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실핏줄은 이어져 있습니다.
밀양을 찌른 가시가 홍천에 박힙니다. 홍천을 때린 통증이 케이블노동자를 헤집습니다. 수평을 뚫고 솟은 ‘수직의 세계’에서 송전탑과 굴뚝이 우뚝합니다. 하나의 수직이 경계를 조여 전국을 바느질하듯 뀁니다. 밀양(경남)과 청도(경북) 주민들이 ‘72시간 전국 순례’를 떠났습니다. 수직의 세계와 맞서는 ‘저항과 연대의 약속’ 송년회입니다. 그들의 길을 따라 아픔이 아픔에게 갑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청춘을 묻은 공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font></font>【12월15일 오전 10시】 45m 위를 올려다보는 마음과 45m 밑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허공에서 만났습니다.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밀양·청도 주민들이 스타케미칼(경북 칠곡군 석적읍) 굴뚝을 쳐다보며 외쳤습니다. “눈물이 나서 몬 보겠다. 나라가 와 이 꼬라지고.” 하늘이 눈에 시려 서종범씨는 시선을 거뒀습니다. 굴뚝에서 소리가 내려왔습니다. “먼 곳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에 할매·할배들 기운 내이소.”
밀양 주민 19명과 청도 주민 4명이 아침 8시에 버스를 탔습니다. 아프고 연대가 절실한 땅을 찾아 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삶을 잡아먹는 송전탑’을 막느라 울며 2014년을 보냈습니다. “시골 양반들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거 아입니꺼.” 한 주민이 순례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송전탑 싸움하믄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예. 그러니까 돌려줘야지예. 할매·할배들은 그렇습니더.”
5월27일 새벽 굴뚝을 타고 한 사람이 하늘에 매달렸습니다.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는 굴뚝에서 세 번째 계절(이날 기준 203일)을 맞았습니다. 더할 수 없는 극한 투쟁이 일상이 될 때 하늘 절벽은 급속도로 가팔라집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하나를 켜면 하나가 꺼지는 촛불을 케이크에 꽂았습니다. 주민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날은 차 대표의 44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밀양·청도 주민들은 준비해온 플래카드를 펼쳤습니다. “김재권 사장은 정신 좀 차려라. 할매들이 지켜보고 있다.”
공장 정문 밖에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차가운 바닥에 앉아 노동자들이 대접한 더운 찌개를 먹었습니다. 정문 안쪽에선 경찰들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켰습니다. 피아 없이 밥만 때를 지켜 식도를 탔습니다. 회사는 기계를 멈춰도 노동자들은 ‘청춘을 묻은 공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오후 5시】 6·11 행정대집행 이후 밀양 철탑은 쑥쑥 자랐습니다. 11월 말 송전선까지 연결됐습니다. 바람이 불면 ‘쓩쓩’ ‘챙챙’ 소리를 냅니다. 12월 말엔 시험 송전도 예정돼 있습니다. 주민 70여 명에겐 2억3천여만원의 벌금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체념 안 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버스가 5시간을 달려 강원도로 진입했습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춘천 군자리, 홍천 동막리·구만리를 지날 때마다 도로 옆으로 골프장이 펼쳐졌습니다.
“어느 날 골프장이 들어온대요. 공익사업이기 때문에 강제수용 된대요. 버젓이 살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철거를 당했어요. 살림살이는 농기계 창고에 곰팡이가 슨 채 방치돼 있어요.”
신선영씨는 춘천 군자리 주민입니다. 그는 골프장에 토지를 강제수용 당한 뒤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한때 시력도 잃었습니다. ‘공익의 횡포’에 주민들의 삶은 움푹 패었습니다. “차라리 우리 사정이 더 낫다.” 밀양의 김옥희씨가 한숨 쉬었습니다. 홍천 동막리에선 선산과 묘지가 파헤쳐져 유실됐습니다.
구만리 주민들이 마중 나와 차를 끓였습니다. 밀양·청도 주민들처럼 ‘할매·할배들’이었습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허가 취소를 약속했던 구만리 골프장은 벌목을 마쳤습니다. 골프장 건설을 막던 주민 27명이 전과자가 됐습니다.
