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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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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봉우리가 사라진 박진표 멜로

<내 사랑 내 곁에> 루게릭 환자와 장례지도사의 비극적 사랑, 뜨겁지 않고 잔잔하기만
등록 2009-09-23 18:09 수정 2020-05-03 04:25

박진표 감독의 장기는 순정한 인물의 눈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다. 에서 순박한 농촌 총각은 구치소 창살 너머의 연인을 향해 다가가려 애쓰며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창살 너머의 연인은 단순한 질병이 아닌 사회적 낙인이 찍힌 에이즈에 걸린 여성이었다. 의 9시 뉴스 아나운서도 냉정을 잃고 통곡했다. 유괴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참혹함을 호소했다. 이렇게 신파의 예정로를 타고 흐르던 영화는 결정적 한 방으로 관객을 울렸다. 서서히 죽어가는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박진표 감독이 만들었다면, 누구나 눈물을 기대할 법하다. 더구나 주연배우 김명민이 무려 20kg을 감량한 사실은, 극한의 통속성에 사실감을 더했을 것이란 기대를 부풀게 했다. 그렇게 박진표 감독의 는 주목을 받았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금기의 소재, 대중적 설득력을 갖춘 전작

김명민이 연기하는 종우는 씩씩한 남자다. “몸이 굳어가다 결국은 꼼짝없이 죽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지만, “백종우 사전에 포기란 없지. 난 꼭 살 거야”라고 다짐하는 남자다. 종우는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 장례식에서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지수(하지원)를 만난다. 지수도 씩씩한 여자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종우에게 “원래 사람은 다 죽어. 순서가 따로 없어. 그러니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당차다. 이런 깨달음은 죽음 가까이에서 살아온 그의 이력과 무관치 않다. 지수는 “귀신밥” 먹고 사는 장례지도사. 주검을 닦고 염을 하는 그의 손을 세상 사람들은 꺼림칙하게 여기지만, 종우만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결혼하고) 돌아온 처녀”인 여자는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죽음과 겹치는 사랑이 순탄할 것이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역시나 영화에서 짐작과 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사랑이 온다 싶으면 사랑이 오고, 갈등이 시작된다 싶으면 칼 같은 말들이 오간다. 성공한 신파는 다음을 예상한 관객도 막상 다음이 닥치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그러나 기대한 눈물은 기대처럼 쏟아지지 않는다. ‘멜로의 기술자’로 통속성을 다루는 내공을 착실히 쌓아온 감독의 작품으로 눈물의 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잠시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순간들이 없지는 않지만, 의 구치소 장면처럼 격정이 터지는 눈물의 봉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박진표 감독이 “(영화에) 특별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한 것은 없다”며 “최대한 슬프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밝힌 것에 비추면 의외다.

박진표 감독은 통속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지만, 대중의 정서에 아부하지 않는 멜로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는 금기의 선에 걸린 소재를 선택해 고유한 색깔의 멜로를 만들었다. 전작인 에서는 젊은이들 못지않게 뜨거운 노년의 성을 다루었고, 에선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렸다. 이렇게 금기의 소재를 다루되 그것을 그리는 방식은 대중적 설득력을 잃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보통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가는 용감한 길을 통해 대중적 멜로영화를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금기와 가장 멀어 보이는 관계를 선택한 이번 영화에선 소재의 예외성과 사랑의 통속성이 일으키는 마찰음이 적다. 그래서 비극성도 덜하다. 사실 박진표 영화가 가진 설득력의 8할은 배우를 통해 나왔다. 황정민은 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폭발시키고 정상급 배우로 발돋움했다. 역시나 김명민도 차마 보기에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와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안정된 배우인 하지원도 두려움 없는 사랑에 빠지는 여인을 절절하게 연기한다.

멜로는 어쩌면 정해진 사랑의 공식 안에서, 운명의 틀 안에서 새로운 사랑의 철학을 보여주는 장르다. 뻔한 흐름 안에서 머물지만 새로운 순간을 만들거나 예상된 흐름을 조금 벗어나 사랑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안에도 사랑과 이별에 대한 사설이 있다. 지수는 처음부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있고 싶을 때까지만 있겠다”고 말하고, 나중을 걱정하는 종우에게 지금이 모여서 나중이 된다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사설에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 철학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대사는 대사에 그칠 뿐이다. 대사를 말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유행가 같은 위안

박진표의 멜로는 유행가 같은 위안을 주는 영화다. 그는 익숙한 방식으로 보편적 추억을 자극해 애틋한 감상을 불러온다. 특히 이번 영화엔 유행가가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영화 제목을 따온 고 김현식의 는 물론 핑클의 , 백지영의 같은 노래를 인물들이 부르는데, 이런 유행가는 단순히 음악을 넘어 박진표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이 절정에서 감정을 숨 가쁘게 토하는 격정적인 발라드 같다면, 는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나직이 부르는 노래에 가깝다. 뜨겁진 않아도 잔잔한 여운은 남는다. 9월24일 개봉.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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