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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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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 규정 없는 근로자대표, 악용하는 사쪽

선출 규정 없어 주 52시간 노사 합의 때 사쪽 악용 우려
등록 2020-01-09 10:46 수정 2020-05-07 09:59
노동조합 쪽과 사용자 쪽 교섭위원이 임금 교섭장에서 마주 앉아 있다. 정용일 기자

노동조합 쪽과 사용자 쪽 교섭위원이 임금 교섭장에서 마주 앉아 있다. 정용일 기자

회사 경영진의 대표는 대표이사다. 그렇다면 회사의 노동자 대표는 누구일까? 노동조합이 있다면 노조 위원장일 수도 있지만, 직원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가 아니거나 교섭대표 노조가 아니라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보기엔 어렵다. 노조가 없는 경우엔 더 애매하다.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에 명시된 노사협의회의 ‘근로자위원’도 있고, 근로기준법에는 ‘근로자대표’라는 제도와 ‘노동자 과반수’라는 제도도 있다.

여러 노동관계법에 규정된 ‘노동자 대표’ 제도는 2018년 7월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주 52시간제)와 맞물려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노동조건 노사대등결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임금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노동조건이 노동시간이니만큼, 주 52시간제를 사업장에 적용할 때 노사가 합의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복잡하고 부실한 노동자 대표 제도 탓에 노동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합의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주 52시간제 시행은 노동자 대표 제도의 손질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취업규칙 변경 쉽게 한 근로자대표제

주 52시간제 시행을 전후해 기업들은 유연근로제(선택적 근로시간제·탄력적 근로시간제·재량근로제)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유연근로제는 원칙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는 관련이 없으나, 업무 수행 과정에서 특정 주에 52시간을 넘겨 근무할 수 있게 한다는 명분 아래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유연근로제를 도입하려면 노동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가 있는 경우에는 그 노조, 과반수 노조가 없는 경우에는 노동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근로자대표는 연장·야간 근로수당 대신 부여되는 ‘보상휴가’나 특정 업종에서 무제한 연장근로를 가능하게 하는 ‘근로시간 특례’ 제도 도입, 유급연차휴가의 대체에 관한 서면 합의 주체이기도 하다. 근로자대표는 ‘과반수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사실상 과반수 노조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교섭대표 노조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교섭대표 노조가 되지 못할 경우 사 쪽과의 교섭을 비롯한 대부분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에 견주면 근로자대표의 권한이 매우 막강하다. 특히 2018년 기준 11.8%에 불과한 노조 조직률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근로자대표를 어떻게 선출할지는 노동관계법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노조의 경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설립·운영의 민주성, 조합원 자격 등을 규정한 여러 조항이 있고, 사용자가 노조 운영에 지배·개입하는 부당노동행위를 할 경우 처벌하는 조항도 있다. 근참법에도 노동자를 대표할 근로자위원 선출과 권한 등에 관한 조항이 있다. 하지만 근로자대표는 선출 방법과 임기, 권한, 사용자의 압력에 대한 보호 방법 등에 관해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이러한 입법상 ‘미비’는 왜 생겨났을까?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한겨레21>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근로자대표가 서면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취업규칙 변경을 통해 가능한 것인데, 근로자대표 제도가 도입되면서 취업규칙을 손쉽게 변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근로자대표 선출 등에 관한 내용이 법에 없는 것은 입법자의 실수가 아니라 고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근로자대표 제도는 1996년 12월31일 유연근로제에 관한 조항이 근로기준법에 신설되면서 처음 생겼다. 유연근로제의 한 종류인 탄력근로제가 도입될 경우, 노동자는 불규칙한 근무는 물론 연장근로수당 감소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된다.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려면 사용자는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근로자대표라는 제도를 신설하면서 사용자가 손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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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장을 근로자대표로 지정하기도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생겨난 근로자대표 제도를 악용하는 것 역시 사용자들이다. 2019년 5월 노동단체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노동자 상담 사례를 보면, 노동자가 전혀 알 수 없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근거로 공휴일 휴무를 연차로 대체하도록 했다는 사례부터, 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특정일 휴무로 대체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사실상 사용자에 해당하는 ‘공장장’을 근로자대표로 대표이사가 ‘지정’하는 회사도 등장했다.

