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을 지킨 조선 무인 이징옥, 수양대군과의 충돌에 얽힌 미스테리
▣ 이덕일 역사평론가
태조 7년(1398) 요동정벌을 진두에서 지휘하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주살한 뒤 명에 대한 사대(事大)는 조선의 가장 큰 외교정책이 되었다. 문종 사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를 꿈꾸던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년(1452) 8월 명나라 이부낭중(吏部郞中) 진둔(陳鈍)이 사신으로 왔을 때 하마연(下馬宴)을 주관하면서 사신의 자리를 임금의 자리인 북쪽에 설치하고 자신의 자리는 동쪽에 설치할 정도였다. 명 사신의 거듭된 양보로 동서로 대좌하게 되었으나 수양대군은 같은 해 10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도 일개 낭중(郞中)인 웅장(熊壯)이 전하는 물품을,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공손하게 받아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다.
명나라 사신의 횡포에 맞서다
이런 사대의 나라,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경상도 양산(梁山) 출신의 이징옥(李澄玉)은 특이한 존재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가 쓴 (五山說林)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이징옥이 14살, 형 이징석(李澄石)이 18살 때 어머니가 ‘살아 있는 산돼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그날로 산돼지를 활로 쏘아 잡아왔는데, 이징옥은 이틀 뒤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남들이 네 형의 용력이 너보다 못하다는데 맨손으로 돌아왔으니 웬일이냐”고 묻자 이징옥은 “문 밖에 나와 보소서”라고 답했다. 문 밖에는 큰 산돼지가 누워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산돼지를 쫓아 기운을 빼놓고 몰고 온 것이었다.
그는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갑사(甲士)로 근무하던 중 태종 16년(1416) 무과 친시(親試)에 장원해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다. 이징옥은 급제 뒤 거의 모든 벼슬생활을 함경도에서 보냈다. 세종 13년(1431) 잠시 귀향해 모친을 뵙고 오라는 허락을 받은 이징옥에 대해 은 “이징옥이 9년 동안 귀성하지 못했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세종 6년(1424) 아산(阿山)을 습격한 여진족의 공격을 막아낸 공로로 정3품 경원절제사로 승진한 것을 비롯해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번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세종이 재위 10년(1428) 7월 이징옥에게 어약(御藥)을 내리는데, ‘풍질’ 때문이라는 사관의 기록처럼 풍질도 갖고 있었다.
이징옥은 세종 14년(1432) 병조참판에 임명되어 오랜만에 서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징옥은 명 사신 윤봉(尹鳳)과 부딪치게 된다. 윤봉은 조선 출신의 환관인데, 중국 출신들보다 더 조선을 괴롭혔다. 윤봉은 태종에게 조선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요구해 형제 10여 명이 모두 서반(西班)의 사직(司直)·사정(司正) 등의 벼슬을 받았다. 세종 12년(1430) 사신으로 왔을 때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세종은 농사꾼 출신인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에게 당상관인 총제의 벼슬을 주며 달래야 했다.
세종 14년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 때 접반사로 임명된 인물이 이징옥이었다. 그가 접반사가 된 것은 윤봉이 함길도를 거쳐 귀국하기 때문인데, 함길도를 거치는 이유는 해청(海靑), 곧 매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신들의 매 요구는 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판서 신상(申商)이 “매년 매를 잡아 바치면 함길도 백성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쇠모(衰耗)하게 될 것”이라며 잡기 어려운 척하고 잡은 것도 몰래 놓아주자고 계청한 것이 사대의 나라 조선의 고민을 말해준다. 세종은 당초 이 계청을 받아들였다가 “내 지성으로 사대하였고, 철이 난 이래로 조금도 거짓된 일을 행함이 없었다”면서 정성껏 잡아 바치라고 명령을 바꾸었다. 이런 상황에서 접반사가 된 이징옥은 윤봉의 횡포에 분개하고 맞섰다. 경원에 도착한 운봉이 절제사 송희미(宋希美)에게 좋은 사냥개를 달라고 요청하자 이징옥은 “이미 뇌물을 주지 말라는 칙서가 있고, 또 나라의 명령이 있으니 사리에 비추어 좇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윤봉은 경성(鏡城)에서 수하를 시켜 백성의 개를 빼앗았는데, 이징옥은 개 주인에게 몰래 가져가게 했다. 윤봉이 이징옥에게 “재상(宰相)은 어찌 이처럼 사리를 알지 못하고, 개 한 마리를 아끼시오”라고 화를 내며 그 개를 다시 빼앗아왔다. 백성의 개 네 마리를 더 빼앗은 윤봉이 개 먹이를 요구하자 이징옥은 거부하면서 개 주인에게 일러 모두 가져가게 했다. 화가 난 윤봉이 개 주인을 핍박하자 개 주인은 개를 이징옥의 처소로 보냈고, 이징옥은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윤봉의 부하들은 모피를 구하려다 실패하자 통역관 정안중(鄭安中)을 매질하고, 윤봉은 직접 탄자(彈子)를 쏘아 사람을 다 죽게 만드는 등 횡포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윤봉과 맞서던 이징옥은 급기야 경성 사람이 잡은 해청 1연을 숲 속에 숨겨두었다가 몰래 놓아주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세종은 황희·맹사성 등의 대신을 불러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는 조금도 거짓을 행한 적이 없는데 이제 이징옥이 대사를 그르쳤으니 어찌하여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징옥은 세종 14년 11월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외방에 부처(付處·유배형의 일종)되었다가 1년 뒤에야 풀려났다. 석방 뒤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임명된 이징옥은 함길도에서 새로 관찰사로 임명받은 김종서(金宗瑞)를 만난다.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 불려
세종은 재위 15년(1433년) 1월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고, 그해 12월에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삼아 압록강 유역의 4군(郡)과 두만강 유역의 6진(鎭) 개척에 나섰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데는 이징옥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의 아래 글은 이징옥에 대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
이징옥이 회령을 지키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여 정령(政令)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적변(賊變)이 있으면 즉시 무장을 갖추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을 기다리니, 싸움에 크게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러 부의 야인(野人·여진족)들이 매우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有牙大豬)라고 불렀다. 야인 중에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그가 술 취한 틈을 타서 쏘아 죽이자”라고 모의하자 그 측근의 사람은 “비록 술에 취하더라도 범할 수가 없을 것이라”라고 말했다.( 18년 11월27일)
