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동의한 성관계와 성폭행 사이 그 어딘가에 동의하지 않거나 강제적 성관계가 놓여 있다. 그중 어떤 것은 성폭행으로 처벌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형법 제297조(강간)를 보면, “폭행·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핵심은 폭행·협박인데, 대법원은 피해자의 격렬한 저항과 반항이 있어야만 인정한다.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데도 가해자가 이를 제압하고 성관계를 강제적으로 맺어야만 ‘폭행·협박으로 강간한 자’로 처벌한다는 입장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해석론
그 결과 ‘사각지대’가 생겨났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도 소극적으로 반항하거나 수치심이나 두려움 탓에 아예 반항하지 못한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상황은 동의한 성관계라 할 수 없으면서도 강간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최고 법관 출신의 한 여성 법률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강간죄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다. 하지만 우리나라 (남성) 판사들은 강간죄를 정조권(성적 순결을 침해하는 행위) 침해인 것처럼 해석한다. 피해자가 죽을힘을 다해 정조권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로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해석론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하급심 판결이 나와 주목된다.
2013년 추석 연휴 때 대학원생인 26살 피해자 ㄱ씨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9월21일 아침 6시30분께 러시아인 ㄴ(37)씨와 터키인 ㄷ(27)씨, 이란인 ㄹ(30)씨를 만났다. ㄱ씨와 ㄴ씨는 몇 년 전 러시아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날 우연히 다시 만났다. 피해자와 ㄴ씨 일행은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주변을 산책했다. 한 주택 앞에서 ㄴ씨가 말했다. “우리 집이니 잠깐 들어와 집 구경이나 해라.” 훤한 아침인데다 세 남자가 있어 피해자는 의심 없이 따라 들어갔다. 피곤하고 술에 취해 몽롱했던 피해자는 큰방 침대에 누웠다. ㄷ씨와 ㄹ씨도 그 옆에 누웠고 그 모습을 ㄴ씨가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두 남자가 갑자기 피해자의 팔을 올려 잡고 가슴을 만졌다. 그 틈을 이용해 ㄴ씨가 치마와 속옷을 벗겨 성관계를 맺었다. ㄷ씨가 ㄴ씨와 역할을 바꿨고 ㄹ씨는 그 옆에서 자위를 했다. 피해자는 몸을 꼬거나 발을 들며 저항했지만 곧 포기했다. 성관계가 끝나고 피해자는 ㄹ씨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성적 수치심에 괴로워하다가 피해자는 신고를 했다.
ㄴ씨 일행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동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저항하며 계속 거부하면 성관계가 더 지속될 것 같았다”고 반박했다.
1심에 이어 2심도 강간죄로 인정했다(징역 4년). “강간죄의 폭행·협박은 가해 남성의 입장이나 제3자의 시각보다는 피해 여성이 인식할 수 있었던 구체적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항소심 판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확정되면 강간죄 ‘사각지대’가 상당히 좁혀질 수 있다.
독일 ‘도움 기대할 수 없는 상황’도 추가돼해외에서도 ‘저항 요건’은 완화되는 추세다. 독일 형법은 강간 규정에 폭행·협박과 더불어 ‘보호 없는 상태’를 이용하는 것도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등에서 자기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강요받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강간죄) 형사처벌의 흠결을 메우기 위해 도입된 규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참고 문헌 ‘여성학적 관점에서 본 강간범죄의 재판과정’(박선미·1989),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서의 폭행, 협박의 정도’(윤승은·2006), ‘준강간죄와 성폭법 제8조의 항거불능의 의미’(하태훈·2007), 서울고법 2014노242(2014. 7.24 선고), 서부지법 2013고합315(2014. 1.9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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