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더하여 도시의 무정함. 신인 감독이 그려보고 싶은 주제다. 그러나 새롭기는 어렵다. 비슷한 소재로 워낙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3월10일 개봉하는 (2009)은 도시의 무정함을 그린 영화다. 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보기 드문 ‘우둔함’ 때문이다. 은 소아성애자(오성철)와 몰락 위기에 놓인 인쇄소 사장(김형도), 폐지 줍는 소녀를 따라간다. 극단적인 설정인데, 영화는 한 번도 과장하는 적이 없다. 급작스러운 감정은 극히 일상적인 생활로 연결되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충격적인 반전이 나타난다.
영화는 ‘신인’ 전규환 감독의 ‘타운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첫 편은 (2008), 셋째 편은 (2010)이다. 모두 도시를 그렸다. 은 이방인이 본 도시, 은 성범죄자가 본 도시, 은 탈북자가 본 도시다. 최근 촬영을 끝내고 편집 중이다. 완성된 영화들은 무수한 해외 영화제에 출품되고 상을 받았다. 은 그렇게 개봉 기회를 잡았다.
살을 저미듯이 날카롭고 세밀한 영화에 비해 감독은 유쾌하다. 그에게 의외의 면은 또 있다. 고집이 세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 지원이 대폭 줄어들고 대기업 자본의 영화산업 장악력이 날로 거세가는 와중에서 그가 1년에 한 편씩 영화를 만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영화의 디테일이 뛰어나다. 김형도가 장례식장에서 절을 할 때 양말 뒤꿈치가 닳아 있다든지, 성폭력 범죄자가 내복 차림에 양말을 꼭 챙겨 신는다든지. 철거 직전의 아파트 생활도 그럴듯하다. 형광등이 나가자 이웃집에 그냥 들어가서 떼온다. 취재를 열심히 했겠다.
=정보들은 매체에 넘쳐난다. 시나리오를 보름이나 한 달 만에 완성한다. 감독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생각은 어떨 것인가, 상태는 어떨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매체에서 넘쳐나는 정보를 또다시 표현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하고 싶지 않다. 디테일은 그 공간에서 촬영할 때 애드리브로 많이 생각해냈다. 뒤꿈치가 닳은 양말도 절을 하는데 허전해 보여서 가위로 잘라냈다.
-영화는 과장하지 않는다. 힘을 주는 대사 없이 일상적인 대화들만 오간다. 충격적인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성철은 폭행 뒤 항상 물을 뜨던 학교 운동장에 가서 피를 씻고 철조망에 오줌을 눈다. 경비에게 들키자 “죄송합니다. 너무 급해서요” 한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싶어한다. 역량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촬영 스태프 역시 특이한 앵글로 찍어보고 싶고, 이동차 깔아놓고 찍고 싶어한다. 하지만 내 촬영 현장의 사전 협의는 ‘테크닉을 부리지 않는다’이다. 충돌도 있었다. 촬영 2~3회차에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놓고 가버린 적도 있다. 김형도가 오성철의 목을 조를 때 배우(오성태)가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흘렸다. 그 정도 몰입해서 연기한 것이다. 스태프들 모두가 그 장면에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편집하면서 다 뺐다. 오버하는 것 같아서. 영혼이 파괴된 김형도든, 성폭행 범죄자 오성철이든 보통 사람과 똑같이 들여다보려 했다. 김형도는 일을 해야 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는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그는 담배를 피우고, 선물받은 생선을 버린다). 성폭행범 역시 담장 밑에서 훔쳐보거나 범죄자처럼 눈을 부라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관객이 동감하기보다 관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철거 직전의 아파트에 사는 오성철과 폐지를 주워 생활해야 하는 소녀 등 도시의 최하층민이 등장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도시가 더 잘 보이리라고 생각한 것인가.=‘실장님’이 등장하는 도시는 도시가 아닌 것 같긴 하다. 빌딩 뒤에는 청계천 인쇄 골목,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노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을 따로 생각해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제도의 불합리를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도 탈북자를 다루지만 정치적인 영화는 아니다. 형사에게 문을 발로 차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했다. 공무원이 하는 방식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사회복지과 직원이 건네는 말, “왜 학교 안 갔어” 하는 걱정이나 “공부 열심히 해야 돼” 같은 격려는 더도 덜도 아니다.
