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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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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필카로 돌아갈래

등록 2007-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손목에 대롱대롱, 꾹 누르면 치이잉 소리 내는 필름 똑딱이가 좋아

▣ 김도훈 기자

필름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났다. 귀하게 공돈(!)으로 갔던 푸켓과 오키나와의 사진들은 몇 번의 컴퓨터 하드 고장으로 인해 비물질의 세계 속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진작에 CD로 구워놓지 않은 귀차니즘을 한탄해보지만 소용없는 일. CD의 수명이 그리 길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부러 떠올리며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10년이 지나지 않아 디지털 사진들은 JPG의 굴레를 벗고 훨훨 자유의 몸이 될 터이다. 그러나 정말로 가슴을 쑤시는 문제는 사진의 영속성이 아니었다.

아무리 파일을 뒤지고 뒤져도 디지털로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속에서 진정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단 1메가바이트도 없었다. 그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꾹꾹 눌러댄 셔터는 딱 돈이 들 필요가 없는 만큼의 사진만 담아냈다. 포토숍으로 만져봐야 거기서 거기다. 허망한 마음에 오피스텔의 벽을 바라봤다. 그 옛날 필름 카메라로 찍어놓은 사진들이 벽에서 반쯤 떨어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던 순간들이 절로 떠올랐다. 젊고 생생하고 파릇파릇했던 좋았던 시절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꾹 누르면 치이잉 하고 요란을 떨던,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필름 카메라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말 홍대 앞, DSLR가 무서워

하지만 워낙 몸이 연약한 터라 니콘 FM2처럼 인기 있는 SLR(일안반사식) 카메라를 살 마음은 없었다. 의 히로스에 료코가 SLR 카메라를 목에 걸고 신주쿠를 뛰어다니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촬영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얄팍한 손목에 육중한 SLR가 걸려 있었을 리 없지. 내게 필요한 카메라는 나의 남자답지 못한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갑작스러운 순간들을 순식간에 찍어낼 수 있는 스냅용 카메라였다. 똑딱이 필름 카메라라면 아름답게 제 몫을 해낼 터였다. 필름 똑딱이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고 인터넷의 카메라 사이트를 돌아다녔더니, 나 같은 족속들이 속속 필름 카메라로, 그중에서도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귀환하고 있었다. 얼리어답터의 시대에 불어닥친 아날로그 어답터의 물결이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필름 카메라, 특히나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DSLR(디지털일안반사) 시대에 대한 묘한 반골 심사가 숨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주말의 홍익대 거리로 나서는 순간, 무시무시한 크기의 DSLR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친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이토록 많은 DSLR 애호가들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의 DSLR가 조금 두렵다. 그들의 거대한 대포가 나의 푸석푸석한 머릿결과 기름진 얼굴을 겨냥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양손은 얼굴을 가리고야 만다. 특히 DSLR 특유의 무시무시한 셔터음이 귓가에 들려오는 순간, 혹여나 그 셔터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닌가 싶어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누군가 앙증맞은 똑딱이 카메라를 나의 행로에 들이민다면, 나는 모든 방어벽을 공기 중으로 날려버린 뒤 해사하게 웃어줄 수도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썼다지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제발이지 이런 대가의 이름을 똑딱이 카메라 애호가 따위가 인용한다고 노하지 마시길!)은 당시의 사진가들이 좋아하던 롤라이플렉스 같은 중형 장비들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사용했던 카메라는 손에 간편하게 쥘 수 있는 소형의 라이카 카메라였다. 작아서 손에 감출 수 있는 라이카 카메라야말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브레송의 무기였을 것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순간에 동시에 인지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쉬운 말도 꼬아서 음유하기를 즐기는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잠언으로만 들릴 뿐이다. 나에게 중요한 사실이라고는 브레송이 작은 카메라를 선호했다는 것뿐이다. 손에 꼭 쥐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가벼운 ‘눈’이야말로 그에게 결정적 순간을 남겨주었으리라 억측해보는 것이다.