정부가 주 52시간제의 보완 대책으로 손꼽는 탄력근로제 도입 과정에서도 근로자대표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 2018년 10~11월 사업장 2436곳을 대상으로 한국노동연구원이 진행한 ‘탄력근로제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용역 결과를 보면, 탄력근로제 도입 때 근로자대표 또는 노조와 “별도로 협의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사업장이 57.7%로 절반이 넘었다. 다음으로는 근로자 개별 합의(12.8%),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 합의(10.6%)로 나타났다. 이는 모두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으로, 법률상 허술한 제도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무노조 사업장에서 유연근로제가 노동자들의 제대로 된 동의 없이 도입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지만,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 확대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근로자대표의 권한은 더욱 커진다. 탄력근로제는 단위기간을 평균해 52시간을 넘기지 않는 것을 전제로 주당 최대 64시간까지 일하면서, 연장근로수당은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다. 현행법의 단위기간은 3개월이지만 이를 6개월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노사정 합의에서 나온 개선안이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법안 내용을 보면 단위기간 확대에 따른 집중적인 장시간 노동을 예방하기 위해 하루 근무를 마친 뒤 다음 근무 시작까지 최소 11시간 휴식 보장을 의무화하고, 임금 손실 방지를 위해 사용자에게 임금 보전 방안을 마련해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11시간 휴식 보장은 ‘불가피한 사유로 인해 근로자대표(또는 과반수 노조·이하 같음)와의 서면 합의가 있는 경우’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 임금 보전 방안 신고도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에 임금 보전 방안이 포함되도록 한 경우에는 신고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불규칙한 근무를 방지하기 위해 주별·일별 노동시간을 서면 합의에 정하도록 하는데, 이 역시 근로자대표와 협의할 경우 노동시간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탄력근로제 도입 자체를 원천적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도입부터 변경까지 사용자의 의사에 따라 남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충분히 제기될 만하다.

노조 없는 중소·영세 사업장 피해

이 때문에 주 52시간제 시행 과정, 특히 유연근로제 도입 과정에서 노조가 결성된 사례도 적지 않다. 300명 이상 사업장을 기준으로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2018년 7월 이후 노조가 설립된 게임업체 넥슨과 스마일게이트는 각각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과 근로자대표가 주축이 돼 노조가 설립됐다. 차상준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스마일게이트지회장은 “근로자대표는 회사가 제시한 문서에 서명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근로자대표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노조 설립 이유를 밝혔다.

근로자대표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사항뿐만 아니라, 경영상 해고 시행 전 사용자와의 협의 주체에도 해당된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이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등에도 근로자대표의 권한에 관한 내용이 많다. 무노조 사업장에서 권한은 많은데 선출하고 보호할 방법이 없는 이 근로자대표 제도는 수년 동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근로자대표의 ‘입법 미비’ 상황을 개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근로자대표·근로자위원 등이 난립해, 명확한 기능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노조 조직률이 낮고, 특히 공공보다 민간(2018년 기준 9.7%)이, 대기업보다 중소·영세 사업장(2018년 기준 100명 미만 사업장 0.6%)이 노조 조직률이 낮은 상황을 고려하면, 노동자 대표 제도를 개선해 무노조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높여 노동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도 있다. 대기업은 노조 조직률이 높아 교섭력을 바탕으로 임금·노동 조건을 개선해왔지만, 노조가 없는 중소·영세 사업장에선 이런 상황이 불가능해 노동시장 양극화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임기 절반 동안 성과 없어

정부 역시 “90% 영세·중소 미조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바탕으로 “근로자대표 선출 제도 개선을 통해 민주성·대표성 확보”와 “노사협의회의 노사협의·의결사항 강화 등 근로자 이해대변기구 위상 제고”를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임기 절반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고용부는 학계의 의견을 들어 근로자대표 제도와 노사협의회 개선 방안을 세우고, 경사노위에서는 노사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라고 밝혀왔다. 하지만 경영계는 물론 노조 역시 이와 관련한 의지가 뚜렷하지 않아 실제 입법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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