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에서 학살된 수가 1만1131명. 여순사건, “남녀아동이라도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계엄포고령에 담긴 이승만의 말 한마디에 무고한 양민이 학살됐다.
국군기무사령부의 상징은 호랑이다. 호랑이는 현재 기무사 부대기에도 들어 있다. 1977년 10월 육해공군 방첩부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통합하면서 밤색 바탕에 국방부 마크와 호랑이상 모습이 결합된 부대기를 만들었다. 기무사는 이 부대기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왜 호랑이가 기무사 부대 상징이 됐을까? 호랑이가 ‘절대충성’의 정신을 상징해서라고 기무사는 설명한다. 기무사 누리집은 절대충성이 부대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부대가 걸어온 60년의 발자취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체제 수호의 첨병이자 국가안보의 최후 보루라는 사명의식으로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위해 ‘위국충성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부대원들의 가슴속에서 맥을 이어오고 있는 ‘절대충성’의 부대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참가자 종북으로 규정기무사는 누구에게 절대충성할까? 기무사 누리집은 ‘군 통수권자에 대한 절대충성’이라고 밝힌다. 국민에겐 용어조차 낯선 ‘통수 보좌’란 기무사의 임무도 이 절대충성에서 출발한다. 통수 보좌는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원활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눈과 귀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통수 보좌는 대통령의 눈높이,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 기무사의 통수 보좌는 댓글을 달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계엄 문건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위 쿠데타’란 비판을 받는 계엄 문건을 기무사가 만든 것은 대통령에 대한 절대충성이 기무사의 유전자(DNA)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기무사가 만든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의 ‘현상 진단’ 현 상황 평가를 보면, 당시 국내 정세를 “정치권이 가세한 촛불-태극기 집회 등 진보(종북)-보수 세력 간 대립 지속”이라고 규정했다. 기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국정 농단에 항의하는 촛불집회 참가자를 종북으로 규정했다.
이는 기무사의 현실 인식이 1950년대 특무부대(기무사 전신) 시절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1955년 10월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작사한 ‘특무부대가’(현재 ‘기무부대가’와는 다른 노래) 1절이다.
“있어서 될 말이냐 붉은 매국노
실뱀이 온 바다를 흐려놓는다
그물이 한 코라도 상하고 보면
그물이 그물 구실 하지 못하네
살피자 방방곡곡 번개 같은 호랑이”
1955년 특무부대에 ‘붉은 매국노’와 2017년 기무사에 종북세력은 모두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기무사는 통수 보좌와 절대충성에 매몰돼, 정권안보를 국가안보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무사는 수십 년간 정치 개입, 민간인 사찰 같은 불법 행동을 `통수 보좌를 명분으로 되풀이해왔다. 기무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현대사의 굽이마다 폭압과 공포정치의 도구나 상징이었다. 특히 10차례 비상계엄 때 기무사는 주역이나 조역 구실을 했다. 비상계엄은 제주4·3, 여순(여수·순천)사건, 한국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6·3 사태, 10월 유신, 부마항쟁, 10·26 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선포됐다.
기무사의 뿌리깊은 정치 개입 역사정부 수립 뒤 처음 제주에 비상계엄(1948년 10월17일~12월31일)이 선포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지난 7월24일 기무사의 계엄 문건과 관련해 성명을 내어 “문건에 첨부된 문서에 따르면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사건을 ‘제주폭동’으로 규정짓고 있다. 근거 없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저들의 치졸한 작태에 우리 유족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금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7년여에 걸친 제주4·3으로 인한 대부분의 희생자는 당시 군경의 강경 진압과 불법 군사재판 등에 의한 것임이 자명하다. 기무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방첩대와 특무대의 만행은 대한민국 인권의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1948년 10월 제주4·3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할 예정이던 전남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출동을 거부하고 진압군과 맞섰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2043명이 희생됐다. 여순사건으로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여순사건 뒤 정부는 군 내부 좌익을 찾아내 없애기 시작했다. 이른바 숙군(肅軍) 작업은 당시 김창룡 대위가 주도했다. 1949년 3월까지 불과 4개월 동안 당시 군 병력의 3%인 1500명이 숙청됐다. 짧은 시간에 숙군 실적을 올려야 했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김창룡과 그 부하가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바람에 억울하게 처형된 군인들이 속출했다.
김창룡의 특무대가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 정치 파동’ 때였다. 부산 정치 파동은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최초의 사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방위군 사건 등 거듭된 실정으로 국회의 신뢰를 잃었다. 제헌헌법의 의회 간접선거로는 연임이 불가능해진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꺼냈다. 1952년 5월25일 이 대통령은 부산과 경남,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야당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납치하는 등 공포정치가 벌어졌다. 결국 직선제로 개헌해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8월5일 재선에 성공했다.
