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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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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기록해야 정의가 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꽝남대학살, 제주4·3, <계엄실무편람>…

<한겨레21>이 발굴하고 재조명한 역사 이슈들
등록 2018-12-22 14:35 수정 2020-05-03 04:29
역사에 새기다
이 기록한 삶

인간은 똑같고 역사는 반복되는가? 이 2018년 표지에서 다룬 인간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서로 ‘다른 삶’의 기록을 남겼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랬고, 고 노회찬 의원과 기성 정치인들이 그랬다.

기념비적 역사 전쟁, 역사 교과서 국정화
12월1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 김진수 기자

12월1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 김진수 기자

제1222호 ‘우리가 몰랐던 부역자 열전’▶바로가기

2019년은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혁명적 전환”(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이 이뤄졌지만, 그 후로도 100년간 권력 재생산 구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층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의 ‘역사 전쟁’은 쉼 없이 지속됐다.

박근혜 정부 때 벌어진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한국 근현대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역사 전쟁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던, ‘유신시대 적폐’ 국정 역사 교과서를 21세기에 되살리려 했던 시대착오적인 정부가 역사 전쟁의 불을 댕겼다. 2015년 전국 485개 단체는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를 결성해 맞섰다. 저지넷 결성을 주도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그 날짜를 “8월20일”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동에서 승리한 뒤부터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5년 8·15 경축사에서 건국절을 언급하는 걸 듣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한다는 뜻’을 간파”했고 닷새 뒤부터 저지넷 활동을 본격화했다는 설명이다. 저지넷은 사생결단으로 저항했고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전쟁에서 패한 뒤 회복하기 힘든 내상을 입은 박근혜 정부는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힘에 밀려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출판기념회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역사라도 기록해야 기억되며,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역사 쿠데타’를 좌절시키고 촛불정부 탄생의 토대를 놓은 시민사회가 그 과정을 방대한 자료로 집대성한 이유다.

1권 751쪽, 2권 894쪽, 3권 667쪽. 12월19일 저녁 서울 용산구 청파로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 출판기념회’에서 공개된 백서는 무려 2312쪽에 이른다. 1권에서는 활동가 소회 등 활동 평가와 일지·좌담회·언론 보도·논평, 2권에서는 교과서 분석·집필 거부·교육부 공문서, 3권에서는 법적 대응 자료와 국제기구 활동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제1222호 표지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부역자 열전’에서 소개한 가 국정화를 추진한 청와대·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교육부 등 ‘지배층의 기록’이었다면, 이번 백서는 지배층에 맞선 ‘시민들의 기록’인 셈이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의 역사 쿠데타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실한 기억’으로 기록됐지만, 우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송두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전 회장(전 헌법재판관)은 출판기념회에서 “2018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민변이 제기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위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각하했다”며 “국정화 고시와 같은 불순하고 위헌적인 시도의 재현 위험성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재의 명시적 위헌 선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한경 부천 중원고 교사(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추진된 것처럼, 다음 (문재인) 대통령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폐기됐다”며 “앞으로 누구도 국정교과서를 꿈꾸지 못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는 활동 소회를 남겼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 한국 정부 상대 소송 채비

제1196호 ‘1968년 꽝남대학살’▶바로가기

은 창간 이후 줄곧 역사와 기록에 천착하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역사와 기록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 한국 사회에 알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은 2018년에도 ‘1968년 꽝남대학살’(제1196호) 보도로 이어졌다.

2017년 겨울, 베트남에서 이 만났던 응우옌흐우마이(80) 할아버지가 올봄 영원한 평온을 찾았다. 마이 할아버지는 31살이던 1969년 9월17일 꽝남성 주이하이 마을에서 한국군이 총과 수류탄으로 주민 수십 명을 학살하는 장면을 지켜본 목격자이자, 희생자 명단을 직접 조사하고 사비로 제단을 쌓은 기록자였다.

지병인 고혈압·당뇨·관절염 등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가해국 기자에게 마이 할아버지는 “너무 끔찍하고 분노가 치밀었다”며 50년 동안 고통스럽게 간직해온 진실을 ‘최후’ 증언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마이 할아버지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끝내 사과는 받지 못했다.

전쟁범죄 피해 증언을 넘어 가해국에 최초로 책임을 묻기로 한 생존자도 있다. 1968년 2월12일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이 쏜 총에 배를 맞은 응우옌티탄(58)이다. 지난 4월 한국 시민사회가 진실 규명을 위해 마련한 ‘시민평화 법정’에 원고로 출석해 한국 정부의 ‘죄’를 입증한 그가 내년 초에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내기로 한 것이다. 그를 돕고 있는 민변의 임재성 변호사는 “민사소송인 국가배상소송의 입증 책임은 원고에게 있는데 퐁니·퐁넛 마을 학살의 경우 피해자 다수의 진술, 참전 군인의 증언, 제3자인 미군의 조사보고서까지 있는 이례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베트남을 향한 시민들의 사과·연대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지난 1월 공개된 꽝남성의 희생자 추모 위령비와 묘지, 학살 현장 등을 안내하는 ‘꽝남 대학살 위령비 구글지도’는 2만6천여 뷰를 기록했다. 과 한베평화재단이 ‘1968 꽝남대학살’ 기획연재를 통해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을 답사한 결과물로 만든 것이다.