【밤 11시】 숙소로 가는 버스는 5분 거리를 1시간 동안 기었습니다. 몇백m는 서로 붙들고 눈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튿날 새벽까지 홍천군엔 23cm의 눈이 쌓였습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노동자 없으면 우리가 우떻게 사노” </font></font>
【12월16일 아침 8시】 밀양·청도 주민들이 버스 두 대에 나눠 탔습니다. 경로를 쪼갰습니다. ‘충북 투쟁사업장→영동 유성기업’행 버스와 ‘과천 코오롱 단식농성장→평택 쌍용자동차 고공농성장’행 버스가 따로 출발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탓입니다. 고행일 만큼 빡빡한 일정에도 누구 하나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청도에서도 송전탑 40기는 다 자랐습니다. 지난 7월21일 삼평리(각북면)에서 시작된 공사는 40일 만에 끝났습니다. 저항하던 주민 30여 명이 연행됐고 형사소송만 70여 건입니다. 주민들은 “쫓겨나고 쫓겨나다보니 어느새 철탑이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전 10시45분】 맞은편 정부과천청사에서 불어온 칼바람이 코오롱 건물을 타고 치솟았습니다. 해고 10년을 외면해온 매정함만큼 바람은 날을 세웠습니다. 가장 추운 땅에서 농성 천막은 차이고 쓸렸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의 빈 천막을 밀양·청도 주민들이 꽉 채웠습니다. “우리 움막하고 똑같다”며 그들은 탄식했습니다.
만나고 싶었던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장은 이틀 전(12월14일)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단식 40일째였습니다. 코오롱투쟁공동대책위원회 정상천(노동당 과천·의왕 당협위원장)씨가 대신 주민들을 맞아 최 위원장의 상태를 전했습니다. 고공농성, 단식, 노숙, 회장 자택 점거, 자해….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은 안 해본 것이 없었습니다. 청도 삼평리 부녀회장 이은주씨는 “최 위원장은 나와 동갑”이라며 “제발 몸 건강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밀양 한옥순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사람을 바짝바짝 말려 죽인다. 노동자들은 다 내 자식들이다. 노동자 없으면 우리가 우떻게 사노.” 정오에 최 위원장은 의료진과 동료들의 만류로 42일 만에 단식을 멈췄습니다.
【오후 2시】 “우짜꼬” “우야노”….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의 김정욱·이창근 두 노동자를 보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발을 구릅니다. 휴대전화를 확성기에 연결해 주민들과 하늘 노동자들이 인사를 나눴습니다. 김정욱 사무국장이 물었습니다. “밀양·청도가 더 춥습니까, 여기가 더 춥습니까.” 주민들이 소리쳤습니다. “여기가 훨씬 추버예. 우리 춥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예.”
두 사람이 굴뚝에 오른 지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공장 안팎에 몰아쳤습니다. 70m 굴뚝 꼭대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밥솥이 지글지글 끓으며 뱉어내는 밥 냄새 그윽한 수증기 같았습니다. “수증기가 아니라 LNG 가스입니다.” 김정운 쌍용차지부 수석부위원장이 말했습니다. 전날 쌍용차 사 쪽은 “절대 타협하지 않고 단호히 대처하기 위해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두 사람이 하늘에 오른 날 해고노동자 중 26번째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죽어도 이 나라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사라 할머니가 입술을 떨며 소리쳤습니다. “가스 마시지 마세요.” 울음은 맺힌 데 또 맺힙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37일째 추위와 전자파를 견디며 </font></font>
【오후 4시10분】 마중 나온 세월호 유가족들을 밀양·청도 주민들이 끌어안고 같이 울었습니다. 평택에서 온 버스와 충북으로 내려간 버스가 안산 세월호 분향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분향부터 했습니다. 분향소 꽃은 시드는데 슬픔은 시들지도 않습니다.
유가족은 떡과 과일을 준비해 할머니·할아버지들을 기다렸습니다. 탁자 위엔 몇 시간 전에 발표한 성명서(세월호의 온전한 선체 인양을 요구하고 새누리당의 ‘문제적 조사위원’ 선정 비판)가 놓여 있었습니다. 청도의 이억조 할머니가 유가족들을 위로하다 통곡했습니다.
