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사 매각에 이어 삼성에 더 큰 구조조정이 계획돼 있다. 다른 관계사도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다.”
김호철 삼성토탈 노조위원장은 지난 1월21일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열린 ‘매각 철회를 위한 4사 공동연대 상경집회’에서 소리쳤다. 김 위원장 앞에 모인 삼성테크윈·삼성토탈·삼성종합화학·삼성탈레스의 노동자 400여 명은 영하의 날씨 속에 삼성그룹 본관 앞에서 <파업가>를 불렀다. 김 위원장은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 노동자들 역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체제로의 승계 과정에서 사업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1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노조 깃발 아래 뭉칠 줄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이날 윤종균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테크윈 지회장 등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에 매각 철회 문건을 직접 전달하려 했지만 경비원들에게 막혔다. 한창길 금속노조 삼성테크윈지회 수석부지회장은 “그룹에서 우리를 안 만난다고 하는데 29일에 더 많은 이들을 데리고 상경하는 등 매각 반대를 위한 행동을 강하게 하겠다”고 했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빠르게 사업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사업 조정 과정에서 불러온 매각 회사 노동자들의 반발처럼 이재용 부회장 체제가 풀어가야 할 숙제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삼성중공업-삼성엔지니어링 합병 실패와 삼성SDS와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의 상장 뒤 얻은 총수 일가의 막대한 투자 차익에 대한 비판 여론도 삼성이 직면한 숙제다.
먼저 1조9천억원에 한화그룹에 넘기기로 한 중화학·방위사업 부문의 매각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테크윈 등 4개 기업을 인수한 한화는 노조 등의 반발에 부딪혀 실사 작업을 미루고 있다. 갑작스러운 매각 통보에 노조가 없던 삼성테크윈에선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한창길 수석부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으로 경영 승계를 하기 위해 돈이 되고 관리가 편한 기업만을 고르고, 수십 년 동안 초일류 기업을 만들겠다고 노력한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임금 등 처우 후퇴와 고용 불안을 얘기한다. 매각 과정에서 공개된 삼성물산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삼성종합화학 매각 계약 조건은 ‘종업원 5년 고용 보장 및 처우 수준 유지’로 돼 있다. 최대 5년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은 삼성으로선 부담스러운 시나리오다. 이들을 지켜보는 다른 계열사 직원들 역시 고용 불안을 느껴 노조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2009년 복수노조 시대가 열린 뒤에도 이른바 ‘무노조 경영’을 유지해왔다. 사업 조정이 ‘무노조 경영’을 깨뜨릴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화학·방산 부문 매각은 지분을 가진 회사들이 이사회를 통해 결정한 사항이다. 매각을 철회할 수는 없고, 직원들이 요구하는 고용이나 처우는 각 회사의 경영진과 협의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전격 매각, ‘무노조’ 깨뜨릴 부메랑 될 수도이건희 회장 시절 수십 개 계열사로 커진 그룹 구조를 단순화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차원에서 추진된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두 회사는 지난해 9월1일 합병을 결의했지만,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계약상 예정된 한도를 초과하며 신청해 합병이 무산됐다. 주식매수청구권은 합병·분할 등 주주총회 특별 결의 사항에 반대하는 주주가 자신의 주식을 정해진 가격으로 사달라고 회사에 청구하는 권리를 말한다.
합병을 추진할 당시 삼성중공업(2만5050원)과 삼성엔지니어링(5만9100원)의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인 2만7003원, 6만5439원보다 낮은 게 문제였다. 가치 하락에 불안해하는 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을 사들이는 데 수천억원의 자금이 필요해지자 회사는 합병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이건희 회장이 입원한 뒤 진행된 삼성의 사업 조정 가운데 첫 실패 사례였다.
다시 합병을 추진하기에도 상황은 좋지 않다. 두 회사의 주가가 높아야 합병 추진 때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는데 1월23일 현재 두 회사의 주가는 삼성중공업 1만8250원, 삼성엔지니어링 2만9600원까지 떨어져 있다. 실적 악화가 주가의 발목을 잡았다.
삼성중공업은 세계적인 조선업 불황 속에서 낮은 가격으로 배를 수주한 이른바 ‘저가 수주’ 탓에 실적이 악화됐다. 배 가격이 떨어져 수익성이 악화됐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짓는 해양플랜트에서 애를 먹었다. 증권가에선 2015년 성적도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최광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문제 사업의 매출이 2015년에 크게 늘어나 전체 수익성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공장 등 육상플랜트를 짓는 삼성엔지니어링 역시 국외 ‘저가 수주’로 손실이 많다. 대규모 공기 지연 등으로 2013년엔 영업이익 적자가 1조원에 이르렀다. 일반 건설사였으면 부도가 날 정도로 큰 적자 규모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흑자로 다시 돌아섰지만 증권가에선 올해 전망을 어둡게 본다. 김형근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부채비율이 높아 중동 지역의 신규 프로젝트 입찰 참여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두 회사의 사정이 이처럼 어렵다보니 그룹에서 다시 합병을 추진하기엔 버거운 상태다.
제일모직과 삼성SDS는 반대로 너무 주가가 높아 고민이다. 이 회사들은 지난해 상장한 뒤 주가가 뛰어올라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사장, 이서현 사장에게 수조원의 평가차익을 안겼다. 이 돈은 그룹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언제든 사회적 비판 여론을 만들 수 있는 ‘화약고’다. 이재용 부회장 등 3남매는 1996년 탈법 논란 속에 이 부회장이 48억3100만원, 이부진·이서현 사장이 각각 16억1천만원을 내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 전환사채를 사들였다. 이 전환사채는 125만4천여 주의 주식으로 전환돼 5천만여 주로 증가했다. 제일모직은 지난해 주당 5만3천원에 상장했다. 1월23일 기준 가격은 13만1천원에 이른다. 약 81억원을 투자해 단순 계산으로 800배를 웃도는 평가차익을 만든 것이다. 더구나 옛 삼성에버랜드는 계열사 건물 관리와 급식 사업 등을 맡아 그룹 내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큰 회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그룹의 편법과 불법으로 얻게 된 지분을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가치를 상승시켜 이를 통해 경영권과 불로소득을 취하게 된 과정은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해온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쉽지 않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도의적 차원에서 상장 차익으로 얻은 이득에 대해 사회공헌에 나서는 등 자기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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