-섹스 장면이 적나라하게 길게 나온다. 불편할 수도 있다.
=영화는 성인들의 이야기다. 성인들이 보통 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거다. 그걸 아름답게 보이게 하거나, 화분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놓고 촬영하는 것은 관객을 성인 취급하지 않는 거다. 내 영화에는 욕도 별로 안 나오고, 폭력적인 장면도 별로 없고, 성행위도 한 장면씩만 등장한다.
-1년에 한 편씩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제에서 상금을 받고 그것으로 영화를 만드는 제작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인가.=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도 PD(최미애 PD, 최 PD는 전 감독과 첫 작품부터 함께해왔다)한테 빚 독촉 전화가 왔다.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히면 안 받는다. (최 PD가 끼어들어 말한다. “첫 영화를 만들면서 차를 팔았고, 두 번째 영화를 만들 때는 차가 필요해서 감독님 동생 차를 빌렸다. 또 돈이 부족해서 그 차를 팔았다.”) 동생에게 두 달 뒤에 갚겠다며 빌린 돈은 3년째 못 갚고 있다. 형제나 선배한테 빌리고 은행 대출로 충당했다. 작게 진 편이다. 다른 영화인들은 수억에서 수십억인 경우도 많다. 영진위 지원이 끊겨서 더 열악하고 힘들어졌다. 칸, 베를린, 베니스 등 큰 영화제에 초청받으면 프린트 비용, 영문자막 지원비 등이 나오는 게 다다. 영화 진행할 때 필요한 사무실은 알음알음으로 빌린다. 모 대학 교수님께서 빌려주신 적도 있다. 촬영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남에서 큰 식당을 하는 사장님은 건물 전체를 빌려주셨다. 그 건물 2, 3, 4층에서 촬영을 했다. 식당에 가면 식사를 대접하시는데 돈으로 주면 안 되나 생각했다. (웃음) 갈 일 없는 고급 식당이니까. 초기부터 도움을 준, 식당 하시는 양 사장님은 제작비의 큰 몫을 대주었다. 영화로 돈 못 버는 거 아는 분인데 선뜻 내주시더라. 신뢰가 더 커졌다. (웃음) 혹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갚자고 생각하고 있다. 대기업은 내 영화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그만두진 않을 거다. 대기업 보란 듯이 영화를 찍을 거다. “안 찍을 거 같지? 찍는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촬영 횟수는.
=4천만~5천만원 정도 들었다. 촬영은 12회에서 15회까지 했다. 는 해외 로케라서 1억원 정도 들었다. 인도에 단 4명이 가서 찍었다. 젊은 신인 감독들이 1억원 가까이 들여 영화를 찍는다는 소리를 듣는다. 또 많은 이들이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영화를 포기한다. ‘타운 시리즈’는 캠코더로 찍었고, 는 DSLR로 찍었다. 요즘엔 아이폰으로도 영화를 찍는다고 하지 않나. 장비는 중요하지 않다. 관객을 움직일 수 있는 콘텐츠가 중요하다. 우리는 산업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다. ‘이 정도 들여야 돼’라는 기준은 없다.
-개봉하는 영화의 손익분기점은.=5만 명이다. 전국에 내 팬이 3명 있다. 5명은 안 되는 것 같고. “얼마 전까지 ○○○ 감독 팬이었는데 이제 감독님을 최고로 존경합니다” 이런 글이 블로그에 올랐더라. 그런 사람이 3명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극장에 걸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렇게 개봉하게 돼 정말 다행이다. 5만이 어렵다는 것을 알겠지만, 팬이 1~2명 더 늘어나면 다음 영화를 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영화 전공을 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무엇을 했나.
=영화 제작일을 했는데 한 작품도 제작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는 기획사(배우 매니지먼트 회사)를 했고, 이전에는 편의점, 이전에는 의류업체, 이전에는 일식집, 이전에는 군대에 있었다. 기획사 할 때 이창동 감독, 김기덕 감독과 같이 일했다. 질투 느끼게 잘 만드는 일, 게릴라처럼 영화 찍는 일, 그때 배웠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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