사실 똑딱이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에도 무시받는 족속들이었다. 소유자가 마음대로 노출 등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필름 똑딱이 사진들에 어떠한 예술적 가치를 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필름 똑딱이를 사용하는 직업적 사진가 부류들이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편견은 조금 희미해졌다. 1995년 당시 여고생이었던 일본 작가 히로믹스는 라는 서른여섯 쪽의 자작 사진첩으로 캐논이 주최한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일본 사진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캐논 사진 공모전은 일본 내에서도 가장 저명하고 인기 있는 사진작가들의 산실이었고, 히로믹스는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으며, 그녀의 모든 사진은 심지어 코니카 빅미니라는 필름 똑딱이만으로 찍힌 것이었다. 그녀의 유명한 수상소감은 얼이 빠질 만큼 어이가 없는 동시에 적잖이 감동적이다. “수동 카메라로 찍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자동 카메라를 썼습니다.” 이 얼마나 당당한 여고생의 객기인가.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뉴욕 청년 라이언 맥긴리 역시 똑딱이 카메라로 출세한 케이스다. 그는 야시카 T4라는 필름 똑딱이를 이용해 노출이고 뭐고 상관없이 팍팍 셔터를 누르며 알몸으로 뒹구는 친구들을 찍어 사진계의 스타가 됐다. 히로믹스와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들은 별다른 계산이 없는 탓에 오히려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이 번득인다. 노출이나 구도가 제대로 맞은 사진도 잘 없지만, 대신 그들은 찍으려는 대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그들의 사진에 담긴 청춘들은 카메라에 대한 아무런 경계심이 없다. 작고 앙증맞은 필름 똑딱이였기에 가능한 사진들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것이야말로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은 아니었을까. 나는 브레송의 철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둔감한 남자지만, 폰카를 손에 든 여고생들의 싸이월드 사진첩에서 비로소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비슷한 것을 본 것도 같다.

통속적 감상적 호사 취미라 할지라도

필름 똑딱이는 일종의 호사 취미일 수도 있다. 필름 1통을 스캔하고 인화하는 데 1만원가량의 돈이 든다. 게다가 필름을 스캔하기 위해서 현상소로 가는 것 또한 귀찮고 성가시다. 하지만 인화된 사진들을 손에 쥐고 바라보는 순간의 기쁨은, 찍은 장소에서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한 디지털 이미지를 보는 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흥을 준다. 어쩌면 이 모든 건 통속적이고 감상적인 아날로그적 호사 취미에 불과할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디지털의 즉각적인 편리함을 사랑하는 누구라도 고향집 장롱을 한번 뒤져보시길. 30여 년 전 엄마와 아빠의 지문이 셔터에 묻어 있는 똑딱이 카메라들이 긴 잠을 청하고 있을 게다. 당신의 소풍과 졸업 사진을 담아냈던 그 친구들이다.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필름을 물리는 순간, 잠자던 태엽이 힙겹게 필름을 감아올리는 소리가 들릴게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억 속의 그 소리다.



‘나만의 똑딱이’는 어디에

고향집 장롱 속에도 필름 똑딱이가 없는 분들을 위한 구매 가이드

필름 똑딱이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약간은 값비싼, ‘럭셔리 똑딱이’라 불리는 카메라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럭셔리 똑딱이는 콘탁스에서 출시된 T2와 T3다. 강렬한 콘트라스트와 선예도를 자랑하는 칼 자이스 렌즈를 달고 있는 덕에 해가 갈수록 중고 가격 또한 높아만 간다. 역사상 최고의 똑딱이로 인정받는 미놀타 TC-1은 아라키 노부요시가 애용하는 카메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집에는 대지진을 대비해 미놀타 TC-1과 트라이 엑스 필름 10롤. 그리고 200만엔을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나는 값비싼 TC-1을 월급의 절반을 투자해서 구입하는 만용을 저질렀다. 문제? 8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이라 진정으로 ‘만용’이 필요하다는 거다. 라이카 미니룩스는 육중한 몸집 때문에 ‘라지룩스’라 불리기도 하지만 결과물의 오밀조밀한 표현력에서는 최고로 평가되는 똑딱이다. 그외 럭셔리 모델로는 니콘 28TI, 롤라이 AFM35, 리코의 GR 시리즈 등이 있다.
필름 똑딱이 한 대에 30만원 이상을 투자하는 것이 지나친 낭비라고 여긴다면? 비교적 중저가의 필름 똑딱이를 노려봄직하다. 코니카 빅미니, 올림푸스 뮤2, 니콘 AF600, 미놀타 AF-C 등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최상의 똑딱이들이다. 특히 코니카 빅미니와 니콘 AF600은 30cm의 최소 초점 거리를 갖춘 덕에 디카족들이 좋아하는 음식 사진들도 능숙하게 필름 속에 담아낼 수 있다. 카메라 회사들이 더 이상 필름 똑딱이를 생산하지 않는 탓에 구입을 위해서는 각종 카메라 사이트의 중고 장터를 헤매는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필름 똑딱이들이 올라오는 곳은 포익틀랜더 클럽(www.voigtclub.com)과 로커클럽(www.rokkorclub.net)의 장터다. 영어와 크레디트카드 이용에 능숙하다면 인터넷 국제경매 사이트인 이베이(www.ebay.com)를 권한다. 세상의 모든 중고 필름 똑딱이들이 매일같이 거래되는데다 운만 좋으면 중고 거래가의 절반 이하로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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