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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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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들’ 목숨과 맞바꾼 공기업 민영화 24년

방만 경영 효율화 외피 쓰고 속으로는 위험 외주화…

기업들만 잔치, 노동자는 죽음의 일터로
등록 2018-12-29 13:23 수정 2020-05-03 04:29
고 김용균 씨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제공

고 김용균 씨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제공

2018년 12월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서 숨진 김용균(24)씨의 소속은 다음 중 어디일까?

①한국전력(한전) ②한전 자회사(공기업) 한국서부발전 정규직 ③태안화력 9~10호기 1차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 태안사업소 정규직 ⑤한국발전기술 태안사업소 계약직 ⑥한국발전기술이 재하청을 준 2차 하청업체 계약직

언뜻 봐서는 정답을 찾기 어렵다. 정답은 ⑤이다. 김용균씨는 한전 자회사인 공기업 서부발전의 1차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의 계약직 노동자다. 전력은 우리 사회에서 공공의 영역에 속하지만,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는 오래전부터 민간업체와 다름없이 사내 하청과 재하청의 구조로 운영돼왔다. ‘위험의 외주화’는 한 개 발전소 안에서도 복잡한 생태계를 만들었다. 오늘도 ‘김용균들’은 이 복잡한 생태계 어딘가에서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발전소 설비를 운영·정비하고, 탄가루를 뒤집어쓰며 낙탄(석탄 부스러기)을 치우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중, 삼중으로 분화된 발전 산업·노동 생태계에서 문재인 정부의 1호 정책인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회를 통해 확보한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의 용역도급업무계약서를 보면 태안화력은 한국발전기술 등 3개 하청업체 등에 업무 일부를 위탁하고 있다. 태안화력 9~10호기를 담당하는 1차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노동자들은 배에서 내린 석탄을 발전기로 옮기고, 낙탄을 청소하고, 석탄이 타고 남은 석탄재를 처리하는 등 힘들고 위험한 업무를 맡는다. 1차 하청업체에서도 정규직과 김용균씨 같은 계약직이 나뉜다. 또 김용균씨가 속했던 연료운영팀에는 석탄 부스러기를 청소하는 2차 하청업체 계약직 노동자 8명이 있다. 위험 업무의 외주화가 또 ‘외주화’된 것이다.

외환위기 때 시동 걸고 MB 때 날개 단 발전 외주화

이런 노동자는 전국에 얼마나 있을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발전5사 정규직 전환 컨설팅 최종보고서(노무법인 서정)를 토대로 분석한 것에 따르면, 한전의 5개 발전 자회사(남동·남부·동서·서부·중부)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규모는 7710명(발전소 연료운전·경상정비 5346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전체 발전 자회사 소속 노동자 1만9715명(직접고용 정규직 포함) 가운데 39.1%에 이른다.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도 간접고용 비율이 35.9%였다. 한전 자회사 공기업들이 발전소 설비를 가지고 민간 업체들이 대부분의 설비 운영과 정비를 담당하는 구조다.

이 생태계는 24년 전부터 정권과 상관없이 정부가 장려하고 확대한 정책의 산물이다. 시작은 1994년이었다. 이전까지는 발전소 전력 생산은 한전이 독점하고, 정비는 한전의 자회사인 한전KPS가 책임지는 구조였다. 하지만 1994년 한전KPS 파업을 계기로 정부가 이를 대체할 민간 기업들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 이 구상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친 뒤 본격화됐다. 정부는 발전소 민영화를 염두에 두고 한전을 5개 발전 자회사로 쪼갰는데, 이 과정에서 민간 발전소 정비 업체들이 생겨났다. 실제 민간 업체들이 발전소 정비·운영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길을 열어준 것은 이명박 정부였다. 2009년 한전KPS의 신규 수주 물량(신규 발전소 운영·정비)을 민간에 넘기겠다는 ‘발전 정비시장 경쟁도입 정책’을 확정했다. 발전 자회사들이 주도해서 민간 업체를 육성한 뒤 2013년부터 일부 발전소 운영·정비 업무에 민간 업체 입찰 참여를 유도하고(1단계), 2018~2022년 5개 발전 자회사들은 한전KPS와 35%만 수의계약을 하고 나머지는 민간 업체에 넘기는(2단계) 방안이 마련됐고 실제로 추진돼왔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으로 이 방안은 현재 중단됐다. 한전KPS가 발전소 운영·정비 시장의 53.9%(2016년 기준)를 점유하고 나머지를 9개 민간 업체가 나눠가졌다. 김용균씨가 일한 한국발전기술도 이 과정에서 탄생한 회사다. 남동발전이 2011년 2월 설립한 자회사인 한국발전기술은 남동발전의 ‘일감 몰아주기’로 몸집을 불렸다. 회사는 2014년 5월 민간 업체인 태광실업에 매각됐다.

