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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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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은 영웅을 낳는다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귀족 자제들만을 위한 과거를 포기한 홍경래, 세상을 향해 붓 대신 칼을 들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말기 관변 쪽은 홍경래(洪景來)를 서적(西賊), 또는 경적(景賊)이라고 불렀다. 서적(西賊)은 그가 봉기한 관서지역의 역적이란 뜻이고 경적(景賊)은 그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딴 것이다. 순조 11년(1811) 발생한 평안도 민중항쟁에 대해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1977년판)는 ‘평안도 농민전쟁’이라고 계급 간의 전쟁으로 표현했다. 남한에서는 ‘홍경래의 난’으로 주로 칭해왔으나 (1997) 36권에서는 ‘서북지방의 민중항쟁’이란 중간 제목 아래 ‘홍경래 난’이라고 절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사료는 의외로 소략하다. 과 관군 쪽 박기풍(朴基豊)이 쓴 등 진압군 쪽의 사료가 대부분이다. 반대쪽 시각은 주로 소설 속에 구현돼왔다. 철종 12년경(1861)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역사소설 (辛未錄)은 관군 쪽의 시각으로 서술되었지만 (洪景來實記)나 한문소설인 (洪景來傳) 등은 민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다. 양쪽 사료를 참고해 일생을 추적하면 홍경래는 정조 4년(1780)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화(中和)에 있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가서 공부하는데, 한문소설 은 이 무렵에 관한 소식을 전한다.

“(史略)을 읽다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가 죽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고 죽으면 큰 이름을 남긴다’ 같은 대목에서는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고 감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놈’이라 불린 서북인들

같은 책에는 그가 12살 때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荊軻)를 애도하는 ‘송형가’(松荊歌)라는 글제를 받고는, “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秋風易水壯士卷/白日咸陽天子頭)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유학권이 “가을 바람은 역수 장사(형가)의 주먹이요, 빛나는 태양은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이다”라고 해석하자, 홍경래는 “가을 바람 부는데 역수 장사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 천자의 머리를 친다”라고 바꾸어 해석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유학권은 그 다음날로 홍경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홍경래는 혼자 경사(經史)를 통독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달이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에 진을 치니, 바람은 나뭇잎을 몰고 가을 산에서 싸우도다”(月將衆星屯碧落/風驅木落戰秋山)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홍경래는 체제 내의 입신을 꿈꾸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한 그가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대과는 홍경래 같은 지방 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등용문이 아니었다. 은 세도가 자제들은 과장에 가지 않아도 급제하지만 시골 선비는 한갓 노자와 다리 힘만 헛되이할 뿐이라며, 이들이 낸 답안지는 근시배(近侍輩)들의 휴지로 사용될 뿐이란 현실을 전하고 있다. 과거는 경화세족(京華勢族)으로 불렸던 세도가 자제들의 관직 진출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서북 출신이었던 홍경래의 경우는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이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遺民)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人)이라 부르지 않고, ‘놈’(漢)이라 불렀다. 서북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

은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改造犯上之心)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홍경래란 혁명가의 탄생이었다.

동지 탐색에 나선 홍경래는 가산(嘉山)의 청룡사에서 태천(泰川)의 명가 출신 서얼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동지가 된 둘은 가산의 역속(驛屬)으로 있는 부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우군칙의 아내를 점쟁이로 변장시켜 이희저에게 보내 “10년 이내 대운을 만날 것인데, 반드시 수성(水姓)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1년 뒤에는 우군칙이 이희저의 부친 묏자리를 봐주면서, “당대(當代) 발복(發福)하겠지만 수성 가진 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희저 앞에 ‘물 수’(水=?)변을 가진 홍(洪)씨가 나타나자 이희저는 귀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곽산의 김창시(金昌始)도 비슷한 방법으로 포섭했다. 이 밖에도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김사용(金士用) 등의 장사를 포섭했다. 은 홍경래가 순조 11년 모친과 형을 모시고 가산의 다복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데, 바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사이에 낀 버드나무 잎과 같은 형국의 땅으로, 좌우가 유달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울창한 산비탈로 은폐된 아늑한 골짝이었다. 뒤쪽으로는 경의(京義) 간의 대로와 통하고, 앞에는 대령강(大寧江)이 흐르고 있었다. 골짝의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약 20리 길이였고, 안과 바깥 골짝은 수륙 통행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적당히 깊고 옅어 숨거나 나타나는 데 모두 편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 없다

