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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여 왜 발해를 무시하는가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역사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이룬 서얼 지식인 유득공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명나라가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중화 사상을 일부에서는 문화적 자부심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사상은 사대주의의 극치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작은 중국이 되겠다는 것으로서 자신의 몸은 물론 영혼까지 중국인이라는 사대주의 중의 사대주의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소중화 사상 속에서 민족사의 영역은 극도로 협소해졌다. 과거 중국에서 동이족(東夷族)의 범주로 한 묶음으로 보았던 만주(여진)·몽골·거란·숙신족 등은 오랑캐가 되었고, 그들의 활동 무대인 만주는 오랑캐 땅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오랑캐들의 땅을 우리 강토로, 오랑캐들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통일신라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거주했으니 곧 고구려이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백제이고,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했으니 곧 신라인데,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으니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이것이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서문)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고 인식하던 시절 유득공(柳得恭)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유득공이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북방 강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이때에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빨리 발해사를 지어서 이를 가지고 가서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는가. 발해의 영토는 곧 고구려의 영토이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어 거두어들였으면 토문강 이북 지역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가지고 거란을 꾸짖어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안 돌려주는가. 발해의 영토는 곧 고구려의 영토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거두어들였으면 압록강 서쪽을 다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했다.”( 서문)

유득공의 이런 인식은 만주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는 “여진은 말을 ‘모린’(毛鄰)이라 하는데, 이것은 모린위(毛鄰衛)라는 장소를 취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우리말로는 말을 ‘몰’(沒)이라 하니 발음이 모린과 가깝다”()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만주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을 찾은 것인데, 언어의 유사성은 곧 민족의 유사성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혁명적 역사 인식의 소유자 유득공의 유년 시절은 불운했다. 영조 25년(1749)에 태어난 유득공은 출생 직전에 돈 전염병으로 가족이 여덟 명이나 사망하는 참화를 겪었다. 그는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서얼이었다. 게다가 부친 유춘(柳瑃)은 그가 다섯 살이 되던 27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유득공까지 죽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모친 남양 홍씨는 “큰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면서 그를 데리고 남양 백곡의 친정으로 내려갔다. 모친의 외가는 무인(武人) 집안이었는데 유득공이 외가에서 무술만 익히자 모친은 “너희 집은 여러 대에 걸쳐 문필을 일삼았다. 비록 문필에 능하지 못하더라도 무(武)로써 부귀를 취하겠느냐”라며 열 살의 유득공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모친은 남산의 본가가 아니라 경행방(慶幸坊·낙원동 일대)에 터를 잡았는데 고관들이 많이 사는 이곳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유득공이 지은 모친의 행장((先妣行狀))에 “내게 서책을 끼고 서당에 나가 배우게 하셨는데 의복이 미려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빈한한 집안의 아이인 줄 알지 못했다”라고 나올 정도로 어머니는 아들을 배려했다. 한번은 밤늦게 독서하던 유득공이 무슨 구절을 발견하고 기뻐서 펄쩍 뛰다가 등잔을 엎지르는 바람에 기름이 어머니의 삯바느질감인 비단을 적셨다. 크게 놀란 어머니가 옷주인에게 두 배의 삯바느질을 해주겠다고 말하자, 옷주인은 “비단은 우리 집에 부족하지 않으니 괜찮다”라고 말하며 면제해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책을 보다 기뻐 펄쩍 뛰었을 정도로 유득공은 독서를 좋아했는데 이는 부친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관례를 올린 유득공이 아버지의 친구에게 인사드렸더니 “아름답도다. 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유득공은 ‘선부군묘지’(先父君墓誌)에서 “눈물을 흘리며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지은 책 16권을 찾아 엎드려서 읽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26살 때인 영조 49년(1773) 생원시에 급제하는데,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얼 출신이던 영조가 서얼허통을 실시해 과거 응시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서얼 출신들은 문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의 삶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며 크게 탄식하기를, ‘서울에는 온갖 물건을 고치는 수선공이 있어서 깨진 쟁반과 깨진 솥뚜껑, 찢어진 생가죽신과 찢어진 망건을 말끔히 고쳐 생계를 꾸린다. 나나 그대나 나이가 들면 글솜씨도 거칠어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굶어죽기를 기다리겠는가? 붓 한 자루와 먹 하나를 가지고 서로 필운대와 삼청동 사이를 오가며 ‘잘못된 시’(破詩)를 고치라고 외치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해 서로 크게 웃었다.”(‘시 땜장이’(補破詩匠))

해학은 해학이되 슬픈 해학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덕무와 유득공은 이미 조선 전체는 물론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지식인이었다. 유득공이 29살 때인 영조 52년(1776) 유득공의 숙부 유련이 서호수(徐浩修)의 막관(幕官·참모)으로 북경에 가면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이서구의 시 399편을 추려서 (韓客巾衍集)으로 엮은 다음 북경에서 (皇華集)의 저자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의 시평을 받았다. 이 일로 유득공 등의 이름은 북경까지 알려졌으나 조선은 서얼 출신인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조는 서얼 출신이 아니었으나 서얼과 노비, 북쪽 사람들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재위 1년 서얼허통절목을 만들어 서얼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법제화했다. 하지만 정조가 부르기 전 그의 생계는 어려웠다. 정조 즉위 초 유득공은 한백겸(韓百謙)의 (東國地理志)를 탐독하고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題二十一都懷古詩)라는 역사시를 남기는데 여기에 그의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유명 지식인, 가난에 고통받다