부산 정치 파동 때 비상계엄 선포의 빌미가 된 것은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하루 전인 1952년 5월24일 부산 금정산에 북한군으로 보이는 무장병력이 나타나 총을 쏘았다. 임시수도인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날 정도로 안보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는 다음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구속됐던 국회의원 서민호는 나중에 금정산 공비 사건이 조작됐다고 증언했다.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을 빼내 공비로 위장시켜 부산의 금정산에 나타나도록 쇼를 벌이고 이들을 사살했다.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 지역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특무대의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정치 파동이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주장이다. 통수 보좌가 빌미인 기무사(특무대) 정치 개입의 역사적 뿌리는 이렇게 깊다. 김창룡은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공작, 조작, 전횡, 비리를 일삼다 1956년 부하 군인의 총에 맞아 숨졌다.
계엄 동원 병력 12·12 군사반란 때와 비슷쿠데타 방지가 주요 임무인 방첩대는 정작 1961년 5·16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다른 군인들이 자기처럼 쿠데타를 일으킬까봐 방첩대에 힘을 잔뜩 실어줬다. 1960년대 방첩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를 떨쳤다. 이는 부메랑이 돼 박 대통령의 목숨을 위협했다.
1968년 1월21일 저녁 8시께, 사흘 전인 18일 새벽 휴전선을 넘어와 북한산 비봉 아래에 숨어 있던 북한 특수부대가 공격 목표인 청와대로 향했다. 이들은 마치 행군하는 국군처럼 2열종대로 대담하게 세검정 쪽으로 다가왔다. 검문소에서 경찰이 신원 확인을 요구하자 이들은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 참견 말라”고 했다. 실제 당시 자하문을 넘어 효자동에 육군 방첩대가 있었다. 방첩대를 사칭한 북한 특수부대는 경찰 검문을 무시하고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까지 접근했다.
1·21 사태가 마무리되고 1968년 9월 육군방첩부대가 육군보안사령부로, 해공군도 해·공군 보안부대로 개칭됐다. 공식 설명은 보안·방첩 임무와 범죄수사 강화를 위해 ‘보안부대’로 바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21 사태 때 북한 특수부대가 방첩대를 사칭해 경찰 검문을 따돌리고 청와대 문턱까지 접근해 ‘방첩대’란 이름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지면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절대권력 공백기에 실권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이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고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12·12 당시에도 보안사의 핵심 임무가 ‘대전복 임무’(쿠데타를 막는 것)였다. 군 관계자는 “대전복 임무 수행 개념은 전복 위협을 찾아서 제거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복 징후를 포착해 사전에 이를 제거하거나, 전복 위협 요소가 발생할 여건을 찾아서 관리함으로써 위협 요소 형성 자체를 방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쿠데타가 일어나면 서울 가까이 있는 수도방위사령부나 특수전사령부 등이 나서 반란을 진압한다. 이런 쿠데타 예방·진압 시스템은 1979년 12·12 때도 있었지만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군사반란은 막지 못했다. 쿠데타를 막아야 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수괴’였고, 대전복 부대 임무를 맡은 특전사와 수방사의 지휘관들이 거꾸로 군사반란의 행동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당시 전두환씨 등 신군부가 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임무를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란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무사가 만든 계엄 문건을 보면, 계엄 임무로 동원되는 군 병력이 12·12 군사반란 때와 비슷하다. 계엄 문건은 30사단, 20사단, 1공수여단과 9공수여단을 서울 지역 계엄 임무 수행 부대로 편성했다. 이 부대들은 12·12 군사반란 때도 대부분 등장한다. 12·12 당시 1·3·5공수여단과 9사단,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신군부 반란군의 주축이었다.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은 12·12 당시 경복궁 안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서 열린 신군부 장성 모임에 참석했다. 9공수여단은 신군부 반란군을 진압하러 출동했다 부대로 되돌아갔다.
1980년대 보안사는 불법 민간인 사찰과 간첩사건 조작, 정치공작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1990년 10월에는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1300여 명의 사찰 정보 자료를 공개했다. 노태우 정부는 1991년 1월 군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금지를 약속하며 보안사의 이름을 국군기무사령부로 바꿨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무사는 정치 개입, 민간인 사찰을 되풀이했다. 기무사의 ‘흑역사’를 살펴보면, 기무사를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만 바꿔서는 소용없다는 게 분명하다.
절대충성 대상 대통령에서 국민으로지난 8월4일 경기도 과천 기무사 청사에서 열린 국군기무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우리 군은 ‘국민’을 위한 조직”이라며 “국군기무사령부 부대원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은 오직 국민”이라고 말했다. 절대충성할 대상을 대통령에서 국민으로 바꾸라는 지시다. 기무사의 유전자를 바꾸라는 것이다.
앞으로 기무 개혁을 위해 지은 죄가 많은 기무사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권력도 기무사에 통수 보좌 기대를 버려야 한다. 10차례 비상계엄 등 격변기 상황을 살펴보면, 통수 보좌는 기무사의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을 부르는 무당 방울이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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