홍경래는 금광을 한다는 명분으로 장정들을 끌어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장정들에게 땅을 파게 해서 기운을 평가하고, 새끼줄을 쳐놓고 높이 뛰게 해 날램을 평가했다. 사격·기마·검술을 가르쳐 병졸의 등급을 정하고, 후한 상급을 베풀어 환심을 샀다. 홍경래는 순조 12년(1812) 임신(壬申)년을 거병의 해로 잡았다. 홍경래는 김창시를 시켜서 “일사횡관(一士橫冠)에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고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이라”는 참요(讖謠)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일사횡관은 임(壬)자의, 십필가일척은 신(申)자의 파자(破字)로서 임신년에 기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의 파자가 퍼지는 가운데 다복동에 1천여 명이 몰려들자 거사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홍경래는 거사 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15일 평양의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2월15일 야반에 많은 장졸을 평양에 보내 내응토록 하고, 대동관(大同館)에 불을 질러 관민이 불을 끄는 틈을 타서 각 관서에 불을 지르고, 관장을 겁박하여 죽이고 평양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관 밑에 매설했던 화약통과 도화선이 눈에 젖어서 약정한 시간에 폭발하지 않고 16일 오후에야 폭발하였다. 계획이 빗나가 성사치 못하고, 도리어 군교들의 수색이 삼엄해지자 파견했던 장사들이 위험을 느껴 각자 다복동으로 도주했다.”()

수색이 심해져 일부 동지들이 체포되자 홍경래는 순조 11년 12월18일에 다시 거병했다. 홍경래는 평서(平西)대원수, 총참모는 우군칙, 참모 김창시, 선봉장 홍총각·이제초, 후(後)장군 유후험, 도총 이희저, 부원수 김사용 등이 주요 지휘부였다. 출병에 앞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박기풍의 는 이때 김창시가 낭독한 격문을 적고 있다. “대개 서북지방은 기자의 옛 강역이고 단군의 옛 굴(窟)로서… 임진난 때 나라를 재조(再造)한 공이 있고…”라고 시작하는 격문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면서, “이러한 때 다행히 세상을 구할 성인이 평북 선천 검산 일월봉 밑 군왕포(君王浦) 아래 가야동(伽倻洞) 홍의도(紅衣島)에 탄강하였다”라고 선포했다. 특별히 진인(眞人)을 추대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인 탄강’ 운운은 천명을 강조해 민심을 얻고자 하는 계책일 것이다. 드디어 봉기가 시작되자 선봉장 홍총각은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경래의 본진보다 앞서 가산으로 진군해 단숨에 점령하고 군수 정시(鄭蓍)와 그 부친을 처단했다. 첫 전과였다. 은 홍경래군이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이 없고’ ‘본진의 장졸 가운데서 규칙을 범한 자 두세 명을 노변에서 효수하고, 각 방면에 전령하여 이 사실을 방으로 널리 알려 기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의군(義軍)의 면모를 보이려 한 것이다. 민심을 얻은 봉기군에게 평안도 각 현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산과 곽산은 물론 삽시간에 정주, 선천, 박천, 태천, 철산, 용천을 점령했다.

