량이 방울토마토 40알. 고추 50개, 애호박 2~3개, 오이 6~7개는 너끈했다. 쌈채소 뜯어먹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였다. 하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추가 떼죽음당한 탓이다. 처음엔 서너 주가 잎이 처지고 시들더니, 열흘도 못 돼 스무 주 전체가 다 말라버렸다. 농장 전체가 그랬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누구는 잎마름병이라 하고, 다른 누구는 탄저병이라고도 했다.
가을, 달콤한 유혹이 시작되다여름이 끝날 즈음, 밭을 갈아엎고 가을 농사를 준비했다. 배추 모종 36포기와 무 모종 30포기를 심었다. 나머지 땅에는 갓씨를 뿌렸다. 모종을 심기 전 농장 주인이 퇴비 살포를 권했다. 농협에서 나온 축분 퇴비였다. “사장님, 한 말씀 드릴게. 사람은 거짓말해도 땅은 거짓말 안 해. 한 포대 뿌리면 한 포대만큼, 열 포대 뿌리면 또 그만큼, 뿌리는 족족 수확으로 나오게 돼 있다니까.” 완곡히 거절했다. 말로는 “조금만 키워 조금만 먹겠다” 했지만, 내심 ‘퇴비 몇 포 덜한다고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농장 주인 말은 사실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다른 밭 배추와 생육 상태가 눈에 띄게 차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줘도 초등학생 주먹만 한 배추 폭은 좀체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모님의 ‘배춧국’ 발언이 나온 게 이즈음이었다.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집사람도 한마디 했다. “모종값이 아깝다.”
이때 박종찬 기자의 유혹이 시작됐다. “형네 배추 너무 안 큰다. 영양제 좀 줘봐.” 박 기자가 건넨 것은 복합비료였다. 일명 복비. “한 주먹씩 배추 옆에 묻어줘. 금방 효과를 볼 거야.” 저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의 설득이 집요해졌다. “솔직히 털어놓을게. 내 배추, 복비 한 번 준 거야. 농약도 한 번 치고. 봐, 잘 크잖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복비는 사람으로 치면 종합비타민 같은 거야. 농약? 그건 감기약이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눈치 빠른 박 기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내 밭에 약 치는 김에 형 밭에도 한 번 쳤어. 근데 봐. 벌레 안 먹고 잘 크지? 옆 밭 이제훈 선배 거랑 비교해봐.” 하긴 이상하긴 했다. 한동안 배춧잎에 들끓던 날벌레가 어느 순간 사라졌으니까. 크기는 작았어도 잎의 색깔 역시 편집장이나 정인환 기자 것보다 짙고 싱싱해 보였다. 마침내 박 기자의 결정구가 날아들었다. “약도 했는데 복비 정도로 고민할 이유는 없지. 어차피 우리가 사먹는 김장 배추, 농약에 질소비료 덩어리야.” 결국 무너졌다.
박 기자의 농사 유형을 굳이 분류하자면 ‘관행농법 이식형’이었다. 올해로 주말농사 5년차인 그는 2년 전부터 무농약·무비료 원칙을 접었다고 했다. 3년간의 무모한 실험 끝에 내린 합리적 결론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땅도 몸도 한 번에 체질을 바꿀 순 없는 거야. 과욕이지. 농약과 화학비료 의존을 조금씩 줄여나가면 되는 거라니까.” 박 기자는 농사를 짓다 모르는 게 있으면 수시로 농사짓는 부친에게 전화해 여쭤봤다. 책과 인터넷 검색에 의존하는 우리와는 처지가 달랐다.
알고 보니 박 기자의 ‘전향 공작’은 기자에게만 시도된 게 아니었다. 이제훈 편집장과 정인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순도 100% 유기농’에 대한 두 사람의 집념은 그만큼 대단했다. 다른 게 있다면 이 편집장은 모든 것을 함께 농사짓는 아내와 상의해 결정하는 반면, 정 기자는 인터넷을 뒤지다 좋다는 게 나오면 우선은 한번 시도해본다는 것 정도였다. 두 사람 다 집요한 학구파 농사꾼이되, 편집장이 ‘숙의형’이라면 정 기자는 ‘팔랑귀형’에 가까웠다.
편집장 부부가 일하는 곳에선 항상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토마토 순을 따고, 상추 한 포기를 옮겨 심더라도 두 사람은 실행에 앞서 조곤조곤 토론을 했다. 어지간해선 술도 마시지 않았다. 밀짚모자·장화·비옷 같은 복장 일체를 갖춘 것도 그가 유일했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그의 아내 역시 밭에 올 때면 시골 아낙의 작업모에 몸뻬 차림이었다. 부부에겐 농사가 속세를 잠시 벗어나는 경건한 의례 같은 것이었다. 비극이라면 이런 진중함이 실제 작황으로는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
100% 유기농업, 아득한 신기루인가이정훈 기자는 농촌 출신임에도 농사일이 서툴렀다. 삽질 세 번에 담배 한 대 빼무는 식이었다. 우리는 그가 부유한 지주 집안의 아들일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한창 술판이 이어지던 4∼5월엔 한 번씩 나타나 밭을 대충 둘러보고 가더니, 여름이 시작되자 그마저 끊겼다. 그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건 더위가 꺾이고 술판이 재개된 9월 중순부터였다. 말하자면 그는 전형적인 ‘부재지주형’이었다.
11월24일 배추와 무 수확을 끝으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 관행농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저 비료 한 줌씩 묻어줬을 뿐인데도, 기자와 박 기자의 배추는 편집장과 정 기자의 것보다 3배 가까이 컸다. 막상 결과를 대면하고 보니 정 기자도 참담했던 것일까. 그의 입에서 “나도 확 갈아타버릴까?”라는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날 저녁 술자리의 ‘슈퍼갑’은 수확한 배추 40포기를 소금에 절여놓고 나왔다는 박종찬 기자였다. 100% 유기농업, 정녕 초짜들은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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