그러나 그는 무력만을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었다. 세종 16년(1434) 영북진 남면 고산성(古山城) 근처에 250여 호(戶)가 경작할 땅이 있으니 군사와 백성을 이주시켜 국경 방어의 요충지로 삼자고 조정에 건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둔전(屯田)을 갈아서 먹을 것을 있게 해야 북방 영토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징옥이 세종 20년(1438) 3월 모친상을 당하자 세종은 100일 뒤에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키겠다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언을 올려 “이징옥이 오랫동안 풍증(風症)을 앓고 있다”면서 “이징옥에게 2, 3년 동안 병을 치료하게 하자”고 청하자 세종은 이징옥을 경상우도(右道) 도절제사로 임명했다. 또한 80살이 넘은 아버지 이전생(李全生)에게도 첨지충추원사를 제수했다. 그러나 이징옥은 세종 22년(1440) 7월 중추원사(中樞院使) 겸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되는데, 여러 차례 부친을 모시게 해달라는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이징옥은 세종 29년(1447) 부친의 나이가 96살이라며 “관직에서 물러나 봉양을 허락해달라”고 계청해 허락을 받았으나 세종 31년(1449)에 몽골대군이 침공한다는 첩보가 잇따르자 다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때 의 사관(史官)은 “이징옥이 무예(武藝)가 있어 양계(兩界)를 20여 년이나 진압했는데 야인이 외복(畏服)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문종 즉위년(1450) 8월 부친이 사망하자 이징옥은 3년상을 치르겠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으며, 단종도 재위 1년(1453) “경이 북방에 머문 지 이미 30개월이 되었으니, 마땅히 교대되어야 하지만 변방의 숙장(宿將·경험 많은 장수)은 얻기 어렵다”면서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0월 계유정난이 발생하면서 운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렀다.
대금황제가 되려는 계획?
단종 1년 10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상호군 송취(宋翠)를 의금부 진무(鎭撫)로 삼아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체포해 평해(平海)에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계유정난에 반발할 무장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직 도절제사를 체포할 경우 저항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김종서와 앙숙이었던 평안우도 도절제사 박호문(朴好問)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해서 자리를 빼앗은 뒤 체포하려고 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향하던 이징옥은 휘하 장수를 불러 “새 도절제사와 면대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다시 돌아왔다. 여러 차례의 사직 요청을 거부하던 조정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교체시킨 것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징옥이 다시 나타나자 당황한 박호문은 큰 돌로 문을 막고 문틈으로 활을 쏘며 저항했으나 이징옥 휘하의 장사가 쏜 화살에 되레 죽고 말았다. 이징옥은 박호문의 아들 박평손(朴平孫)을 붙잡아 “네 아비는 과연 조정에서 제수한 것이냐?”라고 다그치자 두려움에 질린 박평손이 조정에서 제수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박평손을 베어죽이려 하자 “어찌 조정에서 제수받지 않고 도절제사가 되는 자가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이 절제사의 말을 따르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소리치자 병사들은 박평손을 죽이지 못했다. 이런 소동을 통해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징옥은 군사를 일으켜 수양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수양 쪽에서 작성한 은 종성(鍾城)에 도착한 이징옥이 종성 교도(敎導) 이선문(李善門)에게 “이 땅은 대금황제(大金皇帝)가 일어난 땅이다. 때에는 고금이 있으니 영웅도 다름이 없다. 내가 지금 큰 계책을 정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큰 계책’이란 바로 대금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뜻한다. 에는 이징옥이 “짐이 박덕하여 천명대로 한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지만 감히 스스로 마지못해 위에 오른 지가 해가 넘었다. 지금 하늘이 다시 유시하시니, 내가 감히 상천(上天)의 명령을 폐하지 못하여 모년월일 새벽녘에 즉위하였으니, 경내의 대소 신민은 마땅히 그리 알라”고 직접 즉위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징옥이 여진족 완옌씨(完顔氏)가 세웠던 금나라(1115~1234)를 이은 대금(大金)을 재건해 황제에 올랐다는 것이다. ‘세조조’는 “이징옥이 글을 야인(野人·여진족)에게 보내서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장차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니 야인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오국성은 송(宋)나라 두 황제인 휘종(徽宗)·흠종(欽宗) 부자가 금나라에 생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죽은 성이기도 한데, 고구려의 국내성 자리이다.
압록강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이징옥이 대금황제를 자칭한 이 사건에 대해 의 조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채제공(蔡濟恭)은 (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수양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실권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지 대금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분개하던 그가 명나라에 호소해 단종의 실권 회복을 기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여 년간의 북방 생활을 통해 그는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규합하면 수양을 무찌르고 나아가 명나라와 한판 대결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징옥은 단종 1년 종성 판관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에게 살해당해 죽고 말았다. 과연 그는 사대의 나라 조선에서 대금제국 재건과 황제를 꿈꾸었을까?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국내성을 흐르는 압록강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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