전략적 실수로 정주성에 갇혀

“여덟 고을이 잇달아 함락되고 도로가 막히자 인심이 물 끓듯 흉흉했다. 남북군이 홍경래의 명령대로 이르는 곳마다 옥을 파해 갇힌 자를 석방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면서도 군기를 엄히 단속하고 노약자를 위무하니 민심이 홍군(洪軍)으로 돌아와 마음으로 복종했다. 모병(募兵)에 응하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려는 사람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이때 전략적 실수가 발생했다. 여덟 개 군현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안주를 점령하기 위해 조기 남하했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것이었다. 안주는 평안병사의 본영이 있는 군사상 요충지였다. 당초 태천을 치기 전에 안주를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사이 관군이 집결해 수성태세를 갖췄다. 에는 안주 공략을 적극 주장했던 김대린(金大麟) 등은 홍경래가 듣지 않자 초조해져 ‘대사는 다 끝났다’며 홍경래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려다 홍경래에게 되레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한숨을 돌린 조정은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로 삼아 현지로 급파하고, 뒤이어 이요헌(李堯憲)을 관서순무사, 박기풍을 중군(中軍) 등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12월27일 1천여 명의 관군과 봉기군이 안주 대안(對岸)에 있는 박천의 송림(松林)에서 맞붙었는데, 초전에는 홍총각이 이끄는 봉기군이 승리했지만 관군이 계속해서 증원되는 바람에 패해서 정주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관군들의 노략질에 분개한 백성들이 대거 홍경래를 따라 정주성에 입성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쫓기듯이 들어간 정주성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식량이 떨어져서 가축을 다 잡아먹고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형편이 되었다. 관군들은 성 안에 연을 띄우거나 편지를 보내 귀순을 종용하며 심리전을 펼쳤는데, 홍경래로서도 이를 방지하기 어려웠다.” 간간이 국지적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아사자가 속출하자 홍경래는 3월23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여자 215명과 어린아이 13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은 이때도 홍경래는 늠름했다고 전한다.

“경래는 성 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때때로 연훈루(延薰樓) 아래에서 말을 달리고 칼춤을 추어 장졸들이 탄복케 했으며, 군졸들 가운데 전사자가 생기면 직접 제사를 지내주고, 병자는 몸소 문병을 갔다. …하루는 검을 뽑아 춤을 추며 입으로 시 한 짝을 지어 읊으니, ‘천지가 뜻이 있어 한 남자를 낳았도다’(乾坤有意生男子)라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무작정 농성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경래가 고단한 성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은 벗어날 도리가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던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하나는 박종일(朴鍾一)이 서울에서 난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요, 둘은 북쪽의 각 고을로부터 원병이 오기로 한 것이요, 셋은 정시수(鄭始守)가 호병(胡兵)을 이끌고 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 ‘호병’, 즉 만주족 병사의 동원 여부가 주목된다. 정시수는 5살 때 만주로 들어가 마적 두목이 된 인물로서 홍경래의 요청시 동조 거병하기로 했으나 연락을 맡은 강계의 향임(鄕任) 송지렴(宋之濂)이 김사용의 궤멸 소식을 듣고 관군 쪽에 가담해 무산됐다.

불사를 바라는 민중의 마음

그사이 관군은 굴토군(掘土軍)으로 성 아래 땅을 파서 북장대의 지도(地道)에 화약을 장전시켰다. 순조 12년 4월19일 화약이 폭발하면서 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홍경래는 이희저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으나 은 “위에 쓴 것(홍경래 전사)은 관군 측의 기록이고 정주의 야담에는 경래가 성벽이 무너질 때 몸을 날려 성을 넘어서 먼 곳으로 달아났으며 그날 살해된 것은 가짜 홍경래였다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는 “도망?야 잡지 못?고”라고 전하고 있다. 홍경래의 불사(不死)를 바라는 민중들의 마음이 소설 속에 담긴 것이다. 은 “성이 함락될 때 관군들은 함부로 총질하고 창질하여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죽여서 쌓인 시체가 성중에 가득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2천 명 가까운 봉기군이 참살당했다. 바로 이런 폭정이 홍경래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다.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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