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업무경비는 매달 평균 400여만원입니다. 문제는 이 돈이 입금된 직후 바로 생명보험 보험료, 신용카드 사용액, 경조사비, 딸에게 보내는 해외 송금 등으로 빠져나갔다는 겁니다. 자, 이래도 특정업무경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게 아닙니까?”
2013년 1월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야당 의원이 이 후보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최고 법원 관련 인사청문회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이 질문에 이 후보자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헌재소장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이 청문회는 헌재 역사상 최악의 청문회로 기록될 만했다. 그동안 개인 비리가 문제 됐던 것은 대부분 변호사 시절의 고액 수임료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처럼 재판 업무에 쓰라고 준 돈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이 후보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사법부 보수화를 이끌 인물로 낙점됐다. 그가 전혀 예상 밖의 의혹으로 낙마하자 박근혜 정부의 사법 정책에 차질이 빚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후보자의 대타로 검찰 출신의 박한철 헌법재판관을 지명했다. 검찰 출신이 헌재소장으로 지명된 것은 처음이었다. 박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해 5대 헌재소장에 임명됐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헌재 5기 재판부는 공안검사 출신의 헌재소장 체제에 걸맞게 보수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박 헌재소장과 마찬가지로 공안검사 출신인 안창호 재판관(새누리당 지명)은 헌재의 보수화를 이끌 인물로 주목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서기석·조용호 재판관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명한 김창종·이진성·이정미 재판관도 보수로 분류됐다. 국회 여야 합의로 지명된 강일원 재판관은 중도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보수에 가까웠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지명한 김이수 재판관만이 유일하게 진보로 분류됐다.
검사 출신 소장이 이끈 5기 헌재보수적 가치관에 뿌리를 둔 재판관들은 운신의 폭이 명확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정권의 안정과 사회 질서를 더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전까지는 정권의 이해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주요 사건에서는 국정 운영에 철저하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법외노조화를 뒷받침한 결정이 대표적이다. 통진당과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헌재는 재판을 연기하는 수법으로 정권을 돕기도 했다. 2011년 3월 ‘패킷 감청’을 허가한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제기한 헌법소원은 2016년 2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판을 미뤘다. 패킷 감청은 최근에야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또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대한 헌법소원이 2015년 말에 제기됐지만, 헌재는 정권이 교체된 뒤 국정교과서 고시가 효력을 잃자 지난 3월 슬그머니 각하 결정을 내렸다.
5기 재판부가 ‘흑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2월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간통죄에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사법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처음 인정한 전향적인 판단이었다. 간통죄는 사회 변화에 따라 국가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까지 개입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헌재는 1990년, 1993년, 2001년, 2008년까지 네 차례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가 2017년 12월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출퇴근 사고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도 호평을 받았다. 헌재는 “산재보험제도는 산업재해로부터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는 기능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밖에 2015년 12월 주민등록번호 변경 규정이 없는 주민등록법 조항 헌법불합치 결정, 2016년 9월 보호의무자 2명의 동의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명의 진단이 있으면 정신병원 보호입원이 가능하게 한 정신보건법 조항 헌법불합치 결정, 2016년 12월 구치소 과밀수용 위헌 결정 등도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한 결정들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수 성향 재판관들은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한철 소장과 안창호 재판관은 사회적 기본권에 관심이 많았다. 전통적 기본권은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생활 비밀과 자유 등 개인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뜻한다. 반면 사회적 기본권은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격차와 사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에 국민의 사회보장과 복지 등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박 소장은 안 재판관 등과 2015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사회적 기본권의 적극적 보장 방안’을 주제로 세미나를 여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헌재의 역할을 강조했다.
보수 재판관들의 숨은 ‘개인기’조용호 재판관은 국가의 개입과 간섭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2016년 3월 헌재가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성매매 피해자를 처벌하도록 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조항 합헌 결정을 내릴 때, 유일하게 ‘전부 위헌 의견’을 냈다. 그는 “내밀한 성생활의 영역에 국가가 개입하여 형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입법자가 특정한 도덕관을 확인하고 강제하는 것”이라며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헌재가 2014년 4월 ‘셧다운제’(16살 미만 청소년의 오전 0~6시 인터넷게임 금지)를 규정한 청소년보호법 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을 때도 조 재판관은 김창종 재판관과 함께 “셧다운제는 전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행정 편의적인 발상에 기초한 것으로, 문화에 대한 자율성과 다양성 보장에 반하여 국가가 지나친 간섭과 개입을 하는 것”이라며 위헌 의견을 냈다. 2013년 11월에는 사학 비리 대책으로 만든 개방형 이사제를 규정한 사립학교법 규정에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릴 때, 그는 “사학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다”며 단독으로 위헌 의견을 냈다.
조 재판관은 결정문에서 ‘문학청년’의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매매 사건에서 그는 “우리의 딸이자 누이이며 자매인 ‘영자’(), ‘판틴’(), ‘소냐’()가 심판 대상 조항에 의하여 성매매죄로 처벌받는다고 가정해보라. 수긍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또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라는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의 글을 인용해 구치소 내 과밀 수용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헌재는 지난해 이선애·유남석 재판관의 합류로 좀더 전향적인 결정을 쏟아냈다. 올해 들어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주요 사건은 양심적 병역거부(6 대 3), 과거사 손해배상 소멸시효(6 대 3), 민주화운동 보상금 재판상 화해(7 대 2), 기지국 수사(6 대 3), 수사기관의 실시간 위치추적(6 대 3), 패킷 감청(7 대 2), 최루액 혼합살수행위 위헌 확인(7 대 2) 등이다. 대부분 7 대 2나 6 대 3으로 위헌 결정이 났는데, 기존에 소수의견으로 뭉쳤던 이진성 헌재소장과 김이수·강일원 재판관에 이선애·유남석 재판관이 가세했고, 안창호·서기석 재판관이 ‘캐스팅보트’ 몫을 한 덕분이다.
소수와 다수의 역전9월19일 김이수·이진성·안창호·김창종·강일원 재판관이 동시에 퇴임하면서 5기 재판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5기 재판부는 헌재법에 규정된 ‘8종 사건’을 모두 처리한 유일한 재판부다.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과 정당해산 사건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들을 다뤘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정치적·이념적 대립이 극심했던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은 결정을 내려 헌재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재 고위 관계자는 “종전에는 대법관으로 추천되지 못한 법관이 오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금은 판사들 사이에서 대법원보다 더 선호하는 곳으로 인식된다”고 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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