주이하이 마을과 퐁니·퐁넛 마을 학살을 포함한 꽝남대학살로 민간인 4천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가 주둔한 5개 성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피해자 9천 명의 절반에 가깝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꽝남성의) 다낭과 호이안을 여행하는 국내 관광객들이 위령비 지도를 손에 들고 학살 현장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며 “구글지도가 평화의 지도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4·3 완전한 해결은 없었다

제1204호 ‘死·삶 4·3을 말한다’▶바로가기

한번 잘못 기록된 역사는 70년의 세월로도 온전히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4·3의 희생자와 유족들은 올해도 정부로부터 배·보상 확답을 받지 못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뼈대로 하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또다시 해를 넘겼기 때문이다. 해방 후인 1948년 4월31일을 전후로 7년7개월 동안 제주에선 극우 반공국가가 저지른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로 1만4232명이 희생당했으나, 정부는 공식 사과는 하면서도 배·보상은 꺼려왔다(제1204호 제주4·3 통권호 ‘死·삶 4·3을 말한다’)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을 맞은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던 터라 희생자와 유족의 실망은 깊었다.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의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특별법 개정안을) 올해 매듭짓지 못해 (완전한 해결을) 70년 동안 기다린 유족들한테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개정안은 기획재정부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특별법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심보균 차관은 9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현재 (희생자가) 1만4천 명이 해당하는데 (이 경우) 보상비용 추계가 1조8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재정 당국과 협의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수형인(형벌을 받은 사람)의 명예를 회복해주기 위한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 유족의 상처를 보듬는 4·3 트라우마 치유센터 등 다른 개정안 내용에 대해서도 정부와 보수 야당은 부정적이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오영훈 의원실(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11월 말 당·정·청 협의에서 행안부에 ‘재정 당국과 협의가 어려우면 자체적으로 배·보상안을 올해 안에 가져와달라’고 요구했는데 아직 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계엄은 지금도 ‘실화다’

제1225호 ‘계엄은 실화다’▶바로가기

4·3이 끝나긴 한 걸까.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 당시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작성한 계엄 대비·실행 문건에는 4·3이 ‘폭동’으로 등장한다. 제주는 정부 수립 뒤 계엄이 선포된 첫 번째 지역이라는 사실도 상기됐다(실제로는 1948년 여수·순천 지역이 최초). 문건에서 ‘제주 폭동’은 2017년 서울 광화문에서의 11번째 계엄을 준비하는 기무사에는 일종의 참고자료였다.

기무사가 종북(진보)에 의한 비상사태(촛불집회)를 빌미로 광화문을 장갑차(탱크)로 진압하고 국회·언론을 무력화하는 내란을 모의한 실체는 여전히 흐릿하다.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출범한 민군합동수사단(합수단)은 석 달여 만에 사실상 수사에서 손을 뗐다. 합수단은 기무사가 박근혜 청와대와 공모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란을 준비했는지 확인하기는커녕 미국에 숨어 있는 ‘키맨’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내란예비음모 혐의·기소중지)의 명확한 소재도 파악하지 못했다.

일상적인 민간인 사찰과 정치 개입을 넘어 내란을 기획한 기무사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안보지원사)로 살아남았다. 안보지원사는 예전보다 다소 몸집이 줄어들고 역할이 제한됐지만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여전히 민간인 정보 수집·수사도 가능하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 통권호(제1225호 ‘계엄은 실화다’) 보도 이후, 군이 시민의 일상에 개입하는 장치 중 하나인 위수령 제도(대통령령으로 치안 유지에 육군 병력을 동원하는 조처)가 68년 만에 폐지된 것은 엄청난 일”이라면서도 “군을 철저히 문민화하는 개혁이 힘을 받으려면 조현천 전 사령관 수사나 기무사 개혁이 성공해야 했는데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군이 결심만 하면 계엄을 집행할 수 있는 합법적 통로도 계속 열려 있다. 8월 은 2016년 함동참모본부 계엄과가 작성한 ()을 최초로 분석해, 계엄임무수행군의 무기 사용 근거로 1980년 신군부가 광주에서 발포를 명령한 문서(자위권 발동 문서·계엄훈령 제11호)를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계엄이 필요하다’는 판단 기준을 설정하고, 현재 상황이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하는 주체 모두 군이라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군은 해를 넘기도록 을 수정할 의사가 없으며, 국회도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합참 관계자는 “은 개정 소요가 있을 때 재발간을 검토하는 비정기적인 책자(2016년 4월과 2018년 2월에 재발간)로 현재로선 재발간 계획이 없다”며 “어떤 경우가 개정 소요에 해당하는지 밝히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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