“회고하면 무술년(정조 2년)에 종강(鐘崗)의 쓰러져가는 낡은 세 칸 집에 살았는데, 붓·벼루와 칼·자들이 뒤섞여 고통스러웠다. 자주 작은 남새밭 옆에 앉으니 콩과 부추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다녔다. 비록 끼니는 자주 걸러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 때로 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읊으며 하루를 보냈다. 어린아이와 어린 계집 종이 듣고 외웠으니 매우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정조 2년(1778) 심양에 가는데 “무릇 요동은 천하의 큰 벌판이다”라는 만주 벌판에 대한 인식은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정조 3년(1779)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인생이 꽃피게 된다. 이덕무·박제가·서리수 등 다른 서얼 학자들과 함께 발탁됐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 교서관동(명동·저동 일대)으로 이사하는데, 그는 “기해년(정조 3년) 이후 성주(聖主)의 은혜로 7년 동안 일곱 번 관직이 바뀌었는데, 녹봉은 입고 먹기에 족하고 집은 붓과 벼루를 늘어놓기에 족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지방 관직들을 겸임하게 해주었다. 그는 금정찰방을 비롯해 정조 10년(1786)부터 포천현감·양근군수·가평군수·풍천부사를 두루 역임했는데, 지방관으로 내려가서는 양반 사대부들과 많은 갈등을 빚는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양역(良役)을 피해 양반 사대부 집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노동력의 대가는 양반 사대부가 모두 가져가고 국가에는 세금 한 푼 안냈다. 이를 은정(隱丁)이라고 하는데, 유득공은 이를 찾아내 명부(名簿)에 등재했다. 양반 사대부의 사실상 노비에서 일반 백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포천현감 시절 이들을 찾아내 국가의 양정(良丁)으로 되돌리자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무릇 백성들이 곡식을 받아 나가는 데 신역(身役)의 유무를 묻고 문서를 살핀 뒤에 있으면 패를 주고 없으면 꾸짖고 그 잘못을 쓰게 했다. 그래서 100여 명을 되찾았다. …읍민들은 귀신이라 여겼고 사대부들은 원한을 품었다.”((古芸堂筆記))

정조의 배려로 관직에 올라

양근군수로 있을 때는 양반도 법을 어기면 매를 때렸다.

“양근군수가 되었을 때였다. …호족은 백성들에게 기쁘면 술을 주지만 화가 나면 명분으로 꾸짖고 사사로이 묶고 마음대로 때렸다. 이를 비통하게 여긴 나는 법으로 바로잡았다. 한 연장자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자네가 다스린 지 수십 일에 양반 여덟을 태형에 처했으니 잘못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나는 ‘나랏일을 보는 데는 (大典通編)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 책에서 양반만을 위한다는 구절은 못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근의 호족들이 매우 두려워했다.”()

그가 파직까지 당하는 등 지방관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던 것은 양반 사대부들과의 이런 마찰 때문이었다. 지방관을 위협할 정도의 호족들이면 중앙에 일가붙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일이 유득공에게는 맞지 않았다. 비록 몸은 고되지만 규장각 검서관이 그의 체질에 맞았다.

그는 서문에서 “나는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이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題二十一都懷古詩), 한사군 역사를 다룬 ‘사군지’(四郡志) 등이 그가 남긴 역사 저술들이다. 또한 24절기에 따른 세시(歲時)에 맞춰 각종 의례 풍속을 다룬 세시풍속지인 (京都雜志)도 저술했다. 조선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농부로 생을 마치다

이렇게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사 인식의 혁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규장각의 검서관 15년을 보내자 돋보기 없이는 작은 글씨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렀다. 정조는 특별히 입직과 글 베끼는 일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재위 23년(1799) 유득공과 박제가를 종신 규장각 검서로 임명했다. 평생 규장각 서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조가 독살설 끝에 사망하면서 운명은 뒤바뀌게 된다. 순조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조의 정적이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한다. 정조 때 성장한 세력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 자행되는데 남인들은 천주교 신자로 몰려 대거 사형당하고, 유득공과 가까웠던 박제가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득공은 비록 유배가지는 않았지만 풍천부사에서 파직됐다. 순조 1년(1801) 유득공은 내각(內閣·규장각)으로부터 북경에 가서 선본(善本)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는다. 고령의 어머니 때문에 망설였으나 모친은 이 명에 따르는 것이 유득공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적극 권유했다. 사은사 조상진(趙尙鎭)의 사행 행렬을 따라간 유득공은 북경에서 친분이 있던 (四庫全書) 책임자 기윤(紀昀)에게 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를 보지 않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던 것이다. 귀국 뒤 유득공은 더 이상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그는 순조 7년(1807)에 사망하는데, 이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글이 있다.

“나는 농사일이야말로 수고롭되 원망하지 않고 즐겁되 지나치지 않아서 부드럽고도 도타운 이치를 깊이 체득한 시도(詩道)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야 물러나 거처하며 몸소 밭을 갈아 시인이 읊조리는 작품 속의 한 농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전원잡영서’(田園雜詠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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