사모펀드 먹잇감 돼 중규직 양산
12월21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이 ‘위험의 외주화’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12월21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이 ‘위험의 외주화’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정부가 발전 정비 시장을 민간에 개방한 것은 경쟁을 도입해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목표는 달성됐을까? 경쟁입찰로 용역업체를 선정한 발전 자회사들은 재무제표 개선으로 공공기관 경영평가 등에서 상위 등급을 받았고, 민간 업체들은 업체대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발전소 안전과 노동자 고용은 항구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됐다.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8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산업통상자원부 자료를 보면, 민간 업체가 기술력 부족으로 발전소 설비 고장시 제때 고치지 못하고 한전KPS에 기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최근 5년간(2013~2017년) 128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 의원은 “발전설비 정비산업 민간 개방을 본격화한 2013년 이후 발전소 고장 건수가 연평균 68건으로, 2013년 이전 연평균 53건에 비해 28%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20여 년간 하청업체 생활을 해온 이태성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간사는 “경쟁입찰로 3년마다 용역업체가 바뀐다. 3년 동안 담당했던 업체와 신규 업체가 새로 발전설비를 맡는 게 같을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주최로 11월26일 국회에서 열린 ‘발전정비 경쟁도입 현황과 정비분야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평가 토론회’에서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발제문에서 “기술력 한계가 지적되는 것은 민간 기업의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 부족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대기업과 사모펀드에 의한 인수·합병으로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비판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발전기술은 사모펀드인 칼리스타파워시너지 사모투자 전문회사가 지분 52.4%를 가지고 있다. 태안화력 1~8호기 하청업체인 한전산업개발은 한국자유총연맹(31%·2018년 9월 말 기준)이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발전 정비 시장은 민간 업체와 투자자들에게 안정적인 일감과 일정한 수익률을 제공하는 사업이 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하청업체가 발전소 일감을 따내느냐에 따라 고용이 좌우된다. 당연히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한국발전기술 한 사업소의 20대 후반 정규직 노동자 ㄱ씨는 “계약직에서 (하청업체의)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내가 딱히 정규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며 “원청과 하청이 어떻게 계약하느냐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하청업체가 경쟁입찰에서 따낸 사업을 위주로 일자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태성 간사는 “하청업체가 노동자를 다른 사업소로 배치할 수 있는 상황이면 먼 지역이라도 보내면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일감이 없기 때문에 기존 인력은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해고된 노동자들은 다른 하청업체로 입사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결국 ‘3년짜리 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연스레 작업장의 안전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한국발전기술 지회가 공개한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주요 안전사고/사망사고 현황’을 보면, 2010년부터 8년 동안 모두 12명의 하청노동자가 추락 사고나 매몰 사고, 김용균씨와 같은 협착 사고로 숨졌다. 2018년 4월 공공운수노조는 5개 발전 자회사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발생한 사고 346건 가운데 337건(97%)이 하청 업무에서 일어났다고 밝혔다.

안전사고 97%는 하청업체서 발생

하지만 책임은 언제나 불분명하다. 원청인 서부발전은 김용균씨 사고 뒤에 “관계 기관 조사 결과에 따라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서부발전이 김용균씨가 일한 한국발전기술에 낙탄 처리 등을 지시했다는 정황 등이 공개됐지만 구체적인 책임 소재나, 원·하청 구조에 대한 언급은 사과문에 담기지 않았다. 서부발전과 한국발전기술이 맺은 용역도급 계약서를 보면 사고 예방이나 사고 발생 책임은 하청업체에 지우고, 발전소 운전이 멈출 경우 벌과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조항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얽히고설킨 생태계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정책은 발전소 앞에서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재 5개 발전 자회사는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라 각각 노사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직무별 정규직 전환을 협의하고 있다. 청소·경비·소방 업무는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으로 방향을 잡았고, 김용균씨의 업무였던 연료환경설비운전은 논의를 진행 중이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발전회사 직접고용을 요구하지만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한 정책 용역(발전 정비 시장 개방 실효성 관련)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5개 발전 자회사가 노무법인 서정에 의뢰해 작성된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컨설팅 최종보고서’는 김용균씨 업무에 해당하는 경상정비와 연료환경설비운전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공공부문의 경직성을 증대시키며, 국민조세 부담을 증가시킨다” “정비 업무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등의 논리로 부정적 견해를 펴고 있다. 이미 정비 업무를 하고 있는 민간 업체들도 반발하고 있다.

‘위험 외주화’가 공기업 효율화 전부였나

공기업의 ‘비효율’과 ‘방만한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공부문을 잘게 쪼개고 노동자들의 소속을 어지럽게 뒤섞는 데 지난 20여 년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됐다. 효율과 경쟁이 공공성을 압도하는 과정에서 ‘김용균들’은 희생됐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높기만 하다. 국회는 12월27일 ‘김용균법’이라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지만 원안보다는 다소 후퇴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장 ‘위험 외주화’ 금지 대상에 김용균씨 같은 발전소 하청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발전 정비 업무는 제외됐다.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지만 ‘김용균들’의 처지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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