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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너희들은 안 미쳤어

등록 2004-10-29 00:00 수정 2020-05-03 04:23

특성화고교 아이들의 건강한 이야기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서체를 뒤죽박죽 섞어 쓴 책표지가 심란하다. (서철인 엮음, 맥스미디어 펴냄)라니, 책 제목도 험하다. ‘얼짱, 몸짱보다 더 아름다운 배짱. 일류대 출신 백수들을 비웃는 고졸 명장들의 멋진 승부수. 놀면서 대학 가고 즐기면서 유학 가는 통쾌한 이야기’라는 표지 문구는 자신을 희화화한다. 출판계 프리랜서인 엮은이에게 학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서점가와 서평란의 ‘마이너리티’다.

하지만 책에 담긴 아이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소수자의 영역에만 묻어놓기엔 아깝다. 내일의 제도를 알 수 없는 한국의 교육현실 속에서, ‘입시’가 고교 3년과 대학 4년을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제쳐버린 이들의 이야기는 귀기울여볼 만하다. 특성화 고교 재학생 14명과 졸업생 11명의 체험담은 최소한 하버드대학에 간 금나나나 민족사관학교의 유학 성공담보단 현실적으로 들린다.

손질된 초·중등교육법에 따라 1998년부터 선보인 특성화 고교는 정규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을 보듬는 대안교육과 적성의 계발을 통해 전문가를 조기 양성하는 직업교육 등 2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이 책은 후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점수별로 네모칸에 지원 가능 학과를 배치한 진로 상담서를 ‘정상’으로 치부하는 사회에선, 자진하여 밤을 새워 기능대회를 준비하고, 자진하여 동아리를 만들어 정규수업을 보충하는 이 아이들을 ‘미쳤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생활은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자’는 국민교육헌장에 부합되니 미쳐야 ‘정답’이 되는 걸까.

부모들은 평범함을 원했다. “컴퓨터가 내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나는 엄마에게 전학 이야기를 꺼냈고, 엄마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선린인터넷고등학교 김가영)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를 설득했다. “엄마, 길지 않은 인생인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 유빛나) ‘선택’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친구들에게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대학만 가고 보자는 식의 진학은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큰 고민 없이 정해진 수순을 밟는 친구들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한진고등학교 김미림)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곳이 바로 특성화 고등학교다.”(선린인터넷고등학교 김가영)

물론 특성화 고교의 한계도 보인다. 성공 사례의 그늘엔 껍데기 특성화 고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 뒤 바로 취업한 아이들은 대졸자와의 차별로 인한 임금격차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하지만 대입에서 특별전형의 파이는 크지 않고, 막상 진학해도 고교 시절 배운 걸 반복하니 아이들은 답답하다. 다양한 사례를 엮은 이 책을 놓고 정책자료집과 비교우위를 논할 순 없겠지만, 대다수의 교육계 인사들이 상위 3%의 리그, 고교등급제 논란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아이들은 ‘마이너리티’가 아니다. 97%의 아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집에서는 동생들까지도 ‘꼴통’이라며 나를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공부가 아니라면 기술로라도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장남으로서 내 자리는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는 어느 아이처럼 아이이든 어른이든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가꾸려는 솔직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가감 없는 아이들의 열정이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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