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사형당한 허균, 그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
▣ 이덕일 역사평론가
교산 허균의 생애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친 허엽(許曄)은 동인 영수였으며, 이복형 허성(許筬)과 동복형 허봉(許?), 그리고 누이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1563~89)는 모두 당대의 유명 문사였고, 허균의 조카사위(허성의 사위)는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창군(義昌君)으로서 왕가의 사돈이었다. 그럼에도 허균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유몽인(柳夢寅)은 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사주처럼 살다니, 이상하기도 하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들이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우성전(禹性傳)만은 그 시를 보고, ‘훗날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대 명사였던 우성전이 어린아이의 시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허균 자신도 ‘운명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나는 기사년(己巳年·1569, 선조 2년) 병자월(丙子月·11월) 임신일(壬申日·3일)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겠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18년 이래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와 총욕(寵辱·영예와 모욕)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惺所覆?藁 ))
그의 운명은 사주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그가 열두 살 때 경상도 감사였던 부친이 객사했으며,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친형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갔으며,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은 시댁과의 불화와 자식들의 잇단 사망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스무 살 때인 1588년(선조 21년)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병사했다. 생전에 허봉은 허균에게 “온갖 일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로도 영락하여 풀섶을 떠도는구나”(‘아우에게 보냄’, (荷谷集))란 편지를 보냈는데, 마치 허균의 미래를 암시한 듯하다.
허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이는 두 사람으로, 둘째형의 친구였던 손곡(蓀谷) 이달(李達)과 누이 허난설헌이다. 허균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명으로 꼽혔으면서도 서얼이란 이유로 출사하지 못했다. 허균이 훗날 서얼들과 친하게 지내고, (遺才論)에서 “천한 출신과 서자들도 중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이달을 통해 서얼도 평등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난설헌은 ‘느낌을 노래함’(感遇)이란 시에서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라고 분노할 정도로 사회의식이 강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이 유작 시집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뜻한다.
이런 와중에 겪은 임진왜란은 형과 누이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허균은 모친 김씨와 만삭의 아내 김씨를 데리고 덕원과 단천 등으로 피난 갔는데, 이 와중에 부인 김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허균 일가는 하루에 한 끼 먹기도 어려웠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허균은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타인의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됐을까
허균은 26살 때인 선조 27년(1594) 정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선조 30년(1597)에는 문과 중시(重試·당하관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에 장원해 벼슬이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중국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체제 내에 안주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인생길에 접어든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형화된 삶을 거부했다. 선조 32년(1599) 황해도사가 되었으나 경창(京娼·서울 기생)을 데리고 부임했으며, 중방(中房·지방수령의 종자)이라는 무뢰배들을 거느리고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1573~1610)과 교류한다. 둘은 정신적인 관계였는데 허균은 광해군 1년(1609)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분명 성성옹(惺惺翁·허균)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걸세”라고 쓰고 있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을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계를 떠나지 못했고 사복시정(司僕寺正)과 공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광해군 1년(1609) 형조참의(參議·정3품)로 승진한다. 그러나 이듬해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받고 42일 동안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를 갔는데,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광해군 5년(1613) ‘칠서(七庶)의 옥(獄)’이 일어나면서 그의 운명은 칼끝에 서게 된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명가 출신의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가에 토굴을 파고 무륜당(無倫堂)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 이 중 박응서가 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가 체포되는데, 북인 모사(謀士) 이이첨이 이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했다. 살인강도 사건이 역모로 확대된 것이다. 에 따르면 연루된 김응벽이 “허균이 김제남의 집에 드나들며 날마다 상의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이 서자들과 친하게 지낸 허균이 큰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김제남과 서자들은 모두 사형됐지만 허균은 안전했는데, 의 사관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이첨에게 접근한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
“서양갑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제자인 심우영 등이 모두 역적죄로 복주되자, 허균이 마침내 화를 피한다 칭하고 이이첨에게 몸을 맡기니 이이첨이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 그때 과거 시험의 글이나 상소를 그가 대신 지어준 것이 많았다.”( 5년 12월1일)
바로 이 대목에서 허균 인생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이이첨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도모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허균은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된 것일까? 이이첨의 후원을 얻은 뒤부터 허균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광해군 6년(1614) 호조참의, 이듬해에는 요직인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문전정시에서 1등을 하여 종2품 가정(嘉靖)대부의 가자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 8년(1616)에는 형조판서까지 올라갔다.
허균은 광해군 9년(1617)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 허균은 폐모에 반대하는 북인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였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자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이런 와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良?·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와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김윤황(金胤黃) 등 허균과 가까웠던 수십 명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데, 현응민은 “앞뒤의 흉서는 모두 자신이 한 것이고 허균은 알지도 못한다”고 주장했으나 하인준·김윤황과 허균의 첩이었던 추섬은 심한 고문 끝에 “남대문의 방문은 허균이 작성했다”고 자백한다. 이 자백들은 허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그는 끝까지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허균은 8월24일 하인준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데, 이를 기록한 사관은 그의 죽음에 여러 의문이 있음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을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라는 내용이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라는 평들이 그런 예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협박에 못 이겨 사형에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왕이 일렀다. ‘오늘 정형(正刑·사형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정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이첨 이하가 같은 말로 아뢰었다. ‘지금 만약 다시 묻는다면 허균은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도성의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10년 8월24일)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려고 시도
사관은 이이첨이 그 전에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곧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으나 이는 허균을 급히 사형에 처하여 입을 없애려는 계책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은 허균은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으나 국청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 10년 8월24일)라고 적고 있다.
허균은 실제 역모를 꾸몄을까? 10년 3월19일치는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다”라고 전하고 있고, 8월21일치는 “이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허균의 죽음에는 의문이 있지만 군사를 동원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이 군사를 모은 것은 대비궁에 난입하기 위한 것으로서 광해군도 허락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다. 황정필의 공초에 따르면 허균은 승군과 황해도·평안도·전라도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데, 실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인목대비가 최종 목표였을까? 대비궁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동원해 실제로는 조선에 율도국을 건설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豪民論)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民)일 뿐이다”라며, “견훤(甄萱)·궁예(弓裔)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라고 썼던 허균. 그는 진정 율도국을 건설하려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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