“자슥을 가슴에 묻고 우예 살겄노. 이런 세상 없었으면 좋겠십니더. 박근혜 정부 싫습니더. 싫어예.”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도 벽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습니다. 유가족들이 할머니를 달래다 또 울었습니다. 물 샐 틈 없는 세상에서 걷기도 힘든 어르신들이 가는 곳마다 웁니다. 단원고 2학년4반 고 김동혁군의 어머니는 다짐했습니다. “국가의 잘못으로 우리는 눈물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엄마·아빠입니다. 결코 잊히지 않게 하겠습니다. 아이들 영정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유가족들과 밀양·청도 주민들은 구호로 서로를 북돋웠습니다. “우리는 지지 않는다.”
【밤 9시25분】 광고 화면이 너무 휘황해 탑 위는 오히려 깜깜했습니다. 깜깜해서 형체가 보이지 않는 광고탑 위에서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좌우로 움직였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므로 빛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비추는 빛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해가는 존재가 절박한 시대입니다.
“올려주신 감말랭이가 너무 맛있어 성덕이와 싸웠습니다.”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 임정균(케이블비정규직지부 정책부장)씨가 광고탑 아래 어르신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강성덕(정책팀장)씨는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광고탑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2층이라면 3층인 스타케미칼 차광호 동지와 4층인 쌍용차 두 동지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꼭 이겨서 건강하게 내려가겠습니다.” 임정균·강성덕 두 노동자는 37일째 추위와 전자파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씨앤앰의 대주주는 MBK파트너스와 맥쿼리코리아오퍼튜니티운용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모펀드 맥쿼리는 서울~춘천 간 민자고속도로의 지분 15%를 갖고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조카인 지형(이상득 전 의원의 아들)씨가 맥쿼리IMM자산운용 대표를 지냈습니다. 2008년에만 강원도에서 40여 개의 골프장 사업이 추진됐습니다. 고속도로 개통(2009년 7월)으로 강원도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골프장 참사’의 길이 열렸다고 피해 주민들은 말합니다. 그들과 씨앤앰 노동자들의 잔혹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코오롱은 골프장을 포함한 종합관광휴양단지 ‘무릉도원’을 춘천과 홍천 일대 499만㎡ 땅에 조성하고 있습니다. 코오롱 해고노동자들과 ‘강원도의 눈물’이 맞닿는 지점입니다. 홍천군 동막리에 골프장을 짓는 회사는 세안레져입니다. 모기업인 세안이엔씨는 밀양에서 송전탑 공사를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밀양과 홍천의 고통이 한 혈관으로 흐릅니다. 아픔을 실로 엮어 부를 구하는 시대는 잔혹합니다. 밀양 주민 구미현씨는 “우리가 길 위에서 너무 많은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수직의 전선(電線)은 주민들의 전선(戰線)</font></font>
【12월17일 오후 1시20분】 한국전력의 잔칫날입니다. 서울 강남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팔고 전남 나주로 이전한 한전이 국무총리를 초청해 성대한 개청식을 치렀습니다. 밀양·청도 주민들도 집들이를 갔습니다. 마늘과 쑥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한전의 사과와 사장 면담을 요구했으나 두꺼운 경찰 벽에 막혔습니다. 활동가 2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영내로 발을 들인 주민들은 고착됐으며, 정문 밖 주민들은 연좌했습니다. 김말해 할머니는 경찰의 플라스틱 폴리스라인을 깔고 앉아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드렸습니다. “눈물을 딛고 올린 건물”은 31층 높이로 수직의 위용을 떨쳤습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눈보라가 쳤습니다. 폭설은 순례길을 따라다녔습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의 하얀 머리에 하얀 눈이 쌓여 하얗게 얼어갔습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우뚝한 한전은 높고 밝았습니다. 수직의 전선(電線)은 주민들의 전선(戰線)이었습니다.
아픈 곳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길을 따라 진실이 진실에게 갑니다.
칠곡·홍천·과천·평택·안산=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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